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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의 창고/ 비전나리의 설교

수요설교 : 두렵고 떨림으로 - 막 3 : 20-30

by Peartree 2012. 12. 24.

두렵고 떨림으로

막 3 : 20-30

 

예전에는 사람들의 최고의 관심은 돈이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요즈음 최고의 관심은 건강일 것입니다. 예전처럼 너나 할 것 없이 못사는 시절에는 악착같이 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많이 가진 사람이나, 적게 가진 사람이나 먹고 사는데 별 차이나 나지 않습니다. 하루 세끼 똑 같이 먹고, 똑 같이 잠자며 사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이 좋은 세상에서 어떻게 하면 장수 하며 살 수 있을까, 하는 쪽으로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특히 한국 사람들은 몸에 좋다면 안 먹는 것이 없고 못 먹는 것이 없습니다. 미국 사람들이 잘 먹지 않는 개나 뱀은 말할 것도 없고, 제가 한국 나오지 전에 '자라 용봉탕' 이라 하여 자라까지 먹는 것을 보았습니다.

미국의 TV 프로중에 Believe it or not 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한국 사람들이 산 낙지를 산채로 먹는 것을 방영한 적이 있었습니다. TV 프로 이름이 '믿거나 말거나' 잖습니까?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 이런 것은 일상 생활인데, 이 사람들이 보기에 믿을 수 없는 미친 행동으로 보였나 봅니다.

또 그 TV 프로그램 보니까, 미국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 살아있는 바퀴벌레를 머지 않나, 썩은 고기를 먹지 않나, 이건 제 정신이 아니면 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이렇게 행동하는 사람들의 관심이 어디에 초점을 두고 사는지 잘 말해주고 있는 한 예입니다. 건강에 초점을 맞춘 사람은, 건강에만 무리하게 신경을 쓰는 것을 보죠. 돈에 초점을 맞춘 사람은 벌레건, 썩은 고기든 돈을 벌기

위해서 무리하게 행동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20절을 보시면 예수님께서도 오늘은 좀 무리하고 있습니다. 좀 쉬셔야 하는데, 식사할 겨를도 없이 집으로 찾아온 많은 사람들을 맞아 주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삶의 초점은 건강도 아니고, 돈도 아닌 것을 발견합니다. 예수님의 초점은 질병의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는 백성들이 예수님의 최고의 관심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들을 위해서 무리하게 사역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말을 합니다. '무리해서는 안 된다. 모든 일을 적당히, 수준에 맡게 해야 한다' 라고 말하곤 합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아이러니 하게도, 사람들은 여러 가지 다양한 가치를 위해서 무리하게 살고 있죠. 도박에 무리하게 빠져서 시간과 돈을 낭비하기도 하고, Shopping Mall 에 가서는 무리하게 돈을 쓰기도 하고, 건강에 너무 무리해서 자신의 몸을 거의 학대하는 수준으로 몸을 고생시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정작 사라들은 하나님께 헌신하는데 있어서는 '무리하면 안 된다' 말합니다.

요한 복음 12장 3절 보시면, 마리아가 지극히 비싼 향유 (나드 한근 ) 을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털로 씻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가룟유다가 '어찌하여 300 데나리온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라고 말합니다. 300 데나리온이면, 성인 남자의 300일 일당입니다. 거의 1년치 연봉입니다. 이렇게 비싼 것을 주제 넘게 왜 드렸느냐는 것입니다. 너무 무리하게 드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누가 그랬습니다. 가룟유다가 그랬습니다. 마귀는 지금도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의 주제를 생각해서 무리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냥 적당히 신앙생활 하고, 적당히 헌신하고, 적당히 기도하라고 합니다.

 

마가복음 12장 44절 보시면, 예수님께서 두렙돈 (2천원) 을 헌금한 과부를

칭찬하고 있습니다. 비록 적은 돈이었지만 과부에게 있어서 생활비 전부였습니다. 그 과부는 그날 무리하게 드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칭찬하였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3절 이하 보시면, 바울은 전도하면서 그가 겪은 많은 고난과 역경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옥에도 갖히고 매도 맞고 태장도 맞았으며 파선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강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 시내와 바다의 위험을 겪었으며 주리고 목마르며 굶고 헐벗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모두 그가 주님을 위해 헌신하는데 있어 무리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를 무리했다라고 하지 않고, 헌신이라 말합니다.

 

우리는 주를 위해 헌신하는데 있어서는 무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도 항상 적당히 사역하지 않았습니다. 식사를 걸러가면서까지 영혼 살리는데 힘썼습니다. 이렇게 무리할 정도의 헌신이 영혼을 살렸던 것이죠.

 

그러면, 이렇게 지극히 정상적으로 사역하시는 예수님을 향하여 세상은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오늘 말씀 속에서 몇 가지 찾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첫째로, 미쳤다 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21절 말씀에서 "예수님의 친속들이 듣고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주변의 많은 사람이 예수님이 미쳤다 고 자주 말하니까 예수님의 가족들이 예수님을 데려가려 하였습니다. 즉, 그의 친척들까지도 예수님을 비정상으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정상과 비정상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이는 무엇이 기준인가에 달려 있습니다. 세상가치로 볼 때는 예수님의 이런 행동이 미친 것 처럼 보일지 모르나, 하나님의 가치로 보면 지극히 정상적인 행동이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 14절에서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지혜로서는 하나님의 지혜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즉 세상은 미쳤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13년 전 한국에 IMF 라는 국가 부도상태였던 적이 있었습니다. 경제적으로

국민들이 모두 힘들었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반대로 잠자던 상태에서, 다시

깨어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9.11 테러 이후 미국의 많은 국민들이 예배의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많은 국민들이 죄를 회개하며 겸손의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과연 정상입니까? 비정상입니까? 지극히 정상입니다. 그런데도 미국

정부는 "국민 여러분! 이제 정상으로 돌아가십시오"라고 말하였습니다.

