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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의 창고/ 비전나리의 설교

수요예배설교 : 네 종류의 마음 밭 - 막 4:1-20

by Peartree 2012. 12. 24.

네 종류의 마음 밭

막 4:1-20

 

요즘은 설교의 홍수시대라고 합니다. 케이블 방송이나, 라디오, 인터넷 등등… 맘만 먹으면, 한국에서 유명하다는 목사님 설교를 언제나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시대입니다. 이렇게 명 설교들을 굳이 교회에 가지 않아도 들을 수 있다는 것이 행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설교의 홍수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부작용으로 작용할 수 있는 요인이 있습니다. 이 귀한 설교들이 굉장히 값싸게 취급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두 사람이 싸움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안되겠다 싶으니까, '나 한 테 설교 하지마' 합니다. 가정에서도 엄마의 잔소리를 듣기 싫으면 '엄마, 제게 설교 하지 마세요' 합니다. 무슨 이야기 입니까? 잔소리 하지마 ! 이 말을 설교하지마! 로 바꾸어 말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설교가 잔소리 같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을 비롯하여, 예수님 그리고 그 후에 많은 설교자들의 설교는, 듣는 이로 하여금 생명력을 불러 일으켰는데, 이제는 잔소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가 오늘날 설교자들에 직면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비단 설교자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설교를 듣는 청중의 반응이 문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오늘 '씨 부리는 비유' 를 통해서 말씀은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9절 보시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내가 귀를 가지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듣는 것은 나의 책임입니다. 그래서 오늘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우리가 어떠한 자세로 말씀을 받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때는 아마도 봄철이었던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배를 타고 계시고, 바닷가에 큰 무리들이 예수님의 설교를 들으려고 모여 들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바닷가 저 건너편에서 씨를 뿌리는 농부들의 모습을 바라보시면서 이 유명한 '씨 뿌리는 비유' 를 시작하셨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오늘 본문에 농부가 씨를 뿌리는데, 어디에 떨어집니까? 길가, 돌짝밭, 가시밭, 그리고 옥토에 떨어지게 되죠. 이것을 말씀은 받는 전형적인 네 종류의 사람들이 있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의 홍수 시대를 살고 있는 오늘날에도 똑같이 네 종류의 말씀을 받는 청중들이 교회 속에서 발견되어 진다는 것입니다. 어떤 신학자는 '씨 뿌리는 비유' 는 교회 안에서 구원 받는자의 비율이 4명중에 1명, 그러니까 25% 만 구원 받는다 라고 말하는 신학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비유는 구원받는 비율을 말하는 것 보다는, 교회안에서 참 말씀을 듣고 참 결실을 맺는자가 심히 적다는 메시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면 교회안에서 말씀을 받아들이는 네 종류의 청중들이 있는데, 어떤 종류의 사람들인지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첫째는 길가 같은 심령입니다.

4절 보시면, "말씀이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다" 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새들' 은 15절 보시면, '사단' 이라고 알려주고 있습니다.

왜 사단이 우리의 마음속에 떨어진 이 말씀을 빼앗아 갑니까? 누가복음 8장 12절의 '씨뿌리는 비유'에서 그 이유를 "그들로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라고 설명합니다. 길처럼 단단하게 굳어진 심령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그 딱딱한 마음 밭에 하나님의 말씀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사단이 빼앗아 가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충격을 받았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천로역정]의 저자 존 번연이었습니다. 그는 교회에 출석은 하면서도 무신론자였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교회에 출석하지만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이 살던 이 사람이, 어느날 성경을 대하면서 이런 의문이 생겼습니다. "나는 교회에 이렇게 오랫동안 출석했는데, 나는 이렇게 교회환경에도 익숙하고, 설교도 수없이 들어 왔는데, 어쩌면 이렇게 내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없으며 여전히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상태로 이 자리에 앉아 있을까?"

그러던 존 번연이 성경의 '씨뿌리는 비유' 를 읽다가 충격을 받습니다. 자기의 마음속에 떨어지는 "말씀의 씨"를 빼앗아 가는 것이 사단이라는 사실 앞에 그는 놀라기 시작합니다. 자신이 지금까지 사단에게 속고 있었다는 사실이 번연을 괴롭게 만들었습니다. 그날부터 존 번연의 설교를 듣는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참 믿음에 도달하게 되고 기독교 역사에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혀졌다는 위대한 [천로역정]의 저자가 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적어도 일주일에 한번은 교회에 출석합니다. 설교도 듣습니다. 어떤 설교는 잔소리로 들리기도 하고, 어떤 설교는 나를 깨우기도 합니다. 예배가 마치면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성도들과 식사하며 교제를 합니다. 그러다가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집으로 돌아갑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고, 설교를 듣고, 찬양을 한 이 모든 것들이 매일의 습관처럼 되어져서, 마음이 굳어져 버린 상태는 아닌지 우리는 자신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말씀을 듣고 변화가 생기지 않으면, 사단이 와서 계속해서 내가 먹을 양식을 빼앗아 먹어 치웠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1. 두번째는, 돌짝밭 같은 심령이 있습니다.

