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의 생각과 육신의 생각
로마서 8:5-17
지난 시간에는 바울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라고 하며, 우리 안에 두 마음이 싸우고 있는 것에 대한 괴로운 심정을 토로한 것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선을 행하고 싶지만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라고 하며 여전히 악이 함께 있는 것을 깨닫고는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건져 주십시요’ 라고 하며 외쳤습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예수 안에 있으면 죄가 드러나게 되어 있을 것을 알고는 더 기뻐하게 되죠, 그리고는 감사하는 바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특기는 죄를 밖으로 드러내게 하는 특기가 있으세요.
그래서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죄가 죄인지 모르고 있다가 사망에 잡혀가는 것이고, 예수 믿는 사람들은 죄가 죄인지 분명히 드러나기 때문에 그 죄 때문에 괴로워합니다. 그리고 죄를 짓지 않으려고 몸부림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예수 안에 있는 것이 오히려 감사하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오늘은 이렇게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사람의 생각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사람을 지배하는 것이 생각입니다. 가룟유다를 보시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3:2절을 보시면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말씀합니다. 그러자 그 생각대로 유다는 바로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이렇게 사람은 생각대로 움직입니다. 그래서 생각이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 5절을 보시면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한다” 고 말씀합니다.
6절에도 보시면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지난 시간에 말씀 드렸듯이, 우리 속에 이렇게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좀 격한 말로 하면 서로 싸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은 사단과 성령의 영적 전투의 현장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말렉과 싸울때에 모세의 손이 올라가면 이스라엘 군사들이 이겼고 모세의 손이 내려가면 아말렉이 이겼습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무엇을 말해주냐면, 전쟁의 승패가 앞에 나가 싸우는 전사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전투의 승패는 모세의 손에 달려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영적 전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을 향하여 손을 들고 있을 때에 영적 승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피곤하여 그 손을 내려 버리면 우리의 생각은 금방 사단에게 굴복하게 됩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2:5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 은 곧 예수님을 생각하며 사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생각으로 집중하며 살 때, 6절에 보시면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 이라고 말씀합니다.
반대로 육신의 생각은 거침없이 ‘사망’ 이라고 딱 잘라 말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어떤 생각을 하며 살기를 원하십니까? 물어보나 마나 영의 생각, 예수님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장애인 판사 한 분이 있었습니다.
이 분은 어렸을 때 너무 가난했습니다. 아버지가 술만 마시면 도박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아버지가 논 팔고 밭 팔고 모든 재산을 없애는 사이에, 그 가족은 어머니의 삯바느질로 근근히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가 술에 취해 들어와서는 아내에게 돈을 내놓으라고 행패를 부렸습니다. 없다고 하자 홧김에 잠을 자고 있는 아들을 들어서 마당에 던져 버렸습니다. 그로 인해 이 아들은 척추가 어긋나고 다리가 부러져서 장애자가 되었습니다. 몸에 장애를 입으니까 친구들이 놀아주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골방에 들어가서 공부만을 했습니다. 사법고시에 합격하여 판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장애인 아들이 아버지를 모시고 관광을 다닙니다. 아버지에게 정성을 다해 효도를 하는 것입니다. 온 마을 사람들은 그가 판사가 된 것보다 지극한 효성에 놀랍니다.
그러나 그 판사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내가 판사가 된 것이 다 아버지 덕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계셔서 아버지를 만나게 하셨고 비록 장애인이 되었지만 그렇게 됨으로 더 열심히 공부할 수 있었고 판사가 되었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생각이 지배하면 삶이 달라집니다.
악한 생각이 지배하면 악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선한 생각이 지배하면 선한 사람이 되는 거예요.
육신의 생각에 사로잡히면 사망이고, 영의 생각에 사로잡히면 생명과 평안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영의 생각으로 살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 말씀에서 찾아보며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먼저 영의 생각으로 살려면, 13절에 바울은 이런 처방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그러니까, 몸의 행실을 죽여야, 영의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육신이 요구하는 것을 다 들어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육신의 생각이 하고 싶은 대로 끌려가면 안 된다는 거예요.
