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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의 창고/ 비전나리의 설교

순교자 박봉진 목사님

by Peartree 2013. 1. 9.

순교자 박봉진 목사님

박봉진 목사는 1890년 평택에서 태어나 16세까지 한학을 공부하였다. 1907년 17세가 되던 해에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수원으로 나갔다가 거리에서 전도하던 청년을 만나 수원교회(현 종로 감리교회)에 등록하였다. 1907년은 원산에서 시작된 부흥운동이 평양으로 파급되어 장대현교회를 중심으로 한국교회의 대 부흥운동이 일었던 시기였으며, 동경성서학원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성결교회의 최초 전도자 정빈, 김상준이 서울 무교정(현 종로 1가)에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던 때였다.

신앙에 입문한 청년 박봉진은 집으로 돌아가 집안의 한켠에 있던 사당을 부수어 버렸는데 이 일로 집안에서 쫓겨나 수원으로 돌아와 금은방에 취직하였다. 세공기술과 상술이 뛰어나 곧 경제적인 기반을 얻게되었고 결혼도 하였다. 교회에서는 입교 3년 후부터 집사로서 봉사하였다.

그러나 박봉진이 경제적인 안정을 얻어가던 1910년은 조선이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침탈에 강토를 짓밟히던 때였다. 1915년 성공한 사업가로서 고향 평택으로 돌아온 박봉진은 고향에 사업장을 마련하고 주민들의 신망을 얻었다. 1917년 경 1911년에 개교한 경성성서학원(현 서울신학대학교)의 교수 이명헌목사와 신학생 14명이 경기지역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했는데 평택에서 열린 집회에서 박봉진은 처음 성결교회와 만나게 되었다.


1919년 3월 1일에 촉발된 만세운동이 11월에 평택과 안성에서 일어났을 때 박봉진은 평택의 교회지도자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평택경찰서에 수감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다.

석방된 박봉진은 1920년 12월 경성성서학원에서 파송된 공응탁 전도사와 함께 교회를 세우기 위해 노력하다가 후임으로 1923년에 부임한 김협두 전도사와 함께 교회당 건축에 나섰다. 신자들이 모두 가난하여 건축이 지지부진하자 박봉진은 건축비의 거의 전액을 헌금하여 그해 7월 23일 평택 읍내에 평택성결교회당을 완공하고 봉헌예배를 드렸다.

평택성결교회의 집사였던 박봉진은 사업상 수원을 자주 왕래하였는데 그곳에는 한국교회의 위대한 부흥사 이성봉 전도사가 개척하여 세운 수원성결교회가 있었다. 박봉진은 수원교회의 부흥회에 참석하여 이성봉 전도사의 설교를 들으며 깊은 감화를 받았다. 

성공한 사업가 박봉진의 가슴에는 좀더 넓고 의미있는 세계를 위한 웅지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불같은 신앙의 소유자 박봉진은 이제 그의 생을 주님을 위한 삶으로 바꾸기로 작정하였다. 그의 결정은 1932년 나이 42세로 경성성서학원에 입학하여 목회자의 길을 걷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해 12월 신학교 동료들과 전도대의 일원으로 장호원에 파송된 박봉진은 그곳에 장호원성결교회를 개척하였고 파송을 받아 공부와 함께 목회를 시작하였다. 신학교에서 이명직, 이상철, 이건 교수등으로부터 공부한 그는 19세기 미국 성결운동의 중요한 슬로건이기도 했던, 중생·성결·신유·재림이라는 성결교회의 중요한 전도표제요 신학적 사고인 사중복음을 배웠다.

1935년 성서학원을 졸업한 박봉진은 여주교회의 담임 목회자로 부임하였다. 여주교회에서 그는 순교의 길에 버팀목이 되어준 신인숙 전도사를 아내로 맞이하였다. 이미 결혼을 하여 자녀들 두고 있었으나 일찍 상처하여 어려움을 겪던 그는 가정의 안정을 되찾을 수 있게 되었다. 여주교회에서 성공적인 목회를 하던 그는 교단의 파송으로 이천교회를 겸임하였다.

