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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의 창고/ 비전나리의 설교

2013년 2월 10일 주일설교: 십사만 사천의 노래 (첫번째) - 요한계시록 14:1-3

by Peartree 2013. 2. 10.



십사만 사천의 노래 첫번째

요한계시록 14:1-3

 

1628년 영국의 작은 마을에서 땜장이의 맏아들로 태어난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가정이 너무 가난해서 그저 글을 읽고 쓸 정도의 교육만을 받다가 초등학교도 채 졸업하지 못한 채, 아버지를 따라 다니며 항아리와 주전자를 수선하는 땜장이의 일을 배우게 됩니다. 하지만 이 청년은 배우고 싶은 열정이 남 달라서 시간이 나면 헌 책방에 들러서 헌책을 수없이 읽으며 자신의 상상력을 키워갑니다.

어느새 그는 성년이 되어 가난하지만 매우 신앙이 좋은 여인를 만나 결혼을 하고 되었고, 조금씩 복음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복음을 받아들이자 그 복음을 전하려는 열정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리고 평신도이지만 설교자로서의 사역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당시 영국은 국교회나 국가로부터 허가를 받지 않은 설교자가 설교를 하는 것은 모두가 불법이었습니다.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던 이 사람은 당연히 국교회나 국가로부터 설교를 할 수 있는 허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불법 집회를 열었다는 제목으로 12년 옥살이를 하게 됩니다.

 

감옥에서도 그는 복음의 열정이 불타오르기 시작하고, 그의 머리 속에는 상상력이 넘쳐나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펜을 들어 글을 쓰기 시작하죠. 그렇게 해서 그는 5년에 걸쳐 위대한 기독교 고전 한 권을 집필하게 됩니다. 그 책이 바로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혀졌다는 『천로 역정, Pilgrims Progress 이라는 책입니다. 이 사람이 존 번연입니다.

 

『천로 역정』은 말 그대로 천국으로 가는 여행길 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책의 주제는 이것입니다. 우리 크리스천은 이 세상에서 주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나그네로, 순례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존 번연은 감옥에 있으면서 얼마나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겠습니까? 그러나 번연은 깊이 기도하는 가운데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돌아갈 본향은 내 집이 아니라, 저 천국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 책을 쓰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크리스천의 삶은 이 세상에서 순례자의 길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왜 하나님을 섬기며,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세상에서 이렇게 고난을 받을까요? 순례자요, 나그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집 나가면 고생이잖아요.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은 우리가 잠시 집 밖으로 나와 여행하는 여행길이라고 보면 됩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읽은 본문에는 144000명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144000명 때문에 많은 이단 들이 생겨났지요. 신천지 같은 이단은, 자기들 만이 144000명이라고 하며, 자기들에게 들어와야지만 구원 받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이 144000이 대체, 실제로 있는 숫자인지, 아니면 그냥 상징적인 숫자인지는 지금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144000명은 순례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천국을 소망하며 환난을 통과하며, 순례자의 길을 걷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 바로 전 장인 13장을 보시면, 666이라는 짐승의 수가 나옵니다. 이 짐승의 수를 받지 않으려고 이 순례자들이 얼마나 많은 고난과 환난을 당했겠습니까? 17절에 보시면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한다고 말씀합니다. 사거나 팔거나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다 못해 그로서리에 가서 우유 한통, 계란 한판도 살 수 없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고난이겠습니까? 이 고난을 통과한 사람들이 144000명인데, 이들이 순례자들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저에게 이런 질문을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목사님! 실제로 구원 받는 숫자가 144000명 밖에 되지 않습니까?’ 라고 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계시록에는 144000명에 대한 기록이 7장에 2, 오늘 본문에 1번 언급하고 있는데, 7 9절을 보시면 사도 요한이 144000명 외에 다른 사람들을 보았는데,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서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144000명 뿐만 아니라, 환난을 통과한 순례자들이 셀 수 없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구원 받은 수의 대표적인 숫자 144000, 이 사람들은 대체 어떤 성도들이길래, 고난을 잘 통과하여 천국에 들어 갈 수 있었는지 그 비결을 본문에서  찾아보며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1)  첫째로 144000의 순례자들은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본문 1절 말씀을 보시면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 라고 말씀합니다.

