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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의 창고/ 비전나리의 설교

수요예배설교 : 예수님의 사역 방법 – 막 1:14-31

by Peartree 2012. 12. 24.

지난주에 우리는 세례요한의 사역에 관하여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세례요한의 사명은 '주의 길을 예비하는 것' 이었습니다. 즉 '복음의 씨가 사람들의 마음 밭에 뿌려지기 직전에 굳어진 그들의 마음을 갈아 엎어서 옥토로 만드는 역할' 이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이땅에 파송받으면서 각자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 사명을 100% 완수하고 하나님 앞에 가는 사람은 아마도 지구상에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 만큼은 그의 사명을 거의 99.9% 완수한 사람일 것입니다. 지난주 7절 보시면,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하며, 겸손한 모습으로 예수님의 위대한 등장을 예고 하는 모습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9절 보시면, 예수님께 세례를 베푸신 다음에, 세례 요한은 무대 뒤로 소리없이 사라집니다. 그 후로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사역에 방해가 될까봐, 예수님 앞에 전혀 나타나지 않습니다. 사람의 생각으론 얼마나 아쉽겠습니까?

 

지금까지 열심히 목회를 해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도 주고, 이제 성도들도 많이 늘어났고, 어느 정도 목회에 재미가 붙으려고 하니까,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께 바통을 넘겨 드려야 하는 사명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아쉬움이 남겠죠? 그러나 세례요한은 그의 목회 전부를 주님께 넘겨 드리곤, 요한복음 3장 30에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이 위대한 신앙의 고백을 남기게 됩니다.

그런 다음에, 마가복음 기자는 세례요한에 대해서 아무 언급도 하지 않고 있다가, 6장에서야 비로소 세례요한이 죽음을 당할 때, 그를 소개하고 더 이상 세례요한은 마가복음에서는 나오지 않습니다.

 

이것이 사명인 것입니다.

며칠전에 '팔복2' 라는 제목의 기독교 선교 영상을 보았습니다. 카자흐스탄의 선교사 부부의 이야기 입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선교하면서, 많을 열매를 맺었고, 집도 장만하고 선교에 재미를 붙여가고 있었습니다. 사모님은 생전 처음으로 갖는 집이라서 벽지도 새로하고, 커튼도 새로하고, 그곳에 오래 살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카자흐스탄 괴한들에게 의해 살해 당한 것입니다. 순교의 피가 그곳에 뿌려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모님은 그것으로 그분의 사명은 다 한것입니다. 사명을 이런 것입니다.

 

창세기에 보시면, 야곱의 11번째 아들 요셉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요셉은 애굽에서 그의 사명을 다하고, 그이 뼈는 애굽땅에 묻히게 됩니다. 얼마나 가나안 땅에 묻히고 싶었으면, 창세기 50장 25절 보시면, "너희는 여기세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자손들에게 출애굽 할 때 자신의 해골이라도 꼭 가나안 땅에 묻어 달라고 약속을 받는 장면입니다.

 

이토록 성경이 말하는 사명은 사명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보십시요. 사명을 다한 다음에, 제자들은 세례요한 처럼 형장의 이슬로, 사자의 밥으로, 십자가 형에, 화형에, 목베임을 다하면서, 사라졌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도 사명을 100% 완수한 다음에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제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신 다음, 40일 금식하시며 마귀의 시험을 통과하고, 본격적으로 사역의 첫걸음을 시작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어떻게 사역을 시작하셨는지, 본문에서 몇 가지를 찾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첫째로, 두려움 없이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14절 보시면, 예수님께서 언제 사역을 시작하셨습니까? "요한이 잡힌 후에" 시작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이 왜 잡히게 되었는지 우리는 지난주에 살펴 보았습니다. 기억나십니까? 갈릴리의 분봉왕, 헤롯 안디바의 죄를 지적하고 책망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동생의 아내를 자신의 아내로 취한 그 죄를 지적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시면 세례요한을 누가 죽입니까? 이 여자가 죽입니다. 오히려 헤롯은 세례요한의 말을 달게 받았습니다. 이것으로 보아 이 여인은 억지로 시집온 것이 아니고, 본 남편을 버리고 헤롯왕에게 시집온 것입니다. 이것을 세례요한은 죄라고 지적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여인에게 살해당한 것입니다.

 

시기적으로 참 안 좋은 상황입니다. 상식적으로 봐도, 예수님께서 택한 사역의 시점은 별로 현명하지 않은 선택 같지 않습니까? 저 같으면 이런 때는 잠시 숨거나, 좀 비겁해 보이면, 기도원에 가서 골방기도 하면서 위험한 분위기가 지나가기를 기다렸을 것 같습니다. 자칫 잘 못 나섰다가는 요한과 같은 신세를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요.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잡힌 후에" 비로서 사역을 시작하십니다.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왜 하필이면 이런 위험한 시기에 등장하셨을까요? 그리고 당시에 헤로디아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회개' 를 촉구하고 있었을 까요? 두려움도 없이 말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사역이든, 세상 사업이든, 분명히 일을 시작해야 하는 적기가 있는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복음을 전해야 하는 적기를 '세례요한이 잡힌 후'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나의 형편에 맞추지 않고, 복음의 형편에 맞춘겁니다.

