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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의 창고/ 비전나리의 설교

주일예배 설교 : 평강 - 빌 4:4-7

by Peartree 2012. 12. 24.

평강

빌 4:4-7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마음이 기쁘고, 즐겁고, 평안한 경우를 많이 격지만, 어쩌면 더 많이 격는 경우는 정반대로 불편하고, 답답하고, 짜증이 나는 경우를 많이 격게 됩니다. 특별히 인간 관계가 어려워질 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깨어질 때, 우리는 마음이 불편해지고, 답답하고, 심해지면 분노로 표출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경기도 일산의 한 아파트의 경비원으로 일하던 51살 한 모씨는 자신이 다니는 직장, 그러니까 그 아파트에 사는 김모씨의 집에 배달되는 우유팩에 주사기로 화장실 소독약을 계속해서 넣었습니다. 그리고 그 김모씨의 승용차 바퀴를 두 번씩이나 펑크를 냈습니다. 결국엔 잡혀서 경찰의 조서를 받는데, 진술하기를 그 김모씨가 그 아파트로 이사올 때 짐이 별로 많지 않다는 이유로 아파트내에 있는 에스카레타를 사용해 놓고 사용료 6만원을 내지 않아서 얄밉고 화가 나서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분노를 참지 못한 한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의 사건은 우리가 다 경험을 해서 알고 있듯이, 2007년 4월 16일에 미국 최악의 총기 사건으로 기록된 버지니아텍 총기 사건입니다. 주범 조승희는 8살에 미국에 이민온 1.5세 였고, 23세살의 영문학과 학생이었습니다. 권총 2자루로 2시간 동안 자신을 포함해서 33세명을 사살을 하고, 19명에게 부상을 입히는 무서운 일을 일으켰습니다. 학교대변인이었던 래리 힝커는 '그는 늘 외톨이였다' 라는 진술을 했고, 신문 보도에 의하면, 그의 기숙사 방에서 발견된 많은 글귀들이 온갖 독설과 불만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분노와 화로 가득한 글로 가득 담겨져 있었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분노와 화를 다스리지 못해서 이 비극적인 일을 빚어낸 것 같습니다.

 

미국의 가정 사역의 권위자라고 할 수 있는 제임스 답슨 목사님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집단 살인을 일으킨 사람들의 공통분모는 설명할 수 없는 내면의 분노다"

이 내면의 분노가 쌓이기 시작하면, 마음이 불편해 지는 것이 점점더 확장되어 지고, 결국 그것이 화를 만들어 내고 분노로 치솟게 될 때, 마치 어느날 갑자기 휴화산으로 있던 화산이 용암을 분출하면서 무서운 화산이 되어 폭발하는 것 처럼 터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임스 답슨 목사님은 "이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고 누구든지 이런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라고 말합니다.

짜증과 분노가 복받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편안한 상태에서 편하게 살고 싶지만 세상은 단 한 순간도 우리를 편안한 상태로 내버려 두지를 않습니다. 좀 편안한 상태로 휴식을 취하려고 하면, 온갖 고민들이 머리 속으로 들어와 짜증을 내게 만듭니다. 편안한 마음으로 교회에 가서 혼자 음악을 틀어놓고 기도하고, 책도 보려고 기분 좋게 운전하고 오는데, 운전 조금 실수 했다고,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 세우고 지나갑니다. 그러면 또 금새 짜증이 납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럴 때 어떻게 이러한 일들을 다루어 나갈 것인가 생각하게 되는데, 오늘 본문 7절에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이 말씀은 2000년전에 쓰여진 말씀이지만 요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 어떤 약속 보다도 절실히 요구되는 약속의 말씀일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잘 다스리며, 평안을 누리며 살 수

있도록, 어떤 말씀을 해주시는 본문에서 살펴 보고자 합니다.

 

  1. 첫째는, 4절 보시면,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평강'을 충만이 누리며 살 수 있는 비결 제 1호는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며 사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 말씀을 거듭 반복하고 있습니다.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여기서 말하는 기쁨은 감정적 기쁨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새집을 사고, 새옷을 사고, 사업이 잘되고, 만사 형통해서 얻어지는 기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 사도 바울이 말하는 기쁨은 기뻐할 수 없는 환경에 있을 지라도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기쁜일이 생기면, '기뻐하라'고 말하지 않아도 기뻐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때에는 굳이 기뻐하라고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기쁜일이 생기지 않고, 삶이 힘들고, 고달플 때에는 '기뻐하십시요. 라는 이 한마디가 큰 힘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 "삶이 그대를 속이고 있습니까? 내 맘대로 되는 일이 없습니까?저도 사도 바울처럼 이 말을 드리고 싶습니다. 기뻐하십시요. 우리가 지금은 힘들고 고달프지만 다시 오실 주님을 소망 삶고 기뻐하십시요. 잠깐이면 만나게 될 주님, 그 주님의 품에 안겨서 기쁨의 눈물을 흠치며 그날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기뻐하십시요.