박봉진은 1938년 9월 1일 성결교회 제5회 이사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이 시기는 일제에 의한 신사참배 강요가 극에 달하였던 때이다. 이 시기에 감리교와 장로교, 성결교회가 모두 신사참배를 결의하였다. 감리교는 1938년 9월 30일 신사참배를 국민의례로 수용하는 통고문을 자진하여 발송하였고, 장로교회는 산하 27개 노회중 19개 노회가 신사참배를 이미 가결한 상태에서 열린 1938년 9월 평양 서문밖교회에서의 제27회 총회에서 고등계 형사들의 감시하에 신사참배를 가결하였다. 가(可)와 부(不)를 물어야 하는 의사진행에서 오직 "가"만 묻고 의사봉을 두드린 것이다. 이에 북장로회 선교사 헌트(B.F. Hunt, 한부선)가 일어나 "불법이요, 불법이요"하고 소리쳤으나 형사들에 의해 끌려나가는 그의 소리는 겁에 질려 앉아있던 대의원들 속으로 사라질 뿐이었다. 카톨릭도 1920년 조선신궁이 건립될 때에 만해도 개신교회와 같이 반대하였지만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신사참배를 국가의식에 불과하다는 일제의 주장을 받아들이고 교리를 수정하였다. 성결교회는 1940년 9월 10일부터 제9회 이사회를 개최하였는데 교단의 헌법을 수정하도록 이사들을 위협하였다. 개정된 헌법에는 "천황을 받들어 모시고, 국헌을 중히 하며, 국법을 순종한다"는 내용이 첨가되었다. 이리하여 한국의 모든 교회들은 공식적으로 일제의 강압에 굴복하여 신사참배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 교회에는 "남은 자"들이 있었다. 비록 전체 교인 수에 비하면 소수라고 하겠지만 많은 성직자들과 성도들이 개별적으로 신사참배에 반대하며 모진 풍파를 온 몸으로 맞고 있었다.

신사참배에 대한 박봉진 목사의 입장은 단호하였다. 이 일로 어려움을 겪게 되자 교단은 그를 다시 철원교회로 파송하였다. 1941년 5월이었다. 철원지역에는 감리교의 목사 한 분이 이미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고문을 당하여 순교한 지역이었다. 부인은 박봉진목사에게, 서울로 가서 임지를 바꿔줄 것을 부탁하자고 하였으나 그의 대답은 "이것이 하나님의 뜻일텐데, 하나님의 뜻이라면 가야하지 않겠소"라는 것이었다. 밤을 새워 손을 마주잡고 기도한 부부는 힘을 얻어 철원교회로 향했다. 철원교회는 성결교회에서 일곱 번째로 세워진 교회로서 1914년 11월에 배선표 전도사에 의해 개척되었다.

젊은 시절 철원교회에서 박봉진 목사의 지도를 받으며 부모처럼 따랐던, 현 동부교회의 한순희 권사는 박봉진 목사에 대하여 "목사님은 키가 작으시고, 용모는 사진과 같이 고우시고, 성품은 강직하셔서 당신에게 아무리 불리할지라도 바른 말을 하시는 분이시며, 반면에 온유하시며, 화나는 일이 있으셔도 언성을 높이시지 않고 알아듣도록 설득시키는 분이고, 집념이 강하시어 무슨 일이든지 끝까지 해 보시고야마는 강인한 성품의 소유자였다"고 회고하였다.

박봉진 목사는 일제의 경찰들이 예배당에 앉아 있는 것을 알면서도 거침없이 설교하였다. 재림의 주이신 예수님 만이 경배 받으실 왕이었기에 신사참배에 대한 박봉진목사의 태도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설교를 트집잡아 연행과 석방이 반복되었다. 

