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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의 창고/ 비전나리의 설교

2010년 10월 2일 새벽예배 : 남은자의 구원 - 롬 9:14-33

by Peartree 2012. 12. 24.

남은 자의 구원

롬 9:14-33

 

우리가 개인적으로 전도를 하다 보면 아무리 복음을 전해도 믿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그때에 우리들의 마음은 정말 안타깝죠.

특별히 어떤 사람은 믿을 만한 충분한 조건을 갖춘 분인데도 복음을 받아 들이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집안 대대로 예수 믿었던 가정에서 성장하신 분이거나, 자신의 부모 또는 조부모가 다 크리스챤 이거나, 성경 지식도 어느 정도 있고, 찬송도 알고 있는데도 영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고 거절하는 사람들을 볼 때에 그 안타까움은 더하게 됩니다.

 

사도바울이 당시에 자기의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았을 때 바로 이런 안타까운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로마서 9장 4절에, 사도바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었던 특권에 대해서 언급 하고 있습니다.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예수님을 믿을 만한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으면서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믿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도바울의 심정이 얼마나 안타깝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전도할 때 이렇게 믿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앞서면서도 또 한편 우리 마음속에는 감사의 마음도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게 믿지 못하는 예수를 나는 어떻게 믿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27절 보시면, 대다수의 불신자들 속에서 믿음의 자리에 서게 된 소수의 무리들에게 적용되는 성경적인 독특한 명칭 하나가 본문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27절에 '남은 자'(Ramnant)라는 단어입니다.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찌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이 '남은 자'란 말 속에는 두가지의 커다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로 남은 자란 구원받은 백성들입니다. 둘째는 계속해서 하나님 앞에 쓰임을 받는 백성들을 의미합니다. 고로 '남은자' 들은, 구원받고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의 아합왕이 통치하던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국적으로 우상숭배에 빠졌습니다. 아무리 둘러봐도 믿는 사람들이 없었던 시대였습니다. 그 시대를 살았던 엘리야 선지가 얼마나 고독했던지 어느 날 하나님 앞에서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하나님 나만 남았습니다." 이 말을 우리 식으로 말한다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믿는 사람이 왜 이렇게 없습니까"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선 엘리야에게 "아니야, 이 시대에 아직도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들을 칠천명이나 숨겨두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이들을 가리켜서 '남은 자' 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날 이 시대에도 아합왕의 시대와 별 다를바가 없습니다.

아마도 이 시대의 성도들을 일컬어 크리스천이라고 부르기 보다는 '남은자' 라는 표현이 적합할지도 모릅니다. 이 시대에 교회 문턱만 밟고 다니는 종교인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사람은 이런 사람이 아니고, 정말 하나님의 구원의 영광을 알고, 하나님의 손에 붙들림을 받아 쓰임을 받을 수 있는 '남은자' 들을 찾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이런 '남은 자' 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다시 27절의 말씀을 읽어 보십시오. 소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닷가의 모래같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말하기를 '남은 자'만 구원의 영광을 누린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남은 자'가 될 수가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15절보시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받을 수 있었던 원인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하기로 작정하였기 때문에 구원 받은 것입니다.

 

또 하나의 이유는 21절에 토기장이의 비유에서 발견되어 집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토기장이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토기장이가 진흙을 가지고 그릇을 만듭니다. 두 개의 그릇이 등장하고 있죠. 한 그릇은 귀하게 쓸 그릇이며, 또 한 그릇은 천하게 쓸 그릇입니다. 그러면서 "만드는 권한이 없느냐" 말씀하고 있죠. 이런 저런 그릇, 즉 간장 그릇이나 밥 그릇 등등 갖가지 그릇을 만들 권한이 전적으로 토기장에게 있다는 말입니다.

 

이 두 이야기를 가지고 신학적인 용어로 "하나님의 작정의 교리 혹은 선택의 교리" 라고 말합니다.

 

지금까지 신앙 생활 하면서, 이 선택의 교리를 이야기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은 불공평 하다고 말합니다. 천하게 쓰임 받도록 만들어진 그릇은 자기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렇게 만들어 졌다는 것이죠. 어떻게 생각하면, 그럴듯한 말인데, 그 말속에는 '하나님을 나의 창조자' 인정하지 않는 불신앙의 모습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불공평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직도 하나님을 우리가 선택할 수 있다는 생각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선택해야 하는데, 하나님이 나를 선택했다고 하니까, 기분 나쁘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했다는 선택의 교리를 생각하면, 감사와 기쁨이 넘쳐야 정상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빚어 만드셨는데, 귀하게 만드셨다는 것에 대하여 눈물로 감사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선택의 교리를 수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바울은 20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 (비난) 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그분은 전능하시고 전지하십니다. 만약 하나님에게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면 하나님이 아니시죠. 그분이 저와 여러분을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시대 가운데, 우리를 '남은자' 로 남겨 두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귀하게 만드셨으니, 그 그릇에 용도에 맞는 합당한 삶으로 오늘도 승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