 

144000의 순례자들의 이마에 무엇이 있습니까?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

구원 받은 성도들의 이마에 예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이름이 쓰여져 있는 것을 사도요한이 보았습니다. 물론 이것은 우리 육의 눈으로 보이지 않는 영의 눈으로 봐야 보이는 이름일 것입니다. 다시 말해, 구원 받은 성도들을 하나님께서 인쳐 주셨다는 것입니다.

 

인을 치다 라는 말은, 지금은 잘 사용하지 않는 말인데, 옛날 노예들을 사고 팔고 할 때, 노예를 노예시장에 사오면, 이마나 팔에 인두로 지져서 표시를 했습니다. 그것이 인치는 것이었는데, 그렇게 인을 치면 그 후부터 노예는 영원히 그 주인의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구원 받은 주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인을 쳐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는 주의 소유된 백성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환난을 통과하는 순례자들은, 이 약속을 믿고 인내하며 통과했습니다. 우리의 이마에 예수님의 이름과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쓰여져 있다는 것이 얼마나 힘이 되겠습니까? ‘나는 주의 소유된 자니까, 죽어도 주님께서 내 영혼을 거두어 주시겠지!’ 이 소망, 이 약속 붙들고 견디어 냈던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은 계시록의 마지막 부분이 아닙니다. 144000인이 시온산에 섰다고 하니까, 환난이 끝난 것 처럼 느껴지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아직도 고난과 환난과 심판이 많이 남아 있어요. 다시 말해, 이 세상을 살아가는 크리스천의 삶이 꼭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환난과 고난이 멈추는 날이 없어요. 돈걱정, 자식걱정, 직장걱정, 건강 걱정, 미래에 대한 불안, 사회에 대한 불안, 이것 뿐이겠습니까? 실제로 마지막 환난 때는 정말 순교를 각오하고 살아야 하는 시대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는 어떻게 믿음을 지키겠습니까? 우리의 힘과 의지로는 불가능합니다. 지금도 별거 아닌 것 때문에 시험에 들고, 교회를 나오니 안 나오니 하는데, 그때는 어떻게 하냐구요.

 

그때는 약속을 붙드는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이마에 어린양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이 쓰여 있고,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쓰여 있는데 무엇이 문제겠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너는 내꺼 라고 이마에 써 놓으셨는데 뭐가 걱정이겠습니까? 이 변치 않는 약속 붙들고 고난을 이겨내는 것입니다.

 

여러분, 힘들고 외로우시면 어떻게 하십니까? 약속을 붙들고 이겨내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일제시대의 순교자 주기철 목사님의 순교사화 를 여러 번 들어서 잘 알고 계실 거예요. 그 시대의 고난은 신사참배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일본 천황이 신이었습니다. 지금도 역시 일본은 천황을 신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당시의 한국의 모든 백성들은 신사참배를 해야 했습니다. 11시 예배를 드리다가 12시 정오 싸이렌 소리가 나면, 동쪽을 향해 동방요배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주기철 목사님은 거부한 것입니다.

당시에도 교회연합회가 있었는데, 너무 견디기 힘드니까, 교회 연합회에서 새로운 해석을 내 놓았는데, ‘신사참배’ ‘동방요배는 우상숭배가 아니라, ‘국민의례일뿐이다라는 일제의 해석을 그대로 받아 들여 오히려 더 하도록 교회에서 더 권장했습니다.

그때, 주기철 목사님을 비롯해서 몇 몇 목사님들은 그것을 받아 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순교를 당했는데,

주기철 목사님이 순교 당하시면서 쓴 기도문이 있습니다. 내 몸엔 예수님의 흔적이 있습니다. 내 몸은 죽어도 내 영혼은 아버지의 나라에 있을 것입니다. 어떤 고난인들 주님의 십자가 고난 보다 더 하겠습니까? 나에겐 일사각오만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 약속이 분명하면 어떠한 고난도 문제없습니다.