1941년 12월 6일 일제는 미국 진주만을 폭격함으로써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1941년 6월 일본 홀리네스교회의 간부 60명이 국체 변혁을 도모한다는 혐의로 1차 검속되었고 1942년 2월에는 일본 내의 전 성결파 교역자와 평신도 지도자들이 검거되었다. 이 때에 대판 성결교회에서 목회하던 김기삼목사도 체포되었다. 일본 내의 34개 교회는 강제로 합병되었고, 유독 성결교회만은 해산을 당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국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재림을 강조하였던 성결교회와 안식교회 그리고 동아기독교(침례교)가 해산 당한 것이다. 다른 교파들은 역시 일본의 조합교회로 편입되었다. 

김기삼 목사를 기소하였던 요시다 검사의 다음과 같은 말은 성결교회가 해산되게 된 이유를 알게 한다. 

"당신이 속해 있는 성결파의 그리스도 재림 신앙을 나는 잘 이해하고 있소. 종말론에 있어 그리스도 재림의 신앙사상이 교파에 따라 다르기는 하나 그것이 기독교 신앙의 표준이 되는 성서의 중심 사상이 되는 이상 성서를 경전으로 삼는 기독교 전반에 걸친 문제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왜 하필 성결파만 문제를 삼아 기소하느냐 하면 그리스도 재림 신앙을 너무나 고식적으로 현실적으로 구체적으로 노골적으로 단순하게 열렬하게 고조하는 까닭이겠지요. 당신들의 그리스도 재림 신앙은 그리스도에게 바치는 단순하고도 순진한 정서이겠지만 그 이면에는 세계를 제패하려는 유태인의 시온이즘의 정치자금이 섞여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일제는 성결교단의 해산을 위해 치밀한 계획을 따라 일을 진행하였다. 일제는 1941년 8월 6일 금화성결교회의 한정우 집사. 박윤상 집사를 신사참배 반대, 말세재림론 유포 혐의로 금화경찰서에 가두고 철원 검사국에서 심문하여 일본천황에 대하여 불경(不敬)한 죄를 지었다는 소위 불경사건을 통해 성결교회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성결교회의 기관지인 활천이 폐간되고 1943년 5월 24일 성결교회에 대한 검속령이 내렸다. 경성신학교의 교수들과 학생대표들이 투옥되고 학교는 폐쇄되었다. 200명의 성결교회 교역자들과 장로 및 집사 100명이 투옥되었다. 신안주 교회의 김지봉 집사, 신학생 김은규가 모진 고문 끝에 순교하였다. 그해 12월 29일 성결교단이 해산성명서에 서명한 후 31일을 전후하여 석방되었다. 

박봉진 목사는 검속이 시작된 지 삼일째 되던 5월 27일 경찰서의 출두명령을 받았다. 박봉진 목사는 아내에게 "여보, 나를 본서 고등계에서 지금 들어오라고 하니 일은 심상치 않소. 그런즉 교회 일은 직원들과 의논하여 변함없이 해나가게 하고 당신은 아이들을 데리고 집안 일을 잘 지켜 나가시오"라고 말한 후 문지방에서 새 구두를 신었다가는 이내 헌 구두로 갈아 신고 밖으로 나갔다. 곧이어 형사들이 들이닥쳐 서재와 집안을 수색하여 두 상자 분량의 설교 노트와 교회 서류들을 압수하였다.

유치장에서는 만주에서 가져온 썩은 좁쌀과 콩밥이 제공되었다. 그러나 그것이나마 유치장 안의 젊은이들에게 양보하고 바닥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다. 행여 모진 고문과 매에 못이겨 주님을 배반하지 않도록 힘을 달라고 기도하였다.

어느 날 부인이 사식을 준비해 면회를 갔다. 그런데 장작을 쪼개는 소리가 들려 소리를 따라 가 보니 고등계실에서 나는 소리였다. 들려오는 비명소리를 듣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소리는 바로 남편 박봉진 목사의 소리였다.

