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로마서 7:14-8:2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뒤에 신앙 생활을 하면서 겪는 고민을 털어 놓고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고 믿음의 길을 걸으면 죄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깨끗한 삶을 살 것 같지만 여전히 우리 속에 죄악 된 근성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오늘 바울의 고백을 통해서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을 직접 만나고, 사도 중에 사도라고 하는 대 사도 바울이 죄의 문제로 인하여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우리 속에 있는 죄악의 근성 때문에 너무 괴로워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2000년 전에 이미 사도바울이 고민 고민해서 해답을 오늘 본문에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바울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을 미리 고민해서, 해답을 주고 있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우리는 보통, 예수님 믿으면 바로 성자가 되는 것 같이 생각을 합니다. 세상 사람들도 우리를 볼 때, 예수 믿으면 뭔가 달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것들이 왜 저래?” 하는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거는 기대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예수님을 믿어도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21절을 보시면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말씀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 후로는 선한 일을 행하기 원하지요. 그러나 내 안에 또 다른 악한 근성이 도사리고 있어서 선과 악, 이렇게 두 마음이 싸우고 있다는 말씀이예요.
23절에 사도바울은 이 선과 악을 ‘마음의 법과 죄의 법’ 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이 두 법이 싸우는데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말씀하죠.
그러니까, 죄의 법이 더 강력해서, 선한 일을 하려고 하는 내 마음의 법이 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죄의 법이 이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24절에 “오호라 나는 곤곤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하며 탄식을 합니다. 내 속에 있는 죄성 때문에 죽게 생겼다는 것입니다. 거룩하고 깨끗하게 살고 싶은데, 내 속에서 또 다른 죄의 법이 나를 가만 두지 않는 다는 고백입니다.
여러분들도 이런 고민 해 보신적 있으시죠?
그런데요. 사도 바울만 이런 고민한 것이 아닙니다. 신이 아닌 이상 모든 인간의 내면 속에는 죄악 된 근성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웅크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언제 튀어 나올지 모릅니다. ‘아! 저 사람은 정말 신실하고 마음씨가 천사같아’ 라고 하는 사람도 건드리지 않아서 그렇지, 건드리면 언제든 속에 있는 것이 욱하고 튀어 나올지 모릅니다. 이것이 인간인 것입니다.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남들보다 조금 신실하게 깨끗하게 살려고 하는 것 뿐이지, 자존심 건드리고, 약점을 건드리면 언제 폭발할 지 모릅니다.
모세를 보세요.
그는 40일 동안 밤낮 하나님과 같이 지낸 사람입니다. 모세만큼 40일 금식기도를 경험한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이 정도 되면 뭔가가 달라져야 되는데 모세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얼굴에 영광의 광채가 나서 수건으로 얼굴을 가릴 정도였는데도, 십계명의 두 돌판을 내동댕이 치고 말았습니다. 산에서 내려오는데 이스라엘백성들이 금송아지를 하나님이라고 섬기고 있었죠. 이때 모세는 욱하는 혈기가 끌어올라 그만 하나님이 주신 십계명의 돌판을 내동댕이쳐 버렸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40일 금식해도 변화가 되지 않습니다. 잠시 속에 있는 악의 근성이 잠자고 있을 뿐 이예요. 깨우면 언제든지 밖으로 드러나게 된다니까요.
엘리야를 보십시오.
몇 마디의 기도로 하늘에서 불이 내려왔습니다. 850대 1로, 바알의 선지가와 아세라 선지자들과의 싸움에서 당당히 승리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너를 죽이겠다’ 는 이세벨의 말 한마디에 줄행랑을 치면서 로뎀나무 아래서 나를 죽여달라고 하며 하나님께 투정을 부렸었습니다.