 

요즘 한국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교회가 개척이 되면, 2년 이후에 살아남는 확률은 10%로도 채 안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10교회가 개척이 되면, 그중 1교회만이 2년을 넘긴다는 것입니다. 미국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이제 우리 꿈의 교회도 몇 달만 지나면, 10교회중 1교회 살아남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통계를 보란 듯이 뛰어 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은 개척하면 힘들다. 지금은 적기가 아니다. 그렇다고, 꿈의교회가 세워지는 것을 미뤘어야만 했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통계로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세례요한이 잡힌 후에' 잠시, 어디에 숨어 지냈어야 맞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남들이 위험하다, 안된다, 그럴지라도 저 영혼 깊은데서 성령님이 지금이다 말씀하시면 일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일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말씀처럼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들' 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사람들이 그들의 생각으로, 그들의 통계를 가지고 아무리 말겨도, 그 말에 귀 기울이지 않고, 주님의 말에 주파수를 맞추는 우리 꿈의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1. 두번째는, 예수님 사역은 부지런함으로 시작하셨습니다.

 

본문 35절 보시면,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예수님께서 일찍 일어나신 것입니다.

 

옛 말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좋은 먹이를 얻는다." "늦잠 자는 부자 없다." 그리고 "아침 잠은 인생 최대의 소비이다"라고 카네기가 말했습니다.


일본 전국시대에 패권을 잡은 오다 노부나가 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말을 타고 16km를 달려가면서 전략을 세우고, 돌아올 때에는 결단을 내렸다고 합니다. 평범한 사람은 하루를 아침, 점심, 저녁 3등분으로 살지만 비범한 사람, 탁월한 사람은 이른 아침, 아침, 점심, 저녁 하루를 4등분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성공한 사람들은 두뇌회전이 왕성하며 집중력이나 판단력이 3배나 되는 새벽 6시 전후시간을 잘 활용하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성경 속의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 역시 일찍 일어난 사람들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던 날 아침 어떤 일을 하였는지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여호와 앞에 서 있던 곳에 이르러"(창 19:27)

그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 이삭을 모리아산에 제사하러 가던 그날,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마음 착잡하던 그날에도 "아침 일찍이 일어났다고 말합니다(창 22:3).

이스라엘의 탁월한 영도자 모세도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는 부지런한 사람이었습니다.

가나안 정복의 영웅 여호수아가 모세의 뒤를 이은 지도자가 되었던 것도 그의 성실함과 부지런함에 있었습니다. 성경 여러 곳에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 일어났다고 증거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제일 먼저 만난 사람이 누구이지요?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언제 무덤에 찾아갔지요? 새벽에 갔습니다.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무덤을 찾아간 막달라 마리아, 그녀가 바로 새벽형 사람입니다. 누가복음 24장 1절에 막달라 마리아 외에도 다른 여인들이 그 새벽에 그 예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갔다고 기록합니다: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그들 모두가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축복을 누린 새벽형 사람들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을 보십시오. 마가복음 1장 35절에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예수님께서 언제 일어나셨다고요?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새벽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셨습니다. 그리고 한적한 곳으로 가셨습니다. 거기서 무엇을 하셨습니까? 기도하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새벽 미명에 기도하신 그 전날에 무슨 일을 하셨는지 아십니까? 마가복음 1장 21절 이하에 보면 그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회당에 들어가 하루 종일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귀신들인 사람의 귀신도 쫓아 내었습니다.

29절 보시면, "회당에서 나와" 시몬의 집에 심방도 하셨고, 열병으로 누워있는 시몬이 장모를 고쳐 주셨습니다.

32절 보시면, "저물어 해질 때에" 또 무엇을 하셨습니까? 모든 병자와 귀신들자, 각색 병든자들을 고친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하루에 되어진 일들입니다. 얼마나 피곤하시겠습니까? 피곤에 지치셨을 것입니다. 우리 같으면 그 다음날은 좀 푹 쉴텐데, 예수님께서는 다음날 아침이른 새벽에 한적한 곳으로 기도하려 가셨다는 것입니다. 기도하신 다음에 또 무엇는지 아십니까? 38절 보시면,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 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39절 "온 갈릴리에 다니며, 전도하시며, 귀신을 쫓아" 내시는 예수님 이셨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는데는 두 가지 스타일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충동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다른 한 사람은 계획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충동적인 사람, 그 사람은 감정에 이끌리기 쉽습니다. 계획이 없습니다. 즉흥적으로 살아갑니다. 급진적으로 무엇인가 속단합니다.

그러나 계획하고 인생을 사는 사람, 그는 다릅니다. 그들은 주께서 나를 부르신 목적을 생각하고 소명을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사명을 따라 살아갑니다. 그러기에 계획을 세웁니다. 가치관을 따라서 무엇을 먼저 해야 될지, 나중에 해야 될지 기도 가운데 결정합니다.

 

우리 예수님은 사명에 따라 계획을 세우고 사역을 완성하신 분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두려움 없이 사역 하셨고, 부지런함으로 사역하셨습니다. 세례요한도 두려움 없이 사명을 위해 살다 갔습니다.

 

구세군의 창설자 윌리엄 부스 대장이 은퇴하던 날. 4천 명이 넘는 런던 시민이 그의 은퇴식을 보기 위해 몰려들었습니다. 당시 그의 시력은 사물을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약화되어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부축을 받으면서 강단에 올라선 그는 약한 시력으로 말없이 군중을 바라보았습니다. "메시지를 전할 수 있겠습니까?" 옆에 섰던 사람이 염려하는 어조로 묻자 이 "노인대장"은 하늘을 향해 팔을 벌리며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아직도 저 군중 너머에서 내가 할 일이 있어. 주님께서 맡겨주신 일이 많거든. 이제부터 일할 때야"

 

우리 모두는 실수도 이 땅에 보내진 분들이 아닙니다. 하늘의 귀한 사명을 받고 파송받은 분들입니다. 나의 사명이 무엇인가? 주님께 질문해 보시고, 그 사명을 찾아 성실하게 감당하시다가 주님 맞이 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