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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의 창고/ 비전나리의 설교

세례요한의 발견- 요한복음 1:29-34

by Peartree 2012. 12. 25.

세례요한의 발견

요한복음 1:29-34

 

지난 시간에는, 세례요한이 이 땅에 온 목적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온 목적은,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사명이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시면, 그 사역이 수월하도록 길을 내고, 터를 닦는 역할이었습니다.

그러면, 세례요한만 예수님의 길을 예비할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다시 오시는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예수님께서는 여자가 나은자 중에 세례요한보다 큰이가 없다고 할 정도로, 요한을 극찬했습니다.

지금도, 주님 다시 오심을, 준비하며, 기다리며, 터 닦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세례요한에게 칭찬했던 것과 동일한 칭찬을 아끼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 역사를 보면, 많은 능력있는 주의 종들이 이 부분에서 자기 발견을 하지 못하고 넘어졌습니다 주님을 예비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주님 자리에 앉아서 영광을 가로챈 사례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예를들면, 로마의 교황 같은 사람이 그런 사람입니다. 카톨릭은 로마교황을 가르켜,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고 합니다. '베드로의 사도직분을 계승하고, 그리스도의 대리자이며, 전체교회의 머리이고, 거룩한 아버지며, 무오한 존재' 라고 말합니다. 이게 무슨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사람의 모습입니까, 하나님이죠.

 

하나 하나 집고 넘어가면요.

베드로의 사도직분을 계승하고 – 교황이 사도라는 것입니다. 사도는 예수님의 열두제자와 바울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대리자 – 지금은 그리스도의 대리자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죄를 가지고, 주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중간에, 교황이 다리역할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카톨릭은, 고해 성사라고 해서, 신부에게 가서 죄를 고하게 됩니다. 주님의 자리에, 신부들이나 교황이 앉아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누구든지, 예수님께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전체교회의 머리 –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죠.

거룩한 아버지 – 교황이 거룩한 아버지 입니까? 고린도전서 8:6절을 보시면,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아버지기 되시는데, 교황이 아버지라는 거예요.

무오한 존재 –무오하다는 것은, 오류가 없다는 것입니다. 즉, '교황은 절대, 실수나, 잘못을 범하지 않는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황이 무슨 말을 하든, 그말은, 하나님의 말씀과 같은 권위를 같는다' 라고 실제로 1870년에 교황청에서 발표를 했습니다.

 

교황뿐이겠습니까?

기적이 일어나고, 능력이 일어나니까? 하나님자리에 앉은 사람이 많습니다. 자칭예수라는, 통일교의 문선명이 그렇습니다. 자기가 성령이라고 하는 조희승이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결국,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고, 자기에게 돌려서, 그렇게 타락한 것입니다.

 

요즈음요, 교회가 조금만 부흥하면, 자기가 예수님 자리에 앉으려고 하는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교회가 아무리 은혜스럽고, 아무리 부흥해도 모든 영광은 하나님이 받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목사나 장로나 어느 개인에게 그 영광이 추호라도 돌아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한국의 조직신학의 거장이셨던 고 박형룡 박사님은 돌아가시기 전에 신학생들에게 이렇게 가르치셨다고 합니다.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모든 공로는 성도들에게, 모든 고난은 여러분이 지라" 는 유명한 말씀으로 훈계하셨다고 합니다.

 

그렇게만 되면, 사람이 높이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알아서 높여 주십니다.

세례요한을 보세요. 자기 자신을 철저히 발견하고, 맡은 사명에만 충실하니까, '여인이 낳은자 중에 가장 크다' 라고 높여 주셨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겸손하게, 세례요한이 갔던, 그 길을 따라 간다면, 주님이 오실 때, 높임을 받게 될 것이고, 눈에서는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이며, 영원한 빛 가운데 거하게 될 거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우리 믿는 자들의 소망입니다. 이런 소망이 없으면, 세상에서 우리가 가장 불쌍한 사람이라고, 고린도전서 15:19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라"

 

오늘은, 이렇게 사명에 충실한 세례요한이, 지금 많은 사람으로부터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네가 엘리야나, 네가 선지자냐? 묻고 있습니다. 이 순간이 참 중요합니다. 하나님 자리에 앉느냐? 아니면 사명에 집중하느냐? 자칫 잘못하면, '그렇다, 내가 선지자다' 라고 말해서, 하나님 자리에 앉을 수도 있지만,

 

이 유혹을 빠져나가는 세례요한의 방법을 보면 참 지혜롭습니다. 어떤 방법을 택하냐면, 29절을 보시면,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로다" '보라!' '나를 보지 말고, 예수님을 보라' 고 말합니다. 자기에게 쏠렸던 관심을, 완전히 예수님께로 돌리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그분을 소개하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보세요. 그분이 우리가 찾는 분입니다. 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럼 오늘은,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소개하는지 살펴 보기를 원합니다.

 

  1. 첫째로, 예수님을, 세상죄를 지고가는 어린양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세상죄를 지고가는 어린양' 이란 표현은, 성경을 좀 알아야 이해가 가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땅에 어린양으로 오셨습니다. 어린양으로 오셨다는 것은 죽으러 오셨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어린양' 이란 단어가 나오면, '그 양은 죽어야 하는 양' 이라고 보시면, 거의 맞습니다.

출애굽기 12장을 보시면, 유월절 어린양도 죽어야 하는 양이었습니다. 그래야 그 대신에 백성들이 살게 되는 것입니다.