제가 이렇게 말씀 드리는데도, 목사님 !!! 어떻게 기쁘지 않는데 기뻐할 수가 있습니까? 라고 제게 반문 하시는 분도 있을 수도 있습니다. 저도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사실 그것이 자연스런 반응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기뻐할 수 없는 환경 속에 있을지라도 감정적 반응에만 그치지 말고, 의지적으로 신앙적으로 기뻐하라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할 때에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 우리의 영혼을 지켜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관계 뿐만 아니라, 모든 삶의 환경에서 기뻐하며 사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이 사람이 구원받았는냐, 구원받지 않았느냐의 차이점은, 단순히 사도신경을 외우느냐, 외우지 못하느냐의 차이가 아닙니다. 세례를 받았는냐, 세례를 받지 않았는냐의 차이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에 진정 구원 받을 사람의 표징이라고 하면, 그 안에 구원의 기쁨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라고 생각되어 집니다. 구원 받은 성도라면 당연히 기뻐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죠. G.K 체스터톤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Joy that is the gigantic secret of the Christian life, 기쁨 이것이야 말로 크리스찬이 가진 엄청난 비밀이다."

 

  1. 두번째는, 5절 보시면, 관용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영어 번역으로는 "Gentleness" 라고 번역되었습니다. 관대함입니다.

다시 5절 보시면, 누구에게 관대하라는 것입니까? 모든 사람에게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모든 사람은 누구를 포함하고 있습니까? 내가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

가족들 그런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사실은 보기 싫은 사람들, 나를 짜증나

게 만드는 사람들, 심지어는 원수들 까지도 관용을 베풀라고는 뜻입니다.

 

이 말을 들으시고, 목사님 어떻게 그렇게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습니까? 저는 도저히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일찌감치 포기하는 분들 있을지도 모릅니다. 사실 여기 서 있는 저도 이 말씀 앞에서 힘들다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은 우리의 형편과 사정에 의해서 하나님의 성품 자체를 바꾸시지 않습니다. 이 관용과 용서가 하나님의 성품이기 때문에 우리도 그렇게 해야 마땅한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힘으로는 힘들지만, 그러나 십자가에서 원수를 죽기까지 용서하시면서 완전한 관용을 베푼 주님이 도와주시기에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남에게 관용을 베풀거나, 남을 용서하면, 누가 좋습니까? 내가 좋아 집니다.

7절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을 지키게 되는 축복이 나에게 임한다는 것입니다.

 

용서하면 나의 마음이 편안해 집니다. 맞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남을 용서하고 관용하기 힘들어 합니다. 조그만 자존심 그냥 내려 놓으면 되는 것인데………

 

어느날 사이가 아주 좋지 않은 부부가 있었다고 합니다. 어떤 일인지 아내가 먼저 죽게 되었습니다. 천국문 앞에서 들어 갈려고 줄을 서고 있는데, 베드로가 문지기로 있으면서, 줄 선 사람에게 'LOVE' 하며 스펠링 대보라고 합니다. 그래서 대답하면 통과 ! 가만히 보니까, 천국 들어가기가 너무 쉬운 거예요. 차례가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스펠 대보라고 하면서 'Love'합니다. 그리고는 베드로가 너무 오래 서 있어서 화장실 좀 다녀오겠다고 하면서 자리좀 봐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오는 사람에게 'love' 하며 스펠만 물어보고 대답하면 들여보내고, 대답 못하면 지옥으로 보내면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리를 봐주고 있는데, 멀리서 그렇게 꼴 비기 싫은 남편이 오는거예요. 그래서 'love'했다간 저 인간도 들어갈 것 같으니까, '차이코프스키' 스펠링 대라고 했다고 합니다.

 

사실 천국은 이렇게 들어가는 곳이 아닙니다. 이것은 지어낸 이야기 입니다.

