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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의 창고/ 비전나리의 설교

2013년 1월 16일 수요설교: 구원 받은 자의 삶 - 로마서 5:1-5

by Peartree 2013. 1. 17.

구원 받은 자의 삶 

로마서 5:1-5

                    

지금까지 우리는 로마서 4장까지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4장까지의 말씀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는 것입니다. 영원히 죽어 멸망 받을 수 밖에 없었던 죄인들이 구원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아무것도 없으면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것이 로마서 4장까지의 핵심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지난 시간에는 바울이 아브라함을 예로 들면서, 아브라함이 의롭게 된 것도 순종과 행함이 아니고, ‘그의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고 예를 들어 설명하는 것을 살펴 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 받으려면 인간의 어떠한 공로나 행함이 필요 없고, 그저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고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5장부터는 무엇을 말씀하고 있냐면  믿음으로 구원 받은 성도들의 삶은 어떤 삶인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믿음으로 구원 받은 성도의 삶은 어떠한지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1)  첫째로, 구원 받은 성도의 삶은 화평을 누리는 삶이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시면,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화평은 나 혼자 누리는 그런 화평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는 나 혼자 화평을 누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예수 믿으세요.” 하면 이대로가 좋아요, 지금 얼마나 화평한지 모릅니다. 걱정이 없습니다.’  라고 하시는 분들 있습니다. 그런 화평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사실 이런 화평한 삶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을 보세요. 화평한 삶을 산 사람이 한 명이나 있었습니까? 모두가 고난을 당하고, 핍박을 당하고, 헌신하며 충성하면서 살았습니다. 지금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하루 종일 지친 몸으로 집에 들어가 편히 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도 이 밤에 또 주의 전에 나와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실제로, 화평한 삶을 살기 원한다면 예수 믿지 말아야 합니다.

 

예전에는 아내가 교회에 다닌다고, 아내의 머리를 삭발하는 남편들도 있었습니다. 한 겨울에 아내의 신을 감추어 놓은 남편들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얼마나 교회 다닌다고 핍박을 하는지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교회를 포기하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화평은 이런 화평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가정을 평화를 위해서 예수님을 포기하는 화평이 아닙니다.

 

1절을 다시 보시면 여기서 말하는 화평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남편과의 화평 때문에 예수를 포기하는 화평이 아니고, 가정의 화평 때문에 교회를 포기하는 화평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가정이 화평하고, 부부사이에 평화가 있으면 더더욱 좋겠지만, 이런 화평이 오히려 하나님과의 화평을 막는 다면, 진정한 화평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 여기서 말하는 화평은 어떤 화평입니까? 구체적으로 말씀 드리면 하나님과 막힌 담이 없어야 하는 화평입니다. 그래서 1절을 다시 보시면 누구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 있게 되어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러니까,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막힌 담을 헐어버리는 것. 그것이 진정한 화평인 것입니다.  

 

예수님 없이 나 혼자 평안하다고 하는 그런 화평은 가짜 화평인 것입니다.

이 세상을 보세요.

국가나 가정이나 단체나 개인을 막론하고 평화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 평화를 얻기 위하여 나름대로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합니까? 사람들도 모두가 평화를 구합니다. 그러나 그 속에 참된 평화는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되어있는 것이 참된 평화입니다.

 

사도바울 이후에 최고의 신학자 라고 하는 성 어거스틴이분은 천재였습니다. 배우지 않은 학문이 없을 정도로 여러 학문을 두루두루 설렵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성경이 너무 시시해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19세때, ‘성경은 너무 단순하다 고 하면서 기독교 신앙을 버리고, 육체적 쾌락을 좋은 마니교에 심취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늘 마음에 불안감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로마서 13:13-14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이 말씀 한 구절에 그는 진정한 화평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때 그의 나이 33세였습니다.

 

그러면서 그가 외친 한마디가 있습니다. “오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전에는 참된 평안이 없었나이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인 이유로 불안 불안해 합니다. 물론 이런 삶 속에서의 불안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라옵기는 영적인 불안에 싸여 있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불안은 하나님과 막힌 담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의 삶을 보고, 세상을 보면 늘 불안하기 그지 없지요.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과의 화평은 늘 유지하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세상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진짜 화평인 것입니다.

