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분에 걸 맞는 삶
에베소서 4:17-24
동물들 중에 가장 귀소본능이 강한, 그러니까 자기가 태어난 고향으로 가려고 가장 많이 애를 쓰는 동물이 연어라고 합니다.
연어는 자기가 부화된 자리에서 넓은 바다로 나가 3년이 되면 큰 물고기로 자랍니다. 그리고는 다시 새끼를 낳으러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돌아오는데 돌아오는 길은 쉽지 않다고 합니다. 돌아오는 길이 참으로 험난한데 세찬 폭포의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가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떨어지는 물보다 더 빨리 올라간다는 얘기입니다. 또 연어가 올라가는 길을 어부들이 지키고 있다가 연어를 낚아갑니다. 또 연어를 잡아먹는 수 많은 동물들이 있습니다. 곰은 연어를 얼마나 잘 사냥하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고향으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거의 다가 죽는 다고 합니다. 그래서 결국 고향으로 돌아오는 연어는 100마리중에 2마리 정도만 간신히 고향으로 돌아와 알을 낳고 죽는 다고 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귀소본능’ 또는 ‘회귀본능’ 이라고 합니다.
누가 가르쳐 준 것이 아니라 본능에 의해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동물들만 이런 ‘귀소본능’ 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사람에게도 귀소본능이 있습니다. 사람들도 고향을 그리워합니다. 그래서 ‘언제가는 죽기 전에 고향에 한번 가보고 싶다’ 라는 말을 하곤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데 있어서도 귀소본능이 있는 거 아십니까? 다윗이 시편에 이런 말을 했어요.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나이다” …
그래서 우리의 영원한 본향은 저 천국이지만, 이 죄악 세상이 우리의 고향이기도 한 것입니다. ‘죄악 중에 출생하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디모데후서에서 사도바울과 함께 열심히 사역하던 ‘데마’ 라는 사람도 이 죄악세상이 너무도 그리워 바울 곁을 떠났는데, 바울이 이때 이렇게 말합니다. 디모데후서 4:10절을 보시면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다” 고 말합니다. 아마도 ‘데마’의 고향은 ‘데살로니가’ 란 도시였나 봅니다.
데마는 사도 바울에게서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사도바울과 함께 전도를 하러 다니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위대한 사도바울과 함께 있던 사람도 주님을 알기 이전의 죄악 세상이 너무도 그리워, 복음이건, 교회건 다 팽개치고 고향 앞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을 보면, 역시 사람들도 죄악 세상으로 돌아가고픈 ‘귀소본능’ 이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제 아무리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크리스천이라 할지라도 마음을 예수님께 집중하고 철썩 같이 붙어 있지 않으면 언제든 과거의 모습으로 돌아가려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매우 간곡하게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한 가지를 당부하고 있습니다. 본문 에베소서 4: 17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바울이 지금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권고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너희는 세상 사람들이 하는 것 같이 그 길을 따라 살지 말라’ 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사역하던 때나, 지금이나 교회는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도들이 세상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귀소본능’ 만 컨트롤 할 수 있다면 교회는 자리가 차고 넘칠 것입니다.
예수님 믿고, ‘죄악세상’ 은 생각도 하지 않고, 십자가의 좁은 길만 가는 성도들만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교회는 날로 성장 하겠죠. 목회는 신나고 즐겁겠죠.
원하옵기는 우리 꿈의교회에는 세상으로 가고자 하는 ‘귀소본능’ 이 있는 성도들이 하나도 없기를 소망합니다. 데마와 같은 성도 하나도 없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그래서 오늘은 예수 믿기 전의 삶과 예수님 믿은 후의 삶은 어떤지 비교해 보며, 어떻게 하면 우리가 Real Christian 으로 살아 갈 수 있는지 그 방법을 한번 찾아 보기를 원합니다.
1) 첫째로, 예수 믿기 전의 삶은, 허망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17절을 보시면, “이방인이 그 마음이 허망한 것 같이”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허망의 반대말은 소망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소망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은 소망이 없습니다. 그 소망이 어떤 소망입니까? 하늘나라의 소망입니다. 고난 가운데 살지만, 먼 훗날에 주님 품에 안겨 영원토록 천국에서 살 소망이 진짜 소망인 것입니다.
