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
로마서 7:1-13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려면 세상의 법을 따라야 합니다. 예를 들면 차를 운전할 때는 교통 법규을 따라야 합니다. 학교를 다닐 때는 학교가 정한 법을 따라야 합니다. 사회 생활을 할 때는 사회가 정한 법을 따라야 합니다. 미국에 오면 미국의 법을, 그리고 한국에 가면 한국의 법을 따라야 합니다.
정해 놓은 법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질서를 어긴다는 것입니다. 질서를 어기면 혼돈이 일어납니다. 혼자 사는 세상이라면 몰라도 여러 사람이 같이 모여 살기 때문에 혼돈을 피하기 위해 사람들은 법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법을 지키지 않으면 질서유지를 위해서 penalty, 즉 벌을 주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은 법 속에서 태어났다가 법 속에서 죽는 존재다” 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법에 구속을 받고 살다가 죽은 다음에야 비로서 법에서 해방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법이 엄하다고 해도 죽은 사람에게는 법을 적용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지독한 죄를 지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죽으면 감옥에서 나옵니다 (시체가 되어서). 이는 법으로 더 이상 죽은 사람을 구속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바울은 율법과 우리와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서 죽음을 비유로 들고 있습니다. 우리가 율법의 구속을 받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그는 우리가 율법에 대해 죽었다는 것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본문 1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그 법이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사람이 살아 있을 때만 율법이 효력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바울이 “법을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라고 했는데, 이 법을 아는 자들이 누구입니까? 로마교회 안의 유대인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지만 율법을 버리지 못하고 여전히 붙잡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이 구원의 한 방편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앞에 계속해서 뭐라고 말했습니까? 율법을 지켜 구원 얻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이신칭의의 교리를 전파했습니다. 이 이신칭의의 교리는 유대인들을 허탈감에 빠지게 하는 진리였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뭐라고 따지고 들었냐면 ‘그러면 율법은 아무 것도 아니란 말입니까?’ 라고 하면서 따졌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말하길, ‘율법은 사람이 살아 있을 때만 구속력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 죽었기 때문에 율법이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이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장에 오늘 읽은 본문 7장의 내용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어떻게 우리가 율법으로부터 자유하게 되었는가?”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지금까지 제 말이 이해가 되십니까? 오늘 이 말씀은 평신도들에게 어려운 말씀입니다. 바울도 그렇게 느꼈는지, 이 율법에 대해서 설명하기 위해서 어떤 예를 들어 설명을 하냐면, 부부 관계를 들어 가면서 보다 쉽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본문 2절을 보시면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 말씀합니다.
결혼식 가보셨으면 그 순서 중에 서약하는 순서가 있습니다. ‘신랑 000군은 신부 000양을 아내로 맞아 죽음이 둘 사이를 갈라 놓은 때까지 아끼고 사랑하고 존중할 것을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서약하십니까?’ 라고 묻습니다.
또
신부에게도 ‘신부 000양을 신랑 000군을 남편으로 맞아 죽음이 둘 사이를 갈라 놓을 때까지 사랑하고 존중하고 남편에게 순종할 것을 하나님과 여러 사람들 앞에서 서약하십니까?’ 라고 묻습니다.
이 서약과 동시에 부부는 서로 구속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결혼하기 전에는, 아무데서 잠을 자도 상관이 없었는데, 결혼한 후에는 꼭 집에 들어와 자야 합니다. 결혼 한 후에는 내가 벌었다고 해서 돈도 함부로 쓸 수 없습니다. 결혼 한 후에는 자유롭지가 못합니다.
명절이면 양가 부모님도 찾아 뵈야죠. 아내 생일 잊어버리면 큰일납니다. 결혼 기념일에는 외식이라도 해야 합니다.
이렇게 서로를 배려하고 서로를 도와가며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보이지 않는 구속력입니다.
그런데요 결혼과 동시에 보이는 구속력도 있습니다.. 아무리 부부관계를 남이 간섭할 수 없다고 하지만 실제로 간섭합니다. 예를들어, 세상법에서도요, 이 부부 관계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으면 구속합니다. 예를 들어, 간통이나, 가정폭력 같은 것입니다. 내 아내 내 가정이라고 해서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부부사이에는 법적 구속력이 있습니다.
율법이 이렇게 우리를 자유하지 못하도록 구속하고 있다는 말을 오늘 바울이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이 남편이라면 우리는 아내였습니다. 율법은 남편과 같이 나를 지배하고 군림했습니다. 율법은 무엇입니까? “하라 248”, “하지 말라 365” 라는 것을 정해 놓은 구약의 613가지 법 조항이었습니다. 지금 로마교회안의 유대인 크리스천들이 신약시대인데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율법의 마침이 되셨는데도 불구하고, 이 613가지 조항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 다고 우겨대고 있는 거예요.
이 율법이 얼마나 가혹한지 아세요. 만일 그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죽음이었습니다. 이 율법은 성도의 숨통을 막히게 하는 폭군과도 것은 법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율법이 남편이라는 것입니다. 옛날의 남편들이 얼마나 아내를 이렇게 폭군처럼, 숨도 쉬지 못하게 다루었습니까?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요.
그래서 이 폭군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폭군 남편이 죽던가 내가 죽던가 해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율법은 죽지 않고 완성이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우리가 자유 할 수 있습니까?
앞에서도 말씀드렸드렸으면 죽으면 감옥에서 나올 수 있습니다.
둘중에 하나가 죽어야 하는데, 누가 죽어야 합니까? 내가 죽어야 합니다.
율법은 죽을 수가 없습니다. 완성되었습니다. 12절을 보시면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그리고 율법이 왜 필요하냐면, 죄를 알려주기 때문에 필요한 것입니다. 7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그러니까, 죄가 죄인지 알기 위해서는 율법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주어야 하는데, 성경은 여러군데에 내가 죽었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내가 죽었다니까, 실감이 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체험하지 못한 죽음이기 때문에 실감이 안 날거예요. 그래서 성경은 계속해서 ‘너는 죽었다’ 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6장 4절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예수님과 함께 죽어 장사 되었다고 합니다.
계속해서 로마서 6:6절에도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라고 하며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고 합니다.
또 11절은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라고 하며 죄에 대하여 죽은 자라고 합니다.
그리고 갈라디아서 2장 20절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라고 하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고 합니다.
성경은 거듭해서 우리가 죽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죄에 대해 죽었으므로 지금까지 우리를 지배하였던 율법에서 해방되었으니 이제부터는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그것을 4절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율법에서 벗어나게 한 목적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는데,
첫째 목적은 4절을 다시 보시면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로 가기 위함입니다.
율법인 남편이 죽었죠, 그래서 우리는 다른 곳으로 시집을 가야 하는데, 그 남자가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는 새 생활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목적은 다시 4절 하반절에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성결한 삶, 거룩한 삶을 의미합니다. 즉 성화되어가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예수와 결혼한 사람은 이제 함부로 살 수 없습니다. 남편 되신 예수님의 체면을 생각하더라고 그럴 수 없습니다. 내가 형편 없이 살면 결국 나도 나지만 남편 되신 예수님이 더 욕을 먹습니다. 부인이 잘 못하면 남편이 욕을 먹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답게 살지 못하여 얼마나 예수님이 욕을 먹고 있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율법에서 자유한 사람들이고, 주의 신부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신랑으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신부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주의 신부로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삶을 살다가 주님 만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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