박봉진 목사의 아들 박해원 장로는 당시의 일을 이렇게 증언하였다.

"어머니는 그로부터 면회와 사식 넣어드리기에 기진맥진 하셨고 어떤 때는 사식을 넣으러 들러가던 중 장작 패는 소리같이 아버님을 패는 소리를 듣고 실신하시기도 했습니다. 물 먹이고 거꾸로 매달고 개처럼 기라 발길로 차고 하여 모질고 끈질긴 고문은 매일같이 계속되었습니다. 다른 예수쟁이들과 목사들은 하나님은 없다. 예수를 믿지 않겠다. 혹은 일본 천황에게 충성하겠다는 진술서를 쓰고 석방되는데 왜 너는 항복을 않느냐고 하자, 아버님은 하나님 외에는 참 신이 없다고 간신히 대답하며 기진맥진하다가 정신을 차리고 나면 다시 발길질과 고문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기도하시다가 무슨 결심을 하시고 사식 속에 쪽지를 넣어서 아버지의 용기를 도왔습니다. 그 쪽지의 내용은 "승리하십시오, 목사님 아이들 걱정 마시고 용기 잃지 마십시요"라는 용감한 글귀, 고귀한 글귀였습니다. 참으로 어머니의 신앙적 뒷받침이 아버님으로 하여금 순교의 면류관을 얻게 하신 것으로 생각합니다" 

박봉진 목사를 괴롭힌 고등계 형사는 일본인 주임이 아니라 조선인 임모 형사와 오모 형사였다. 

* 너는 무슨 이유로 신사참배를 거절하느냐? 
- 나는 하나님 외에 참신이 없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 너는 천황의 백성이 되어 천황이 망하라고 기도한다는데 그것이 사실이냐? 
- 그렇다. 
* 이 놈아, 천황이 높으냐 하나님이 높으냐? 
- 나에게 묻지 말고 너희들의 마음으로 생각하라. 
* 예수 재림은 곧 온 세상의 심판이라고 하는데 그러면 대일본제국의 천황폐하도 예수에게 심판을 받는다는 말인가? 
- 천황폐하는 신이 아니라 사람이오. 모든 사람은 다 죄를 범하였으므로 천황 폐하도 심판에서 제외될 수 없다는 것이 기독교의 진리요. 

출옥한 소식을 듣고 달려갔던 한순희 씨의 증언에 의하면, 박봉진 목사는 "매를 이기지 못해 주여! 주여! 부를 때마다 그래도 주여!냐고 하면서 더 심한 매질을 당하였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고문과 문초는 밤낮으로 이어졌다. 먹을 수도 잠잘 수도 없었다. 몸 어느 곳 한군데 성한 곳이 없었다. 그러나 극심한 고통도 박봉진 목사의 신앙을 빼앗을 수는 없었다. 3개월 간에 걸친 일제 고등계의 고문도 주님의 신실한 종을 이기지는 못하였다. 일본은 강대한 것 같았으나 키 작은 조선의 한 목사를 굴복시키지는 못하였다. 

부인과 아들의 증언에 의하면 1943년 8월 10일, 더 이상 그들이 취조할 수 없을 정도로 박봉진 목사의 상태가 죽음의 문턱에 다달았을 때, 데려가라는 통고가 전해졌다. 그들은 박봉진 목사가 장티푸스에 걸렸다고 괴변을 늘어놓았다.

도립병원 격리실에 도착하였을 때 박봉진 목사는 "여보, 나 천당에 왔어요. 이명직 목사님은 어찌 되었소? 우리 전도사와 한 집사는 어떻게 되었소?" 라고 걱정하고는 부인에게 감사의 기도를 부탁했다.

