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임마누엘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마 1:18 -25
세상에서 가장 힘든 때가 언제였습니까? 라고 묻는 다면 "홀로 외톨이가 되었을 때입니다." 라고 대답하시는 분들이 참 많을 것입니다. 세상에서 혼자라고 느끼는 것 만큼 고통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죄를 지은 사람들을 감옥에 가두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혼자 있어보라는 거예요. 그래서 홀로 있는 고통을 한번 느껴보라는 것입니다. 현대사회를 일컬어 '군중 속의 고독의 시대' 라고 합니다. 사회는 점점 복잡해져 가고, 만나는 사람들은 많아졌지만, 왠지 고독한 시대라는 것입니다.
스마트폰이 보급되면서 가장 빠르게 확산되고 있는 것이, SNS 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제도 YTN 뉴스에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이 SNS 다.' 라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 SNS 라고 하는 것은 이것은 Social Network Service 라고 하는데, 이 Social Network Service 를 통해서 우리는 많은 친구를 맺습니다. 그리고 만약에 친구들 중에 한 사람이 특정 후보에 대해서 아주 좋게 이야기 한다면 다른 친구들도 그 친구의 말을 듣고 그 후보를 찍게 된다고 합니다.
카카오 톡이나, 마이피플, 트위터,face book 같은 것들이 SNS 입니다. 저의 카카오 톡에도, 저희교회의 여러명의 성도님들이 저와 친구를 맺고 있습니다.
이렇게 Network 이 발달하면서 사람들이 가장 먼저 한 것은 친구를 찾고, 친구를 맺고, 그 친구들과 이야기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이렇게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교재를 하고 싶어합니까? 이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만들 때,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과 대화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도 교회라는 공동체를 세워 그 안에서 서로 교제하고 믿음의 친구를 맺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앞에서도 말씀 드렸듯이, 친구는 많지만 속마음을 오픈하고 이야기 할 수 있는 친구가 드문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 속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 할 수 친구가 있습니까? 나의 어떤 허물도 이해하고 감싸줄 수 있는 친구가 있습니까? 나의 약점과 허물을 말해 주어도, 그 말이 밖으로 돌지 않고 묵묵히 기도 해 주는 친구가 있습니까?
런던 타임즈가 독자들을 대상으로 리서치 조사를 했는데 '어떤 사람을 친구라고 할 수 있습니까?' 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 질문에 친구를 가장 잘 정의한 대답으로 선정된 말은 '온 세상이 다 나를 버릴 그때에도 나를 찾아오는 친구가 바로 참된 친구다.' 라는 말이 선정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그런 친구가 있습니까? 물론 우리는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그분이 그런 친구가 되어 주시기 위해서 2000년 전에 마구간에 태어나셨습니다.
예루살렘에 가면 '야드 바셈' (Yad Vashem) 이라는 Museum이 있다고 합니다. 이 박물관은 독일 나치에 의해서학살당한6백만 명의 유태인들의 아픈 역사를 절대로 잊지 않고 영원히 기억하라고 만든 유대인 학살기념관입니다. 거기에 가시면 어린아이의 희생을 기념하는 기념탑 뒤편 언덕에 어린아이 10여명을 끌어안고 있는 어른의 동상이 있다고 합니다. 그 동상의 이름은 '코르작과 게토의 어린이들' 라고 합니다.
코르작은 폴란드의 아동작가이며 교육자입니다. 당시 독일 나치가 폴란드의 유대인 학교를 급습했어요. 그때 교실에서 공부하던 아이들이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떨고 있었습니다. 코르작은 아이들을 양팔로 감싸 안으며 내놓지 않았습니다. 독일군 장교가 '당신은 유대인이 아니니 물러나고 아이들만 내 놓으라!' 고 했을 때, 코르작은 스승으로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아이들을 그냥 보낼 수가 없었습니다.