‘허망’ 이란 단어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니까, ‘어이없고 허무함’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의 삶의 종말은 이렇게 어이없고 허무하게 끝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 사도 바울이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의 모습을 이렇게 허망하다는 표현까지 써가며 기록하고 있습니까?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다고 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신분에 걸맞지 않은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기록한 것입니다. ‘너희들의 신분이 무엇이냐? 너희들은 하나님의 자녀다. 그렇다면 제발 하나님의 자녀 된 신분에 맞게 삶을 살라’ 고 성경은 우리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한국에는 새로운 대통령이 뽑혔습니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새 대통령이 당선되면, 새로운 장관들과 함께, 새 정부를 이끌어 나갑니다. 그래서 대통령 취임하기 전에 새 장관들을 다 임명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번에 한국에는 장관으로 임명할 사람이 없는 거예요. 장관 하기에 앞에 그 사람이 전에 어떻게 살았는지, ‘청문회’ 라는 것을 합니다. 이 사람이 재산을 어떻게 모았는지, 혹시 돈이나 그가 가진 권력을 써서 자녀들을 군대에 안 보내지는 않았는지, 부동산 투기를 하지 않았는지, 세금을 제대로 냈는지…… 그런데 거기에 안 걸리는 후보자가 한 명도 없습니다. 깨끗한 후보자가 하나도 없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까지도 장관들을 다 세우지 못했습니다.
이 장관 후보자 중에 크리스찬들이 많이 있다는 것 아십니까?
예전에는 뉴스에서 탈세를 했다든지, 공금을 횡령했다든지, 힘없고 연약한 사람을 억눌러 자신의 배를 채웠다든지 하는 사람들이 등장하면, 그래도 우리 마음에 한 가닥 믿음이 있었습니다. ‘저 사람은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는 넌 크리스천일 거야’
그러나 지금 시대는요, 그러한 일말의 기대가 없어요. 아니,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세상에서 크게 지탄을 받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이 혹시 교회 다니는 사람은 아닌지, 혹시 그 사람이 교회의 장로 집사는 아닌지 오히려 걱정스러운 것이 지금의 현실입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허망한데 마음 두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9절에 보시면 그런 사람들은 “감각 없는 사람들” 이라고 말씀합니다. 감각 없는 사람들. 아픈 곳을 찔러도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강단에서 회개를 외쳐도, 회개는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용서를 외쳐도 용서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나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도바울은 과거의 삶으로 다시 돌아가려고 하는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그렇게 귀가 따갑게 ‘과거로 돌아가지 말라’ 고 말씀을 드려도, 그들을 듣는 감각이 없었고, 보는 감각이 없었고, 깨닫는 감각이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들이 지금까지 입고 있던 옷은 이처럼 감각을 느끼지 못하게 합니다.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무엇이 죄인지, 무엇이 부끄러운 일인지 모르게 합니다. 그 옛 누더기 옷을 걸치고 있으면 말이죠.
죄를 짓고, 부끄러운 일을 하여도 화인 맞은 양심이라 죄를 깨닫지도, 회개하지
도, 새롭게 살지도 않는 것입니다.
감각이 없어서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
야 하는지를 모른 채 자기 마음대로 살아갑니다.
미국의 죠지 워싱턴이 영국으로부터 나라를 세운 뒤에 나라 이름을 무엇으로 할
까를 생각하는데 소문에 동방에 조선이라는 나라가 있는데 거기에 세종대왕이
나라 말을 만든 훌륭한 임금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죠지 워싱턴은 조선으로 사신을 보내서, 정중하게 나라 이름을 지어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세종 대왕은 한참을 생각하다가 “아무렇게나” 지으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죠지 워싱턴이 보낸 사신은 임금의 말을 그대로 잘 받아 적었습니다.
그리고는 죠지 워싱턴에게로 돌아 와서는 세종 대왕이 말하길 ‘아무렇게’ 로 지으라는 데요. 말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무렇게’ 가 ‘아메리카’ 로 되었다고 하는 믿거나 말거나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이렇게 아무렇게나 살아서야 안되요.