약속이 흐려지기 때문에, 주님 배반하고 돌아서는 것입니다. 약속을 믿지 못하니까, 그만 넘어지는 것입니다.

 

앞으로 사단과 세상은 우리가 받은 이 불변하는 약속이 의심이 생기도록 계속해서 속일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먹어도 죽지 않을 것이라고 뱀이 속였었습니다. 일제시대 때에 신사참배’ ‘동방요배 를 해도 우상숭배가 아니라, 국민의례라고 속였듯이 말이죠. 마지막 시대에도 이 짐승의 숫자 666. 이 숫자를 오른손이라, 이마에 받게 할 텐데, 이거 받아도 지옥에 가지 않는다. ‘예수님만 믿으면 천국 간다고 했는데, 손이나 이마에 이런 것 받았다고 해서 지옥가냐? 그렇지 않다.’ 라고 속일 것입니다.

 

그런데요. 에덴동산에서 하와가 속아 넘어 갔습니다. 일제시대 때, 몇몇 목사님들 빼놓고 다 속아 넘어 갔습니다. 마지막 시대에도 수 많은 성도들이 속아 넘어갈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분명히 있다는 약속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흔들리지 않습니다.

 

에덴 동산에서도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으면 정녕 죽는 다고 알려 주었는데도 하와는 따 먹었습니다.

오늘 본문 11절을 보세요. 분명히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이름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이렇게 분명하게 알려주는데도 받은 사람들이 수도 없이 나올 것입니다.

 

우리가 걷은 길은 순례자의 길입니다. 순례자들에게 소망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고향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소망일 것입니다. 우리가 돌아갈 우리의 영원한 고향집은 저천국입니다. 주님께서 요한복음 14:3절에 분명히 우리가 살 집을 지으러 가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약속 붙들고 오늘도 고난의 삶 속에서 하루 하루 승리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2)  두번째로 144000의 순례자들은 새 노래로 찬양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본문2절을 보시면, 사도요한이 하늘에서 들리는 노래 소리를 듣습니다. 그리고 뭐라고 표현 하냐면 많은 물소리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은데 내가 들은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이 그 거문고를 타는 것 같더라” 라고 말합니다.

이 노래 소리는 하늘에서 들리는 천상의 찬양이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천사들이 찬양하는지, 마치 폭포수가 떨어지는 소리 같기도 하고, 천둥 치는 소리와도 같다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거문고 타는 소리 같다고도 말합니다.

사도요한이 왜 이렇게 분명하게 표현하지 못하고 갈팡 질팡합니까? 난생 처음 들어보는 굉장한 찬양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도요한이 어디서 이런 찬양 소리를 들었겠습니까?

 

이렇게 하늘에서 웅장한 찬양이 들리니까, 3절에 보시면 땅에 있는 144000인이 새 노래로 찬양을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다”고 말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고난을 당하면서 환난을 통과한 순례자들이 이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말입니다.

 

넌 크리스천들이 새 노래로 찬양을 부를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결코 따라 부르지 못합니다. 그러나 순례자의 길을 걷는 크리스천들은 이 찬양을 함께 부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3절을 다시 보시면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의 성도라고 말합니다.

속량이란? 말은, 영어로는 ‘Redeem’ 이라고 하는데, 예전에 노예들을 사고 팔 때 쓰는 용어였습니다. 이런 뜻입니다.  ‘노예의 몸값을 치루다. 또는 포로의 몸값을 치루고 구해내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속량함을 받은 144000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2000년 전에 이미 몸값을 치루고 지옥갈 신분에서 천국갈 신분으로 바꿔 놓은, 예수 믿는 순례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새 노래로 찬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이 노래를 배울자가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삶이 고달프고 힘이 들면 우리의 입에서 찬양이 점점 메마르게 되어 있습니다. 기쁘고 즐거우면 찬양이 저절로 나오지만 고난 가운데도 찬양 할 수 있습니까? 참 힘들거예요.

