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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의 창고/ 비전나리의 설교

2010년 10월 6일 수요찬양 예배설교 : 나사렛에서 기적을 행할 수 없었던 이유 –막 6:2-3

by Peartree 2012. 12. 24.

La에 가시면, 풀러라는 신학교가 있습니다. 이 학교에는 세계적인 신학자 피터 와그너 박사라는 분이계십니다. 이 피터 와그너 박사님이 여름철에 멕시코와 국경이 맞닿은 어떤 마을로 전도 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쪽은 미국이고 길 건너는 멕시코였습니다. 첫날은 미국 쪽 길을 따라서 가게마다 집집마다 들어가서 전도지를 나누어 주며 전도를 하는데 사람들이 친절하게 받고 어떤 사람은 격려도 해 주고 그래서 팀원들이 아주 사기가 올랐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멕시코 쪽에서 전도지를 나누어 주며 전도하는데, 아무도 전도지를 안 받는 겁니다. 아주 싸늘하게 사람들이 눈초리를 보내며 가라고 소리까지 막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원래 멕시코 사람들은 친절한 사람들이고,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인데,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반응이 나오니까 신학생들이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배척을 받으니까 힘이 빠진 상태로 숙소에 와서 다음날 어떻게 할 것인가, 모임을 갖고 기도하는데, 그중에 한 학생이 이런 제안을 합니다. 무조건 전도부터 하지 말고 여리성을 도는 것처럼 말없이 멕시코 쪽의 길을 걸으며 침묵의 기도 행진을 하는 것이 어떠냐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 다음날 모든 대원들은 전도를 훼방하는 악한 영들을 예수이름으로 묶어 주시고, 저들이 복음을 받아 들일 수 있는 여유를 주옵소서 침묵기도 행진을 하고, 그 다음에 전도지를 주니까 잘 받더라는 것입니다.

길 하나를 두고 복음에 대한 극단적인 반응을 경험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거기를 떠나" 거기가 어디입니까? 지난주 5장에서 예수님께서 혈루증 여인과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고치는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두 기적을 일으키신 곳이 바로 가버나움이란 동네였죠. 이 가버나움을 떠나 예수님께서 고향인 나사렛으로 오신것입니다. 오시자마자, 2절 보시면,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미국과 멕시코처럼, 가버나움과 나사렛은 복음을 받아 들이는데,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사역 가운데 많은 기적들을 행하신 곳이기도 하지만, 나사렛은 본문 5절의 말씀처럼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 할 수 없었다" 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버나움과 나사렛은 거리상 차로 20분 정도의 거리라고 합니다. 그렇게 먼 거리는 아니죠. 그런데 가버나움 에서는 환영을 받고, 나사렛에서는 배척을 받으신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유명한 말씀을 하십니다.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그래서 저도 만약에 유명하게 되면 되도록이면 고향에 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미국도 대통령 선거 할 때 보면, 한국처럼 자기 지역 출신이면, 앞뒤 가리지 않고 Support 하는 것을 봅니다. 자기 고향 출신이라면 왠지 좋아하게 되고, 친분이 있는 것 같은 감정을 갖는 것이 사람의 자연스러운 감정인데도 불구하고,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이 쉽게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단이 어떻게든지 예수님의 사역을 방해하면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나사렛에서 기적을 행하지 않은 것입니다. 믿지 않고, 사모하지 않으면 절대로 은혜 받을 수 없는 원리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늘 나사렛에서 기적을 행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럼 구체적으로 기적을 행 할 수 없었던 이유가 무엇인지 성경에서 찾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첫째로, 기적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2절을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가로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뇨? 이 사람의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뇨?"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알아 왔던, 목수의 아들이 분명한데, 놀랍단 말이죠.

도대체 어디서 저런 지혜를 얻었을까? 가버나움에서 많은 기적을 행하셨다고 들었는데 그 권능의 출처가 권능의 source 가 어디에 있을 까? 그들의 마음속에서 의문이 생겼습니다.