이렇게 인간은 언제든 쓰러질 수 있고, 넘어질 수 있고, 죄를 지을 수도 있음을 받아 들여야 합니다. 그렇다고 인간이 이런 연약한 존재들이기에 죄를 지어도 괜찮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속에는 죄의 법이 도사리고 있어서, 두 마음이 싸우는 것을 가지고 괴로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왜 괴로워하고 있었냐면, 예수님을 믿고 거룩하게 살려고 하면, 죄의 법이 자꾸 방해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자꾸 넘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괴롭다고 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도바울이 전도를 하는데, 불신자들이 사도 바울을 얼마나 무시하고, 업신 여겼겠습니까? 인물이나 좋아야지요. 키는 작도, 대머리에, 눈은 잘 보이지도 않고, 결혼도 하지 않고, 늙은 총각이 복음 전하는데, 얼마나 애를 먹었겠습니까?
그래서 아마도 사도바울은 이 전도자의 길을 포기하려는 생각을 수도 없이 먹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럴 때마다, 사도 바울의 속에서는 두 마음이 싸우고 있던 거예요.
한쪽에서 “그래, 이만 하면 됐어 이제는 선교하는 일 그만두고, 편하게 살아도 돼!” 라는 육신의 법과 한쪽에서는 “아니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죽더라도 이 길을 가야돼, 예수님께서는 벌레 같은 날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기도 하셨는데.” 하며, 육신의 법과 하나님의 법이 공존하며 싸우고 있었을 거예요.
그럴 때 마다, 사도바울은 이 육신의 법, 이 사망의 법이 좀 나를 괴롭히지 않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했을 거예요. 그래서 이 육신의 법을 이겨 물리쳐 왔습니다. 하지만 물리치면, 잠잠해졌다고 또 살아나고, 잠잠해졌다가 또 살아나는 이 육신의 법을 볼 때, 완전히 물리치지 못하는 자신이 너무 한심한 것입니다.
그래서 고백한 것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 고백은 사실 하나님 앞에서 죄를 이기고 싶어하는 자의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내다보며 하는 고백입니다.
사실 이런 탄식을 가진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은혜를 사모하는 자예요.
이런 고백조차 하지 않는 사람은, 죽은 사람입니다. 죽은 사람은 속에서 두 마음이 싸우질 않습니다. 완전히 육신의 법과 사망의 법이 그 사람을 지배해서, 지옥으로 끌려가는 것입니다.
이런 탄식 속에서 바울은 도움의 손길로 예수님을 바라보게 되죠. 그러는 순간 힘이 생겨났습니다. 내 속을 보니 소망이 없었고, 절망뿐이었는데 예수님을 보니 소망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 고난 중에 소망의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25절에 사도바울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바울이 이 사실을 깨닫기 위해서 얼마나 죄와 싸우며 몸부림 쳤는지 몰라요.
처음엔 속에서 두 마음이 싸우는 것 보고는, 너무나 괴로웠었습니다. 혹시 내 안에 사단이 틈타서 나를 지배하고 있는 건 아닌지, 내가 왜 그럴까?
왜 자구 교회에 가고 싶지 않지?
왜 자구 사람들이 미워지지? 왜 교회에 헌금하는 것이 아깝지? 혹시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것은 아닐까? 이러다가 정말 지옥에 떨어지는 것은 아닐까? 처음엔 이런 육신의 생각이 들면 괴로웠습니다.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이것이 살아 있다는 증거인 것을 알게 됩니다. 죽은 물고기는 꿈쩍하지 않고 떠내려 갑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 물고기는 물살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죽은 사람은 죄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 사람은 죄에 대해서 고민하고, 괴로워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8:1절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고 탄성을 지르죠. ‘내가 예수 안에 있기 때문에 죄가 견딜 수 없으니까, 속에 있는 죄의 근성이 괴로워 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발견하죠.
그래서, 우리 안에 두 마음이 싸우더라도 예수 안에서는 죄가 될 수 없습니다. 두 마음이 싸우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런데 육신의 법에 지배를 당해서 끌려 다니면 그때부터는 죄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육신의 법과 사망의 법에 끌려 다니지 않으려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2절에,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생명의 성령의 법에 지배를 받고 사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우리의 보호자가 되시고, 우리의 가이드 되어 주십니다.
성령님의 말씀에 기를 기울이며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시면 승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두 마음이 싸울 때가 많이 있으시죠? 그럴 때 마다, 죄의 법, 육신의 법, 사망의 법에 사로잡혀 가지 마시고, 하나님의 법, 성령의 법에 순종하므로, 승리하는 삶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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