크레딧 카드 빚은 점점 늘어만 가는데, 그래도 찬양 할 수 있습니까? 잘 다니던 직장에서 fire 되었는데 그래도 찬양 할 수 있습니까? 자녀들이 속 썩이고, 하늘 일마다 실패하는데, 그래도 찬양 할 수 있습니까?

 

오늘 본문은 환난이 다 끝난 시점이 아니란 걸 앞에서도 말씀을 드렸습니다. 환난이 다 끝났으면 당연히 찬양이 나와야지요. 그런데 지금 환난을 당하는 중입니다. 여전히 666 짐승의 표를 거부해야 되기 때문에, 목숨의 위험도 감수해야죠. 짐승의 표를 받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우유 계란도 사지 못하고 생계에 위협을 받고 있는 과정 중에 있습니다. 그런데 144000의 순례자들은 그런 와 중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난 가운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모습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속량함을 받지 못한 세상 사람들은 이 찬양을 배울 수도 없고 부를 수도 없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불신자들이 찬양하며 하나님을 높이는 것 보셨습니까? 절대 불가능합니다. 우리 구원 받은 백성들 만이 할 수 있는 특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고난의 세월 잘 통과하라고 주신 것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이 찬양입니다.

 

성경에 보시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달픈 광야를 지날 때, 찬양하며 움직였습니다. 다윗은 도망 다니면서도, 굴속에 숨어 지내면서도 그 속에서 찬양하며 견디어 냈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사자굴에 던져 지면서, 찬양하며 힘을 얻었습니다.

 

무디 목사님의 동역자인 유명한 찬양 인도자 생키가 여객선을 타고 여행하고 있었어요. 신문에서 그의 사진을 자주 본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고 그 분이 작곡한 선한 목자 되신 주여를 불러달라고 졸랐습니다. 생키가 그 찬송 부르기를 마치자 한 사람이 다가와서는 이렇게 묻습니다. 생키 선생님,남북전쟁 당시 북군으로 참전한 일이 있습니까?” , 있었습니다.”

저는 그때 남군으로 참전했는데 당신을 본 적이 있습니다. 당신은 북군의 파란 군복을 입고 있었고 그날 밤이 보름이었는데 당신이 제 사정 거리 안에 있었습니다. 제가 당신을 겨냥해 방아쇠를 막 당기려고 하는데 당신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밤에 부른 바로 그 찬송이었지요. 그런데 제 어머니께서 그 찬송을 자주 부르셨거든요. 그때 전 당신이 예수 믿는 사람이란 걸 알게되자저는 도저히 당신을 쏠수 없었습니다.”

생키는 너무 감격하여 자기의 옛 적을 힘껏 끌어안았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여러분 찬양에는 힘이 있습니다.  그 찬양은 아무나 부를 수 없고, 구원 받은 성도들 만이 부를 수 있는 특권입니다.

전쟁중에도 찬양하고, 고난 중에도 찬양하고, 외로울 때로 찬양하고, 기쁠 때도 찬양하십시요. 이것이 순례의 길 잘 걸어가는 비결입니다.

 

오늘 찬양하는 순례자들이 고난을 잘 통과했습니다. 또 약속을 붙들고 변치 않는 순례자들이 환난을 잘 이겨내고 시온산에 섰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본향은 이 세상이 아닙니다. 우리의 시민권도, 우리의 소망도 이 땅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 순례자들입니다.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야 할 여행객들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저 하늘 나라에 우리의 소망을 두며,

우리의 이마에 예수님의 이름과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으로 인이 쳐져 있다는 것을 것을 약속으로 붙들고, 고난의 삶 가운데서도, 찬양을 드리며 끝까지 고향집에 잘 도착하시는 귀한 순례자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