 

이런 의문들은 참 좋은 것입니다. 진리를 찾는데, 참으로 중요한 요소입니다. 여러분들중에 이런 질문 한번 던져보지 않고, 예수 믿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예수 믿지 않을 때는, 궁금한 것이 많죠. 도대체 저 사람들이 주일날 모여서 무엇 하는지? 또 수요일은 왜 모이는지? 대체 설교는 30분 내내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은지, 쉴새 없이 떠들고 있는지..이러한 관심은 좋은 것입니다. 이러한 질문과 관심들을 통하여 결국에는 예수님을 만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사렛 사람들처럼 관심에만 그치고 만다면, 정작 우리가 관심 가져야

할 예수님은 관심 밖으로 밀려난다는 것입니다.

 

진리에 관심을 가졌으면, 예수님을 믿는데 까지 가야 합니다.

 

전도하다 보면, 처음부터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제가세상이야기 하면 부담 없이 듣다가 교회 이야기, 신앙 이야기 좀 하려고 하면 부담을 느끼고 도망치려고 합니다. 또 다른 분들은 교회 이야기, 구원에 관한 진리를 말하면 관심을 가지고 들으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어렸을 때 교회 다녔다고 이야기도 해주시고, 곧 나갈 거라고 말하고, 지금은 때가 아니니, 나갈 때가 있을꺼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진리에 아무리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을 만나기 전 까지는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라는거 아십니까? 예수님을 안 믿겠다고 하는 사람들과, 언젠가 나가겠다는 사람들과 다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똑 같은 전도 대상자고, 똑 같은 불신자라는 것이죠.

 

어쩌면, 믿겠다고 하면서 믿지 않는 분들이 더 위험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결국에는 그 믿는 날이 언제 인지 기약도 없고, 그것은 사단에게 계속 속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위험한 것입니다. 그런데 가장 위험한 사람들, 사단에게 완벽하게 속고 있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이냐면, "구원 받았다 치고" "예수 믿었다 치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지옥의 벼랑끝에 서 있으면서, 자신은 구원 받았다고 굳게 믿는 사람들. 사단에게 완벽하게 속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도 자신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섰다 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한 관심은 있었지만 믿음으로 연결시키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비극이었습니다.

  1. 두번째로, 편견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가복음 6장 3절 보시면,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 지라"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이렇게 말한 것이 아니라 뭐라 그랬습니까? 마리아의 아들이 아니냐? 왜 그랬을까요? 요셉은 이미 세상을 떠 났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마리아의 아들' 이 말 속에는 그 밑바탕에 편견이 깔려 있었습니다. 저가 홀어미 밑에서 자란 아들이 아니냐!

'마리아의 아들' - 이 말속에는 더 깊은 편견이 그 바탕에 깔려 있을지 몰라요.

예를 들어서 마리아와 요셉 근처 이웃에 살던 사람들은 이 집에서 일어난 스캔들을 아직도 잊어버리지 않았습니다. 무엇입니까? 옛날에 마리아가 처녀 때 애 뱃잖아? 그 작품이 예수잖아? 사생아? 이 편견이 아직도 나사렛 땅의 사람들의 마음을 아마 지배하고 있었을 거예요.

목수가 아니냐, 목수가 나쁜 직업은 아니지만 그러나 특별하게 우리의 선망을

자아낼 만한 그런 직업도 아닌 목수,

 

이런 요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더 알아보고 싶은 마음을 억제 시키고 있던 것입니다. 이것들을 가지고 편견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믿기 보다는, 마리아의 아들로, 목수의 아들로, …… 차라리 몰랐으면 그것이 약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 살다보면, 아는것 보다, 모르는 것이 훨씬 유익이 될 때 가 많습니다.

