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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의 창고/ 비전나리의 설교

2010년 10월 7일 새벽예배 설교: 구원의 증거 - 로마서 10:9-15

by Peartree 2012. 12. 24.

구원의 증거

로마서 10:9-15

 

몇 달 전에 미국에서 인국 센서스 조사를 마쳤습니다. 미국도 그렇고, 세계는 지금, 다양한 인종, 다양한 언어, 다양한 직업 등을 가지고 섞여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사회에서 이 사람들을 분류하는 방법도 아주 다양합니다. 인종으로 분류하고, 언어로 분류하고, 빈부의 격차로 분류하고, 종교적으로 분류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 믿고 구원받은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 사람들은 나누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사람을 볼 때 예수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과 받지 못한 사람으로 나누어야 합니다. 저 사람이 잘났건 못났건, 많이 배웠건 적게 배웠건, 많이 가졌건 적게 가졌건 관계없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영혼에 대한 관심입니다. 저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있는가? 구원을 받은 사람인가, 아니면 불신앙으로 지옥갈 사람인가를 살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서신서를 묵상하면 사도바울은 그의 평생의 삶에서 늘 두 가지 생각이 늘 떠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첫째는 나는 지금 구원 받은 상태인가? 그리고 두 번째는 내가 만나는 사람들이 구원받은 사람들인가?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읽은 본문 말씀은 이런 사도바울의 사상을 잘 대변해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 속에는 우리의 구원 받은 증거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첫째로, 구원받은 사람은 나 자신의 구원에 대해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9절 보시면, "네가 만일 네 입으로…, 네 마음에 믿으면" 이인칭 단수 '너' 라는 호칭을 강조하므로, 자기 자신의 구원에 대하여 본인이 더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독일의 어느 신학교 학장이 카나다를 방문하였습니다. 버스를 타고 길을 가는데 뒷좌석에 앉아있던 할머니가 그를 톡톡 두드렸습니다. "선생님, 예수님 믿으세요?" 신학교 학장인 그는 복잡한 차 안에서 전도하는 할머니가 감사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어머니의 모태에서부터 교회를 다닌 모태 신앙인입니다." 그때 할머니는 다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선생님에게 모태 신앙인이냐 아니냐를 물은 것이 아니라 구원받았는지 못 받았는지를 물었습니다." 자기를 무시하는 듯한 태도에 화가 난 학장은 버럭 소리를 질렀습니다. "나는 목사를 길러내는 신학교 학장입니다" 이 말에는 할머니는 기죽지 않고 다시 물었습니다 . "나는 선생님이 신학교 학장이냐 아니냐를 물은 것이 아니라 구원받았는지 못 받았는지를 물었습니다."

이 말은 들은 신학교 학장은 큰 충격을 받았고, 그후 놀라운 변화의 새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의 모든 신앙의 삶은 가장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질문을 날마다 물어야 합니다. 저도 날마다 이 질문을 던지고 삶니다. "나는 여전히 구원받은 사람인가? 나는 오늘 죽어도 구원받을 수 있는가?" 라는 이 질문 앞에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솔직히 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구원이 이루어지면, 구원 체험의 가장 외적인 표현은 "예수님은 나의 구주시요, 나의 주님이십니다"고 입술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믿지 않으면서도 입술로만 고백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종교적 환경에 익숙해 지면 종교적 모방을 능히 할 수가 있습니다. 남들처럼 기도하는 척 하고, 남들처럼 신앙고백도 할 수 있고, 사도신경도 줄줄이 외우기도 합니다. 정말 내 입술의 고백이 진정한 고백이 되기 위해서는 마음으로부터 그 사실을 믿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지식으로 알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 하지 않고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1. 두번째로, 구원받은 사람은 복음을 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습니다. 세상에 이 보다 더 위대한 사건이 있을까요? 이 보다 더 위대한 경험이 있을까요?

그렇다면 어떻게 침묵할 수가 있을까요? 이제 이웃의 구원을 위해서 이 복음을 가지고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14,15절 같이 읽겠습니다.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기독교의 역사 속에서 놀라운 사실은 초대교회 이후 1780년대에 이르기까지 선교에 관한 한 전 지구상의 모든 교회가 눈을 감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중에서도 소수의 사람들이 선교를 하기는 했었습니다만,

전 교회적으로 선교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고 복음을 전하고 선교하는 일이 1세기부터 시작해서 1700년대까지 깜깜한 암흑시대였습니다.

 

그러던 1787년의 어느 날, 영국의 한 젊은이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 후에 그는 성경이 너무 좋아서 성경을 계속 읽다 보니 성경의 매 페이지 마다 복음을 전해야 하는 선교의 책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이 청년은 그 후로, 구체적으로 세계지도를 만들어 복음을 한번도 접하지 못한 지역을 찾아 표시해 나가기 시작했고 그뿐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를 어느 지역으로 보내실 것인가를 생각하며 외국어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이 젊은이가 바로 현대 선교의 문을 열었던 유명한 윌리엄 케리입니다.

 

이스라엘에는 두 개의 호수가 있는데, 갈리리 호수와 사해입니다. 하류로 물을 흘려 보내고 상류로부터 계속 물을 공급받는 갈릴리는 언제나 맑고 푸른 물을 언제나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해는 받기만 하고 나누어 주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죽은 바다가 된것입니다. 고인 물은 썩습니다. 물은 흐를 때 비로소 신선함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죠.

 

오늘날 나를 구원한 이 복음의 불길이 나에게서 끊겨서는 안될 것입니다. 불은 계속해서 옮겨져야 꺼지지 않듯이 복음은 계속 불길처럼 번져가야 합니다.

 

이런 귀한 사역을 감당하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의 증거 인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