5절 보시면,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않으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말라" 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를 어떻게 풀어주고 계십니까? 16절 보시면,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이런 사람은 말씀을 듣고 "맞았어, 정말 그 말씀이 옳아, 이 말씀이 진리야" 하며 이렇게 말씀을 아멘으로 받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17절 보시면,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간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말씀을 듣는 순간은 얼마나 좋은지요. 그러나 이 말씀대로 살려고 우리 삶 속에 적용 하려고 하는 순간, 그렇게 말씀대로 살기가 여간 힘들지가 않습니다. 그 어려움을 느끼는 순간 결국 진리의 말씀에서 다시 등을 돌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한 길가와 같은 마음밭의 적이 사단이었다면, 이 돌짝밭과 같은 마음밭의 적은 누구입니까? 육신입니다. 왜냐 하면 우리의 육신은 언제나 나 자신을 위해서 살도록 길들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예수를 믿으면, 뭐든지 만사 형통하는 줄 알았는데, 세상친구는 하나, 둘 떠나가고, 재미없는 그리스도인들만 알게 되고, 예수 안 믿을 때보다, 믿을 때가 더 살기 힘들고, 말씀을 지키려고 하니까, 세상사는 재미도 없고, 그래서 쉽게 등을 돌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17절의 말씀대로 "뿌리가 없는 신앙인" 이라고 합니다.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등지고 떠나간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처음엔

예수님의 말씀이 진리인 줄 알았는데, 그를 향하여 예수님은 "네가 가지 것을

다 팔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나를 쫒으라" 이렇게 요구하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이 부자 청년의 마음속에 "이것은 나를 위한 기독교 신앙이 아니야"

라는 결론을 맺죠. 그리고는 떠나가는 부자 청년과 같은 모습이 오늘날 우리

주변에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 조금만 손해가 오면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뿌리 없는 신앙인들이 되지 맙시다. 그 길은 죽더라도 가는 것입니다.

 

  1. 세번째는, 가시밭과 같은 심령입니다.

18, 19절 보시면,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풀어 주십니다. "가시 떨기에 뿌리운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치 못하게 되는 자요"

 

길가와 같은 마음밭의 적은 사단입니다. 돌짝밭은 육신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리고 가시밭의 적은 세상입니다. 우리가 알 수 있듯이 그리스도인들의 삼대 적은 "마귀와 육신과 세상"입니다.

 

가시밭과 같은 마음밭은, 처음에는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큰 사랑이 있어서 마음 속에서 말씀이 자라나지 못하게 막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두 주인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도 사랑하지만, 세상을 더 사랑하여 그 안에 예수님이 드러나지 못해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상태가 됩니다.

 

세상 살면서 필요한 돈을 벌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동기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스도 인으로 내가 돈을 벌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나를 위한 것인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지. 같은 물질이라도 어떤 물질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합당한 삶에 쓰여지고, 주의 사역에 거룩하게 쓰여질 수 있지만, 어떤 물질은 하나님에 대한 나의 사랑을 막고 있으며, 신앙 성장을 가로 막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면 이 물질은 적인 것입니다.

 

정복할 곳이 없어서 울었다고 하는 알렉산더 대왕이, 마지막 남긴 유언이 "내가 죽으면 관 양쪽에다 구멍을 파라, 그리고 내 손을 바깥쪽으로 내 밀으라!" 했다고 합니다. 죽을 때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한다는 것을 알려주지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여러분 가치 없는 세상 것 때문에 영원한 가치를 포기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1. 마지막으로, 네번째는, 좋은 밭은 가지 사람입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어떻게 결실을 맺습니까?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이런 결실을 맺습니까? 20절 보시면, "말씀을 듣고, 받은" 사람들입니다. 똑 같은 비유를 기록한 누가복음 8장 15절의 '씨뿌리는 비유"에서는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 라고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결실하는 자의 조건으로 착하고 좋은 마음이어야 한다는 것을 맨 처음에 놓았습니다. 착하고 좋은 마음이 말씀을 듣고, 지키게 되고, 인내하여 결실을 맺게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악하고 나쁜 마음이면 말씀을 들을 수 없게 되는 것이죠.

 

본문 12절로 다시 보시면, 이런 사람들이 얼마나 불행한 사람들인지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들은 씨를 뿌릴 수 없는 밭을 가진 가진 사람들입니다. 씨를 받을 준비도 되지 않은 사람들, 먼저도 말씀 드렸죠. 회개할 기회를 잃어버린 사람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저들이 듣지 못하도록 비유로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의 홍수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북한 같은 나라는 성경 한권 가지고 있는 것이 목숨을 걸고 사는 것입니다. 중국 같은 대국도 성경책 가지고 입국하는 것이 금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곳의 크리스천들은 말씀을 지키고 결실을 맺으며, 살고 있으며, 말씀이 풍성한 곳에 사는 우리들은 이 말씀을 자기의 형편과 사정에 맞춰 지키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곳에는 열매도 없고, 변화도 없다는 것이죠.

우리 꿈의 성도님들은 말씀이 떨어져 잘 자라도록, 마음을 옥토와 같이 갈아서, 여러분의 삶속에 100배의 결실을 맺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