 

2)  두번째로 구원받은 성도의 삶은 어떠해야 합니까? 본문 3절을 보시면 환난 중에 즐거워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환난을 당할 때 즐거워하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러분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이 세상에 환난 중에 즐거워 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습니까?

 

그런데 환난 중에 즐거워 하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고,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를 4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환난이 인내를 만들어 낸다고 말씀합니다. 영어 성경은 ‘Produces’ 라고 번역해 놓았습니다. 환난이 인내를 생산하고, 인내는 연단을 생산하고, 연단은 소망을 생산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내는 결국엔 무엇을 만들어냅니까? 소망을 이루는 줄 알기 때문이다.”

 

왜 우리가 환난 중에 즐거워해야 합니까? 환난 가운데 소망을 생산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말합니다. 그래서 그 소망을 생각하면, 식어졌던 믿음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의 환난 가운데 살지만, 영원한 하늘의 소망을 품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환난 중에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 소망이 없으면, 믿음은 식어 진다고, 지난 주일예배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래 전 영국에서는 국가의 허가를 받지 않고 설교하는 자는 무조건 감옥에 보내는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젊은이가 이 법을 어겨 12년 동안 감옥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그 긴 세월 동안 앞을 보지 못하는 그의 아내는 거지처럼 구걸하다가 죽게 되었습니다. 그의 세 자녀들도 졸지에 고아가 되어 거지가 되었습니다.  

이런 비참한 상황 속에서도 그 젊은이는 감옥에서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전 너무나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제가 주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요?

만약 제가 하나님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저는 절망중에 기뻐하겠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그 젊은이의 마음에 감동을 주셨습니다.

너는 글을 쓰거라, 나는 너에게 글을 쓸 수 있는 달란트를 주었노라.”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그 젊은이에게  환상이 보여 주시는데, 고난과 역경 중에도 주님의 나라를 향하여 기쁘게 걸어가는 한 젊은이의 모습 을 보여 주십니다.

그래서 책을 썼는데, 그 책이그 유명한 존 번연의[천로역정] 이라는 책입니다.

 

환난 중에 소망을 가지니까, 하나님께서 견딜 수 있는 힘도 주시고,  믿음 변치 않게 만들어 주십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까?

하나님과 막힌 담을 헐어버리기 위해 죽으셨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성전의 휘장이 위로부터 찢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지 않고 누리는 화평은 다 거짓 화평인 거예요. 그렇게 평화롭다고 하며 살지만 결국엔 속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사단 마귀도 평화의 사도로 가장하고 우리에게 거짓 평화를 줄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세상이 주는 평화 말고, 주님이 주시는 평화가 넘쳐 나기를 소망합니다.

 

찬송가 405장을 작사했던 죤 뉴톤(John Newton)은 예수를 믿기 전,

노예선의 선장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야비하고 잔인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짓지 않은 죄는 거의 없을 정도였습니다. 아프리카에 가서 총칼로 흑인들을

잡아다가 구라파와 미국에 팔아 넘기면서도 전혀 마음에 거리낌조차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진정한 화평이 없었습니다. 구원 받은 자의 즐거움도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의 마음속에 누군가 이렇게 속삭입니다. 네가 그리스도

인이라고? 주님이 정말 너를 위해 죽으셨냐?”

그때 뉴톤은 그렇다. 나는 말로만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죄인이다. 그래서 내 마음이 늘 불안하고 평화가 없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는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펜을 들고 주님의 은혜를 찬양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작사된 곡이 바로 405장 찬송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는 길은 예수의 피밖에 없습니다. 예수 믿고 하나님과 막힌 담이 없는 것이 진정한 화평인 것입니다.

원하옵기는 우리 사랑하는 꿈의 교회 성도님들은, 세상이 주는 평화 말고, 주님으로 오는 평화를 누리며 사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