비오는 날 깨끗한 옷을 입고 외출을 하였을 때에 흙탕물이 튀지 않도록 조심하며
걸음을 옮깁니다. 그러나 흙탕물이 많이 튀게 되면 조심스럽게 걸어가는 것을 포기
합니다. 그리고는 아무렇게나 걷습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들은7절의 말씀대로 ‘방탕’ 한 삶을 벗어 버리고 깨끗하고 정결한 새 옷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2) 그럼 두 번째로 예수 믿은 후의 삶은 어떠해야 합니까? 본문 22절에 옛 사람을 벗어 버린 사람들. 이 사람들이 예수 믿은 후의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입는다는 말과 벗는다는 말은 옷과 관련된 말입니다. 사도바울이 왜 이렇게 표현 했냐면, 그 당시에는 직업과 신분에 맞는 옷을 항상 입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제사장들은 항상 제사장 의복을 입었습니다. 군인은 항상 군복을 입었습니다.
옷이 사람의 신분을 나타냈습니다.
지금도 비슷한데, 하얀 드레스를 입고 있는 사람은 행복에 대한 부푼 꿈을 꾸며 결혼하는 신부입니다. 뒤가 제비꼬리로 된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훌륭한 음악을 들려줄 지휘자입니다. 무더운 여름인데도 넥타이를 매고 있는 사람은 외판원 아니면 목사입니다.
죄수는 어떻겠습니다. 죄수는 지금도 죄수 복을 입어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에 죄수가 그 죄의 값을 다 지불하고 자유의 몸이 되면 그 다음엔 어떻게 합니까? 옷부터 갈아 입겠죠. 새 옷으로 갈아 입을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예전에 하나님을 몰랐을 때는, 누더기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누더기 옷을 입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기에, 그 신분에 걸 맞게 거룩한 옷을 입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썩어져 가는 옛 옷을 벗어 버리지 못하고, 계속해서 그 옷을 고집하고 있다면, 연어처럼 허망 된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옛 썩어져 가는 그 옷을 왜 벗어 버려야 합니까? 우리에게는 그 누더기 옷이 어울리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거룩한 옷이 훨씬 더 아름답고 잘 맞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방탕하게 살아 보세요. 어울립니까? 어울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 있습니다.
여러분 제가, 술집에 앉아서 와인이나 마시고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어울리겠습니까?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의 신분에 걸 맞는 삶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허망한 사람들과 어울리며 하나님 기뻐하지 않는 모습으로 산다고 가정해 보세요. 어울릴 것 같습니까? 어울리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나, 저나 거룩한 삶을 살아야 그 삶이 어울려요. 또 그렇게 살아야 세상 사람들이 우리들을 함부로 업신 여기지 않습니다.
허망이란 빈 소망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게도 잡고 싶고, 얻고 싶어서 열심을 내어 살아 보았지만 결국에는 손에 움켜쥔 것 하나 없이 빈손을 바라보는 것 그것이 허망입니다. 쾌락을 좇아 한 평생 살았지만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부질없는 짓이었다고 후회하는 것, 그것이 허망인 것입니다.
성경 66권 중에 ‘허망’ 이란 단어를 가장 잘 설명해 주는 책이 ‘전도서’ 입니다. 전도서는 한 평생 부귀와 영화와 명예 권력 쾌락을 다 누려 보았던 솔로몬 왕이 그의 인생 말년에, 하나님 앞에 가지 전에, 인생을 회고하면서 쓴 책입니다.
뭐라고 썼을 것 같습니다. ‘아! 이렇게 부귀 영화 쾌락을 누리고 살아 보니까 인생은 정말 멋진 것이다’ 라고 썼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의 고백은 이것 이었습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한마디로 ‘허망’ 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알기 전의, 옛 누더기 옷 그대로 걸치고, 내 맘대로 나 하고 싶은 대로 살면 그 마지막의 결국은 ‘허망’ 이라는 단어로 끝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옛 습관, 옛 성품, 옛 나의 모습을 십자가에 못 박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거룩한 옷을 입고, 하나님 자녀의 신분에 걸 맞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연어는 자기가 태어난 고향을 죽더라도 돌아가려고 합니다. 왜 그렇게 돌아가려고 하는지.
그리스도인들도 그렇습니다. 하나님 알기 전, 옛 누더기 생활로 다시 돌아가려고 하는 크리스천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그런 삶이 어울리지 않습니다. 우리에겐 거룩한 삶이 어울립니다.
우리가 정말 돌아가야 할 본향은 죄악세상이 아니라, 저 천국입니다. 그 나라가 우리의 영원한 본향입니다.
그 나라 향하여 우리는 연어처럼 죽더라도 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 땅에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원하옵기는 그리스도인의 신분에 걸 맞는 삶을 살아, 천국을 넉넉히 소유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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