레위기에, 나오는 어린양도, 백성들의 죄를 대신 지고, 죽어야 하는 양이었습니다.

신약에 와서, 어린양으로 오신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 죽으셔야 했습니다. 그래야, 죄로 인해 영원이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들이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린양' 하면, 죄를 대신해서 죽어야 하는, 깊은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19세기의 영국의 유명한 설교자, 찰스 스펄전 목사님의 일화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번은 스펄전 목사님이 예배당을 새로 건축하고 입당하기 전에, 설교연습을 하기 위해서 새 예배당에 들어갔습니다. 그 당시는 마이크가 없을 때였기 때문에, 육성으로 설교를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목소리가 크면, 설교를 잘 하는 축에 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예배당을 새로 지어서 전보다 훨씬 크기 때문에, 저 뒤에 앉아 있는 교인들이 잘 들을 수 있는지, 테스트를 하기 위해 사모님을 데리고 새 예배당에 들어가서 설교 연습을 했습니다. 사모님이 맨 뒷자리에 앉아서, 설교가 들리면, 손을 들어, 사인을 해주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스펄전 목사님이, "보라, 세상죄를 지고가는 어린양이로다" 라고 설교를 하니까, 사모님의 손이 안 올라 가는 거예요. 그래서 더 크게, "보라, 세상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로다" 그래도 역시 손이 안올라가니까, 더 크게, "보라, 세상죄를 지고가는 어린양이로다" 그랬더니, 교회 지붕에서 페인트 칠하는 인부가, 교회당으로 뛰어 들어오더니, "목사님, 내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라고 죄를 고백했다고 합니다. 자초지종을 들어어보니, 지붕에서, 페인트를 칠하고 있는데, 갑자가 하늘에서, "세상죄를 지고가는 어린양을 보라" 라는 음성이 들려, 예배당 안으로 들어와, 죄를 고백하기 위해서 왔다는 거예요.

 

여러분, 영혼 구원을 위한,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외침이라면, 어떤 것이겠습니까? 아마 이 말씀일거예요.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보라" 다른 말로 바꾸면, '지금 너희 죄를 지고, 십자가를 지고, 죽으러가는 분을 봐라' 라고 바꿀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 내 생명을 버리것 보다, 더 큰 외침이 있습니까? 자기 생명을 버리면서까지, 나 같은 죄인을 살리는, 것보다, 더 큰일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온 천하를 얻고도, 생명을 잃으면 아무 소용없다고 했듯이, 생명보다, 소중한 것은 이 땅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생명을 나를 위해 죽으러가는 것을 본 것입니다.

 

성경 66권 중에, '어린양' 이란 단어를 가장 많이 사용한 성경이, 구약의 레위기 같지만, 요한계시록에 가장 많이 쓰였습니다.

그래서 하늘나라에 생명책이 있는데, 그 책을 어린양의 생명책이라고 말씀하고 있고,

또 우리가 최후의 마직막에는 신랑되신 주님과 혼인찬치를 하는데, 이 혼인잔치를 어린양의 혼인잔치라고 말씀하고,

천국에서 부르는 찬양을, 어린양의 노래라고 말씀하고,

천국에 성전이 있는데, 계시록 19:7절을 보시면,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예수님 자체가 하늘의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하늘에 보좌가 있는데, 계시록 마지막 장, 3절을 보시면, 그 보좌를 "어린양의 보좌" 라고 말합니다.

 

이 대단한 어린양 되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러 가시는 모습을, 세례요한은 비전의 눈으로 미리보고는, "보라 세상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을 보라" 라고 외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린양이십니다.

 

  1. 두번째는,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어떤분으로 소개했냐면, 하나님의 아들 이라고 소개합니다.

 

34절을 보시면,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말씀합니다.

 

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 아들도,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입니다. 짐승의 새끼는 짐승입니다. 절대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이예요. 사람의 모습으로 이땅에 오신 것 뿐입니다.

 

이 세례요한이 본, 예수님은, 하나님이었습니다.

이 진리를 알면, 구원받는 것입니다.

 

지금 시대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선생으로 알고, 개혁가 정도로 알면, 구원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알고, 믿고, 영접해야 구원 받는 거예요.

 

지난 번에도 말씀드렸는데, 오바마에게, CNN 토크쇼에 나와서, 진행자, 래리킹이, 예수는 어떤 분입니까? 라고 질문하니까, "그는 위대한 선생" 이라고 답했습니다. 그러면서, 오바마가 이번엔, 자기는 매일 새벽마다, 기도하는, '신앙심이 깊은 크리스천' 이라고 말했습니다. 지난달에 말이죠.

말이 앞 뒤가 맞지가 않아요.

신앙심이 깊은 크리스천이, 가장 기본적인,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도 모른다는 것이 말이 안됩니다. 공영방송이라, 말을 가려야 했다면, 최소한, 그는 '구원자' 라고 해야 신앙심 깊은 크리스천이죠.

 

겨우 예수님이 "위대한 선생" 밖에 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입니다.

 

이렇게, 세례요한이 예수님은 '어린양' 이며,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이라고 깨달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다른 것 없습니다.

 

그분을 기다렸기 때문에,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겸손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도, 주님을 기다렸던 성도들만, 주님을 알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을 도적 같이 오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깨어 파수꿋 처럼, 도적을 기다리고 있어야 도적을 잡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꿈의성도님들이, 깨어 주님을 기다리다가, 주님을 알아 보는 귀하고 복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