천국은 먼저도 말씀 드렸듯이 사랑이 넘치는 곳인데, 이 땅에서 용서하고 관용을 베푼 사람들이 가는 곳입니다. 물론 예수를 믿는다는 전제하에 그런 것입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예수님께서 허물 많고 죄 많은 저와 여러분들을 죽으면서까지 용서하셨는데, 우리가 그 조금만 자존심 때문에 남을 용서하지 못하면, 신앙생활에 문제가 생깁니다. 주님이 헛되이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평강을 지키실 수 없는 상황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1. 세번째는, 6절 말씀대로, 염려하지 않는 삶에 평강이 임합니다.

 

우리가 인생 살다보면, 염려꺼리가 파도 처럼 밀려오게 됩니다. 한가지 밀려오면, 또 한가지가 밀려오고 끊이없이 걱정거리와 시름하며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여기서 사도바울이 말하는 염려는 생활의 염려입니다. 어떻게 하면, 성경을 많이 읽을 수 있을까? , 어떻게 하면 기도 응답을 받을 수 있을까? 이런 염려가 아니고, 누가 복음 21장 34절에 말씀 보시면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이 날을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이 말씀과 같이 이 염려는 마음을 둔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 염려는 마음을 굳어지게 만듭니다. 그래서 주님이 다시 오신다고 해도 전혀 관심도 없고, 설마 2000년 동안 오지 않았는데, 왜 하필 이때 오신다고 그러는 걸까? 합니다. 다시 누가복음 21장 34절에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임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염려로 인하여 주님이 언제 오실지 관심도 없고, 기다림도 없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본문 6절 보시면, "염려하지 말고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염려를 감사로 바꾸라는 것입니다.

어떤 부인은 남편이 수입은 적은데다 병석에 눕게 되었습니다. 생활이 어려워서 집을 팔고 그것도 모자라서 식품점에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다섯 아이들은 아무 것도 모른 채 입을 벌리고 부인은 남의 집에서 식모살이를 해주면서 헌 옷을 사다 아이들에게 입혔습니다. 하루는 아들이 연필을 한 묶음 훔쳐 가지고 선생님한테 매를 맞았습니다. 노력해도 어려운 세상을 부인은 도저히 혼자 살아갈 희망이 없어서 근심하는 중에 아이들과 함께 연탄가스를 마시고 죽으려고 연탄 통을 열어 놓은 채 아이들과 같이 자리에 누웠습니다. 그런데 그때 라디오에서 찬송 369장 이 흘러나왔습니다.

죄 짐 맡은 우리 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 걱정 근심 무거운 짐 우리 주께 맡기네/ 주께 고함 없으므로 복을 얻지 못하네/ 사람들은 어찌하여 아뢸 줄을 모를까

그 부인은 찬송을 들으면서 자기의 잘못을 깨달았습니다. 모든 문제를 단독으로 해결하려 하였지 하나님께 기도로 아뢰지 않았던 자신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여자는 가스를 끄고 문을 열고 온종일 눈물로 기도를 드렸습니다. 다섯 아이를 주신 것을 감사하고 허물어져 가는 집에서 세 들었으나 지붕이 있는 것으로 감사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감사는 근심을 이길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우리 삶이 평강으로 가득찬 삶을 살수 있을 까요?

 

우리가 신앙 생활하다 보면 늘 오해를 하는 것이 있는데, 환경이 잘 풀리면,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환경이 잘 풀리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지 않는구나 오해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잘 못 믿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이들을 키워봐서 압니다. 정말 좋은 부모라면, 자녀들이 해 달라는대로 부모님을 다 해주지 않습니다. 자녀에게 아픔이 있을 지라도, 그 자녀에게 해 줄 것은 해 주고, 안 해줄것 안 해줍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우리의 뜻에 따라 움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움직이십니다. 때로는 우리가 기도하면 들어주시죠. 그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이 최선의 선택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잘 몰라요 그래서 어떤때는 그 뜻을 몰라 답답하고 짜증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신뢰하면 그 짜증도 기쁨으로 바뀔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나의 환경과 나의 처지를 넘어서 모든 것은 하나님께 맡기고 그저 기쁨으로 살아가는 한 사람이 있는데 그 분이 하박국 선지자입니다. 이분의 고백을 들어 보셨습니까? 하박국 3장 17절 보시면, "비록 무화가 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지금 우리 식으로 한다면, 사업이 안되고 직장에서 문제가 생기고, 가정에서 문제가 생기고, 건강에 문제가 생기고 온통 그런 문제들이 사라지지 않고 점점 나의 삶에 고난으로 자리매김 한다 할지라도 하박국 선지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이 고백이 저와 여러분들의 고백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