 

신앙생활하다 보면 안타까운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교회를 20년 30년 다녔다고 하면서 모든걸 다 아는 것처럼 더 이상 주님을 찾지 아니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분들과 가만히 앉아서 대화를 나누어 보면 예수님에 대한 고백이 없습니다. 신앙의 감동과 감격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대화를 하면 모르는 것이 없지만 그 안에 주님을 갈망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나사렛 사람들 처럼 예수님을 어렸을 때부터 알아왔고, 그 집안에 숫가락이 몇 개인지 다 알고, 예수님에 대해서 겉으로는 모르는게 없지만 결국 예수님을 배척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교회 역사만 오래된 사람들, 신앙 생활에 필요한 요소들을 다 안다고 하지만, 이런 사람일수록 예수님에 대한 진지한 구도 정신이 없고, 주님의 은혜의 깊이에 들어가 고자 하는 타오르는 열망 없어요.

 

다 안다고 착각하는 것, 이것은 무서운 편견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데 거치는 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3) 세번째로, 믿지 않았기 때문이예요.

 

나사렛 땅의 비극의 원인 가운데 하나는 믿지 않았기 때문 입니다. 5절에 보세요. 거기서는 아 무 권능도 행하실 수가 없었다. 따라서 소수의 병자들에게만 안수하여 고치셨고. 6절에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이상하게 여기신 예수님을 발견합니다.

예수님께서 고향으로 오셨을 때는, 힘든 사역 가운데, 고향 사람들로부터 위로와 격려를 받고, 또한 그들의 질병을 고쳐주고 싶은 마음에서 고향을 온 것입니다. 그런데 저들의 불신앙을 보고 예수님은, 자신에게 오는 소수의 사람에게만 안수하여 고치시고, 사역지를 다른 마을로 옮기십니다.

 

그러면, 왜 다수의 사람들이 믿지 않았을까요? 앞에서 말한 것처럼, 편견이 있을 수 있지만, 더 큰 이유는 불신앙의 분위기가 나사렛 마을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라고 하는 것이 나사렛 사람들 대다수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니 믿음을 추구했던 소수의 사람만 있었던 것입니다.

 

제가 자란 동네가 평택시 오성면 양교리 입니다. 제가 다닌 교회는 양교 4리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양교 2리 사람들만 교회에 거의 80-90% 출석하고

양교 4리는 교회가 그 동네에 있는 데도 불구하고, 교회에 나오는 가정이 거의 없

을 정도로 교회를 핍박했습니다. 이런 분위기가 수십년 동안 유지해온 것입니다.

동네가 거의가 불신자니까, 그렇게 다수의 생각에 따라서 바꾸지 못하고 살아

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서야 그런 동네에서 어렵게 한 두 가정씩 믿는 가정이 나오다 보니

까, 그런 분위가 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어디에 사는가도 참으로

중요하고, 그 사는 동네의 분위기도 중요한 것 같습니다.

 

사람은 다수의 의견을 따라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다수의 생각이 진리가 아닐 수 있다는 사실 앞에 정신을 차리셔야 합니다.

교회는 2000년 넘게 다수의 사상에 반대하며 싸워왔습니다. 세상은 다수가 진리

라고 말하지만, 소수가 진리일 때가 많이 있습니다.

 

아주 재미 난 역사적 사실이 있는데, 1842년에 미국 펜실베니아 에 사는 의사들과 의학자들이 모여서 위대한 결정을 하나 했습니다. 그 결정이 뭐냐면 뜨거운 물에 목욕을 하면 안된다. 그것은 류마티스와 폐렴의 원인이 될수 있다. 의사 선생님들이 이상한 결정을 했어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진리 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펜실베니아주 일대 그리고 상당히 많은 미국 땅 사람들이 무려 3년간 뜨거운 물 에 목욕을 안한 역사가 있습니다. 이것은 수년후에 그 이론은 뒤집어집니다. 다수가 틀린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편견으로 배척하고, 경험으로 배척한 나사렛 사람들에 대해서 살펴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대다수의 무리들 중에도 주님께 나온 소수의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다수의 사람들에게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소수의 무리에게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소수의 무리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도 주님을 따르는 무리는 소수의 무리입니다. 주님께로 가는 길은 좁고 협착하여 그 길로 가는 사람들이 많이 않다고 성경은 분명히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우리 꿈의 교회 성도님들, 주님과 나 사이를 가로막고 잇는 자신의 경험과 편견을 버리기고, 소수의 사람들이 되어 신앙의 정절을 지키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