다시 예전의 생활로 돌아가, 돈을 위하며, 자기를 위하며, 적당히 죄도 지으며,

그렇게 살라고 세상은 요구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경제가 잘 돌아가고,

그냥 하나님 없이도 안전하게 살면 그것이 정상인지 아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도 고난이 올 때는 겸손해지며 기도합니다. 그러다가 그 위기를 넘기면 세상적 삶으로 다시 돌아는 반복을 거듭하기도 하죠. 그렇다면 과연 위기를 넘기고 예전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이 정상입니까? 아니면 고난이 있더라도 하나님과 동행하며 겸손하게 하나님께 예배하며, 기도하는 것이 정상입니까?

하나님을 찾는 것이 정상입니다.

세상사람들이 보는 기준과 하나님께서 보는 기준이 완전 반대입니다. 세상사람의 기준은 미쳤다고 하지만, 하나님의 기준은 지극히 정상인 것입니다.

 

  1. 두번째는, 귀신에 드렸다고 모함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22절 보시면,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이 예수님에 대해 말하기를 "귀신의 왕의 힘으로 귀신을 쫒아 낸다"고 모함하고 있습니다. 지극히 정상적인 예수님을 향하여 귀신들렸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직설적으로 답변하지 않으시고 비유를 들어서 말씀하십니다.

즉 어느 집이든, 나라든, 서로가 분쟁하면 서지 못하고 다 망하는 법인데, 귀신이 귀신을 쫓아낸다는 것은 귀신들끼리 서로 분쟁한다는 것인데, 사탄이 그렇게 어리석을 정도로 망할 길을 택하겠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귀신의 왕의 힘을 빌려서 다른 졸개 귀신들을 쫓아낸다는 말은, 말도 되지 않는 소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비유 하나 더 말씀하십니다. 27절에.

어떤 강한 사람의 집에 들어가 그 집을 늑탈 할 때에는 그 강한 사람을 먼저 제압하고 꼽작 못하게 한 다음에야 강도짓 할 수 있지, 그 강한 사람을 그대로 두고 그 집에서 강도짓 한다는 것은 도무지 말도 되지 않는 소리가 아닌가?

따라서 귀신들을 쫓아내려면 귀신의 왕을 먼저 제압하고 결박해서 꼼짝 못하게 해야 하는데, 그 귀신의 왕의 예수님께 힘을 빌려 준다는 것은 그 귀신의 왕이 제정신이 아니고는 그렇게 하지 않는 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3장 28절~29절에 '성령 훼방죄' 를 말씀하시며,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즉 서기관들을 향하여 너희들이 성령 훼방죄를 저지르고 있는데, 이 죄는 용서가 되지 않는 죄다. 그러니까, 너희들은 지옥으로 가도록 운명지어 졌다는, 아무 무서운 말씀을 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성령훼방죄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도 용서받지 못할 죄입니다. 그러면 어떤 것이 성령훼방죄입니까?

30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이는 저희가 말하기를 더러운 귀신 들렸다 함이러라" 예수님에게 귀신들렸다고 뒤집어 씌우는 행위, 이런 양심에 화인 맞은 행동을 일컬어 성령을 훼방하는 죄를 짖고 있는 것이라 말씀 하셨던 것입니다.

 

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사역을 처음부터 지켜 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보가 아닌 이상 전능하신 예수님의 말씀과 이적들은 3년이 넘게 보고 들었으면서, 변화되지 않은 것은 저들이 예수를 믿지 않기로 작정하였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는 이런 기적을 일으킬 수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해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고, 거짓말로 귀신들렸다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성경은 이런 사람들을 양심에 화인 맞은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알면서도 애써 부인하는 사람.

 

가룟유다와 같은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분명히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고 있으면서, 돈 때문에 예수님을 배신하고 팔아 넘긴 양심에 화인 맞은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용서 받을 길이 없는 것입니다 요일 5:16절 보시면, '이 사람들은 이미 사망에 이르는 죄를 범한 사람들입니다.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여기 보시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에게 생명주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망에 이르는 죄를 짖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기도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시간 낭비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럴 시간 있으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인들을 위해서 기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성령 훼방죄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방해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아들 되심을 알고 있으면서 귀신들렸다고 거짓말하는 죄. 이성적으로 분별할 수 있고, 영적으로도 어느 정도,

진리가 무엇인지 알고 있으며, 예수님께서 자신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 예수님을 거부하고,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자신의 길로 가는 사람. 이런 사람은 사하심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었다가, 돌아선 사람은 너무 멀리 가지 말아야 합니다. 양심에 화인 맞은 상태까지 가면 돌이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 믿기 전에는 범죄하여도 용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고 난 다음에는 예수 안에 거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모르고 지은 죄보다 알고 지은 죄가 훨씬 더 무서운 것입니다.

바울도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범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알고 나서는 범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빌립보서 2장 12절에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고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슈퍼맨이라는 영화 보시면, 대사중에 이런 멘트가 있습니다. "With Great Power, Comes Great Responsibilities" 큰 힘과 함께, 큰 책임도 따라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로서 특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거기에는 자녀로서의 막대한 책임이 따릅니다.

천국에 가는 길은 '예수 믿으면 갑니다' 그러나 이것은 절에서 염불하듯이, 무당들이 주문외우듯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진리 안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야 하는 나의 행위가 있어야합니다. 그래서 그 길은 좁은 문 좁은 문입니다. 예수 믿었다고 해서 천국에 입성한 것은 아닙니다. Already, not yet. 이미 구원 받았지만, 아직은 진행형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꿈의 성도 여러분 주의 자녀로서 하루 승리하는 삶을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