오늘 본문은 육신대로 살면 안 된다는 정도가 아니라, 반드시 죽는 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분명히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만이 영혼이 살길 인 것입니다. 14절을 보세요.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그래서 육신의 생각을 거부하고, 성령님께서 시키는 대로 살아야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오늘 많은 크리스찬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교회만 다니면 하나님의 자녀라고 단언합니다. 아니면 대충 신앙생활해도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셔서 나를 자녀 삼아 주신다고 말합니다. 그것 우리의 바램입니다.
분명 성경은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 라고 잘라 말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 아들이시죠.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어떻게 사셨습니까? 영으로 인도함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누군들 고난을 좋아하겠습니까? 누가 그 고난의 십자가를 질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십자가 지고 골고다로 향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영에 순종하는 길이었거든요.
육신의 생각은 그 무서운 십자가 지지 말라고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육신의 생각대로 하지 하지 않고 영의 생각에 순종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가면서도, 어떤 일을 할 때 항상 이것이 육신의 생각인지 영의 생각인지 물어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육신의 생각 같으면 멈추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마디 한마디 말 할때도요. 육신의 생각으로 그냥 내 뱉어 버리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그 말에 상처를 받는 사람이 생깁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도 한마디 한마디 할 때, 이 말이 영에 속한 말인지 한번 되새겨 본 다음에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에는 ‘생명과 평안’ 이 있습니다.
헨드릭슨 목사님의 로마서 주석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1834년 네델 란드에서 실제로 있었던 사건인데, 당시 네델란드에서는 개신교회에 대한 큰 핍박이 일어나고 있던 때입니다. 그러던 그 어느 날 오후 늦게 한 목사님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성도가 몹시 아파서 목사님의 심방을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밤은 이미 어두워졌고 그 곳을 가려면 숲을 통과해야만 했습니다.
또한 그 숲속은 강도가 숨어서 사람들을 습격하기 좋은 곳이었기에 두려운 곳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목사님은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날이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그 밤에 심방을 떠났습니다. 다행히 아무 일 없이 그 숲을 통과해서 아팠던 교우는 큰 힘과 위로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다시 그 숲을 통과해서 돌아오고 그리고 몇 해가 지났습니다. 하루는 이제 막 새 신자가 된 두 남자성도가 목사님을 찾아와서 조심스럽게 묻습니다. “목사님, 수 년전에 목사님께서 심방을 하러 깊은 밤에 숲을 통과해서 가신 적이 있지요?”
“네, 그렇습니 다”
“그런데 그 때 목사님 주위 양쪽에서 아주 빛난 옷으로 무장하고 함께 가 던 분들은 누굽니까?” 묻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아니, 저는 혼자 갔는데요”
“아니에요. 저희들이 똑똑히 보았습니다. 사실 그 때 우리는 목사님을 헤치려는 강도였는데 그 광경을 보고 피하였습니다. 지나고 보니 그 때 목사님을 죽이지 않기를 잘 했어요. 이렇게 목사님을 통해 구원을 받게 되었으니까요”, 라고 하더랍니다.
이렇게 영의 생각에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영의 생각에 순종하는 것은 쉬운 일을 아닙니다. 때로는 손해를 볼 때도 있고, 때로는 억울함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이것이 고난인 것입니다.
오늘 17절을 보세요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고난 없는 영광은 없습니다. 육신의 생각을 죽이지 않고는 영의 생각은 없습니다. 이것이 고난이죠.
그러나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 이라고 말씀합니다.
즉 다시 말하면 영의 생각은 ‘구원과 마음의 평강’ 인 것입니다.
오늘 사도바울은 속에서 두 마음이 싸우는 것을 깨닫고는, 이 두 마음 중에 육신의 생각을 죽여야 하고, 영의 생각으로 살아야, 구원을 받는 다고 말씀합니다. 영의 생각으로 사는 사람이야 말로,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씀합니다.
원하옵기는, 우리 귀한 성도님 모두가 영의 사람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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