어느 주일날 한순희 씨가 몇몇 성도들과 찾아갔을 때, 박봉진 목사는 요한복음 14장을 풀어 설교했는데 말세의 일과 현재의 고난과 장차 나타날 영광을 족히 비길 수 없다고 말하였다. 또한 이웃의 감리교회의 목사와 직원들이 찾아와 위로를 하자 "나는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게 된 것을 하나님께 영광 돌릴 뿐이다"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입원 엿새째 되던 날 찬송가 "저 좋은 낙원 이르니"를 불러달라고 부탁하자 부인이 찬송하니 2절을 부를 때 박봉진 목사도 입술을 움직여 따라 불렀다. 방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함께 찬송을 부르고 간호사들도 곡조를 따라 부르며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았다. 

"저 좋은 낙원 이르니 내 기쁨 한이 없도다/ 이 세상 추운 일기가 화창한 봄날 되도다/ 영화롭다 낙원이여 이 산 위에서 보오니/ 먼 바다 건너 있는 집 주 예비하신 곳일세/ 그 화려하게 지은 것 영원한 내 집이로다" 

찬송이 끝나고 부인이 물었다.

* 목사님, 세상을 뜨실 것 같습니까? 
- 나 같은 행복자는 세상에 없소 
* 천군 천사가 있는 곳이 보입니까? 
- 나는 지금 그곳으로 가오. 부인과 아이들이 불쌍하오. 그러나 하나님이 살아계시니 조금도 염려 마시오 

마지막 말이 끝나고 몸을 일으켜 달라는 표시를 하자 부인이 머리를 들어 일으키려 할 때 이미 눈이 풀어진 것을 확인하고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눕히니 박봉진 목사는 그 길로 하나님의 나라로 떠나갔다. 병원에 도착한지 엿새만인 1943년 8월 15일 새벽 4시였다. 

장례식은 이웃 감리교회 목사의 집례로 세 교회 성도들이 모여 거행되었다. 일경의 감시 속에 까만 달구지에 순교자의 주검을 싣고 가는데 어떤 이가 십자가를 가지고 있었다. 장례 행렬은 십자가를 높이 들고 화장터로 향했다. 십자가가 내려올 때마다 딸처럼 사랑을 받았던 한순희 씨가 달려가 십자가를 높이 치켜세웠다. 

곁에 있던 간호사는 이 장엄한 순교의 모습을 보고 믿음을 갖게 되었고 후일 전도사가 되어 부인과 계속 연락을 하며 지내고, 이 일을 간증하였다. 어렸을 때에는 모친이 중앙성결교회의 신자여서 교회에 나갔으나 대구 의전에 입학하면서 당시의 지성적 풍토에 영향을 받아 유심론적이고 무신론적 사상에 휩쓸려 청년기를 보내었던 당시 25세 의사 홍종기 씨는 47년이 지난 후 72세가 되었을 때에 회심하고 지나간 일들을 회고하여 쓴 글을 가지고 1990년 4월 9일 성결교회의 총회본부로 찾아와 그 때의 일을 증언하였다.

입원후 6일 째 병실을 방문한 홍종기 씨는 깜짝 놀랐다. 후두마비 증상으로 전혀 말을 못하던 박봉진 목사가 말을 한 것이다. "얼굴이 붉어지면서 평화의 미소와 천사와 같이 광채나는 얼굴이 되어(너무 변한 모습이어서 이렇게 밖에 표현할 수 없음) 무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몇마디를 하시는 것 같은데 잘 알아들을 수 없었고 또 기억에 남지 않습니다. 다만 한마디가 기억에 뚜렷이 살아남아 있습니다. "나는 지금 천국으로 간다" 그의 얼굴은 어린 아이 같은 미소와 함께 천사의 얼굴같이 빛이 났습니다" 과학자로서 그는 이 마지막 장면이 마음에 남아 "인간의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학문적으로 해명하기 위해 연구하여 <생명의 본질>이라는 책을 썼다.

박봉진 목사의 설교 원고와 각종 글들은 유족들이 해방 후 남산에 있던 기독교 박물관에 기증하였는데 한국전쟁시 불에 타서 모두 소실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