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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의 창고/ 비전나리의 설교

2013년 1월 9일 수요설교 : 아브라함의 믿음 - 로마서 4:13-25

by Peartree 2013. 1. 11.


아브라함

아브라함의 믿음

 

로마서 4:13-25

        

지난시간에는 이신칭의 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이신칭의란 말 그대로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는 것입니다. 구원 얻는데 있어서 행함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 받은 다음에 행함은 믿음 만큼이나 중요하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지만 우리 크리스챤들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두말한 필요 없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일 것입니다. 또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은 어떤 믿음이며  또 어느 정도의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은 또 다른 아주 중대한 문제일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 가운데서도요.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도 거짓 믿음, 잘못된 믿음, 허황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믿음도 어떤 종류의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는 참으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어쩌면 믿는가 안믿는가의 문제 보다, 어떤 종류의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가 더 중요한 문제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혹시 우리 안에 거짓된 믿음, 잘못된 믿음, 허황된 믿음이 있다면, 그 믿음을 참 믿음, 건전한 믿음, 성경적인 믿음으로 바꾸어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6절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 지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비결은 믿음 밖에는 없다고 말씀하는데, 그 믿음은 어떤 믿음이냐?

첫째로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는 믿음

그리고 두번째는 하나님이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분이심을 믿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히브리서 11장은 이런 믿음의 모범적인 인물들을 많이 나열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오늘은 우리의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  4:13절을 보시면 아브라함이 의롭게 된 것은 율법에 있지 않고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는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인이 되었다고 말씀드렸는데, 오늘은 그러면 아브라함의 믿음은 과연 어떤 믿음이었는지 살펴 보기를 원합니다.

 

1)  첫번째로 아브라함의 믿음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믿음이었습니다.

 

 

본문 18절을 보시면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무엇을 바랄 수 없었다는 것입니까? 사라가 아이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바랄 수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바랄 수 없는 중에 믿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상식으로는 90세 할머니가 아이를 낳는 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입니다. 올해 한국에서는 57세되는 여자분이 아기를 출산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기네스북에는 70세의 인도에 사는 할머니가 아기를 낳은 것으로 등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을 보세요.

19절을 보시면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했다 고 말씀합니다.

성령 사라가 아이를 가질 수 있다손 치더라도, “아브라함 자신의 몸이 죽은 것 같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완전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여기서, 성경은 아브라함의 몸이 죽고, 사라의 태가 죽었다 라는 표현을 씁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 같지 않습니까? 아브라함과 사라만 죽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을 포함해서 지구상에 모든 사람들은 죽은 상태입니다.

 

죽을랑 말랑 죽어가는 사람들이 아니고, 이미 우리들은 저주 받아 죽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생명을 주실 것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죽을 우리를 다시 살리신 것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믿음과 우리의 믿음이 별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죽은 태에서 생명을 만들어 낼 수 있는 하나님을 믿은 것과, 영원히 죽을 수 밖에 우리를 살려 새 생명을 주어 천국에 들여 보내 주실 것을 믿는 것과 거의 같은 맥락인 것입니다.

 

이것이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실 줄을 믿는 아브라함의 믿음과 영원히 죄로 인해 죽었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다시 사는 것을 믿는 믿음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런 믿음을 의로 여기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믿음인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거 믿습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다실 살리실 것을 믿는 믿음인 것입니다.

 

2)  두번째로 아브라함의 믿음은,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본문 20절을 보시면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국어 번역이 좀 깔끔하지 못합니다.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 아브라함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 아니죠. 번역이 오해를 불러올 수 있는 번역입니다. 이렇게 해야 맞습니다.

믿음이 없어서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는 사람과 같지 아니하고, 믿음이 견고한 사람이다 라고 해야 이해가 빠릅니다.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위대한 믿음의 모습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경 속에서 수많은 약속들을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약속들을 고지 곧대로 믿는 사람들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요?

아브라함은 고지 곧대로 믿었습니다. 그 약속이 세상 사람들이 듣기에는 허무맹랑한 말 같이 들릴 지라도, 전혀 의심하지 않고 믿었다고 말씀합니다.

 

세상에서는 상식이 아니면 사람들이 움직이지를 않습니다.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자주 사용한 슬로건이 있다면 상식이 통하는 사회라는 슬로건이었습니다.

이 말은 비상식적인 행동이나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사회에서 통하지 않는 다는 말입니다.

 

맞습니다.

세상사람들이 보기에 비 상식적인 우리 크리스천들은 세상과 통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과 짝 할 수 가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아주 잘 통하는 크리스천은, 둘 중의 하나입니다. 크리스천이라는 가면을 쓴 세상사람이거나, 아니면 세상과 아주 잘 어울리는 크리스천이거나 둘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요. 실제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과 어울릴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고 예수님을 제대로 믿는 다면 말이죠.

 

왜냐하면 우리는 세상사람들이 보기에 비 상식적인 약속을 바라보고 믿고 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믿음의 선조들이 다 이렇게 비상식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가 뭔데 그 사람 때문에 이렇게 단두대에, 화형에, 사자의 굴에, 톱으로 켜는 죽음에, 암혈과 토굴을 찾아 유리 하며 방황할 필요가 있냐?’ 고 말하는 것이 상식입니다. 그러나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비상식적인 길로 갔습니다.

 

감리교의 창시가 존 웨슬레가 상식적으로 신상생활 하다가, 비 상식적인 신앙을 보고 회심하게 사건은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존 웨슬레는 영국이 파견한 선교사였습니다. 선교사였지만 그는 회심한 적이 없는 아직 구원받지 못한 선교사였습니다. 그는 미국 선교 왔다가 완전히 실패하고 허탈한 마음으로 영국행 배를 타게 되었습니다. 배를 타고 가는 도중인데, 어느 날 저녁, 바람이 불고, 파도가 높아져 위험한 지경이 되었습니다. 승객들은 모두 아우성이었습니다. 웨슬레도 이제 죽는가보다!하는 생각으로 무서워하면서 몹시 떨었습니다.

 

이 때 배 한쪽 구석에서 찬송소리가 들렸습니다. 죽음에 직면한 웨슬레는 그곳으로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이 누구였냐면 개신교인 모라비안 교도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찬송은 밝고 명랑했습니다. 그들의 얼굴에는 기쁨과 평화가 있었고, 그들의 기도에는 힘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 때에 ! 저것이 바로 믿음이구나!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정말 나의 주인이라면 저 소망, 저 기쁨, 저 평화가 있을 수 밖에 없겠구나!

비 상식적이 그들의 행동을 보고 웨슬레를 회심하게 됩니다.

나의 불안, 나의 좌절, 나의 무능, 나의 무기력은 내가 예수를 정말 나의 주인으로 삼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라는 깨달음과 함께 말이죠.

그후 그는 철저히 회개하고, 자기의 신앙의 제2시기로 들어가 성령체험을 하게 되었고, 감리교를 창시하게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기왕에 신앙을 가지려면 우리의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으로 살면 좋겠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으로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도무지 바랄 수 없는 중에도 바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가능성이 없는 상황 속에서도 믿음이 결코 약해지지 아니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끝까지 믿고 확신하는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있어서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원한 의를 소유하는 축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