필사적으로 독일군에게 저항을 하다가 끝내 아이들과 함께 가스실로 향하는 트럭에 같이 올라탑니다. 그리고 가스실까지 함께 들어가 죽음 앞에 떨고 있는 아이들을 위해 기도해 주면서 함께 죽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 23절을 보시면 '임마누엘' 이란 단어가 나옵니다. 임마누엘이란 뜻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곧 '하나님께서 인간을 떠나지 않고 끝까지 사랑하신다. 끝까지 친구가 되어 주겠다.' 라는 뜻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코르작처럼 말이죠.
영원히 죽어 지옥에 떨어질 수 밖에 죄인들을 끌어 안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사랑한다는 말이 '임마누엘' 입니다. 영원토록 너희를 떠나지 않고, 친구 맺겠다는 표현이 '임마누엘' 입니다.
그래서 우리와 친구 맺기 위해서 오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친구가 되어 주시길 원하시는지 본문에서 찾아보며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 첫째로, 주님은 우리와 영원토록 친구 맺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시면 우리 주님의 이름은 '예수' 입니다. 영어로는 Jesus 인데, 원어와 가장 다르게 발음되는 것이 영어이름입니다. 히브리어 원어는 '예슈아' 라고 합니다. 한국말의 '예수' 와 거의 같다고 보면 됩니다. 스페니시 발음은 '이에수스' 라고 말합니다. 이것도 비슷한데, 영어만 달라요.
이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또 다른 이름이 있었습니다. 그 이름이 오늘 본문의 '임마누엘' 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라는 이름은 그의 존재를 나타내는 것이고, 임마누엘이란 이름은 그의 역할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도 각자 이름이 있습니다. 이 이름은 사람마다 그의 존재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역할을 나타내는 이름은 무엇입니까? '크리스천' 이라는 또 다른 이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역할입니다.
초대 교회시대에 믿는 자들의 별명은 '크리스천' 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믿는 자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했기에 그렇게 부른 것입니다.
원하옵기는 우리 꿈의교회 성도님들의 이름 뒤에 항상 ' 아! 그 사람은 진짜 크리스천이야' 라는 또 다른 이름이 붙기를 소원합니다.
'아! 그 사람이 크리스천이었어? 말도 안돼 어째서 그 사람이 크리스천이야! 나는 그 사람이 예수 믿는 다는 거 감쪽같이 몰랐네!' 라고 다른 사람들이 말한다면, 곤란합니다. 그런 분들은 또 다른이 없는 분들이에요.
예수님의 또 다른 이름은 '임마누엘' 이었습니다.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 하시고,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친구 맺으시고, 대화하시고 교제하시겠다는 이름입니다.
그렇게 우리와 친구를 맺으시기 위해서 주님은 하늘 영광 버리고, 2000년 전에 낮고 천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마태복음 28:20절에도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고 재차 말씀해 주시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들은 언젠가는 우리 곁을 다 떠나게 되어 있습니다. 부모도, 형제도, 아내도, 남편도, 자식도, 친구도, 또한 돈도, 명예도, 권력도, 언젠가는 다 우리 곁을 떠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실 분이 있습니다. 그분이 바로 임마누엘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하고 대화하도록 지음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하나님과 교제하지 않고 홀로 외롭게 살다가 지옥에 갈 것 같으니까, 이 사람들이 너무나 불쌍해서 하나님께서 친히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사건이 '성탄절' 사건입니다.
이 성탄의 계절에, 세상은 들떠 있습니다. 요란합니다. 당시에도 헤롯왕을 비롯해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찾기 위해 야단 법석을 떨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만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주님과 친구 맺기를 기다렸던 사람들에게 조용히 마구간으로 오셨어요.
우리 꿈의교회 성도님들은 이렇게 성탄절을 이해 했으면 좋겠습니다. 성탄절은 주님께서 하늘 영광 버리고 낮고 천한 이 땅에, 진실로 속 마음을 열어놓고 말한 친구가 없는 저와 여러분들과 영원토록 친구 맺기 위해서 오신 날이라고요.
- 두번째로 주님은 우리에게 어떤 친구가 되어 주시기 원하시냐면, 천국으로 인도하는 친구가 되어 주십니다.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만나고 싶은 사람도 만나지만 만나기
싫은 사람도 만납니다. 그러나 누구를 만난다는 것은 사실 나의 운명과 관계되는 심각한
사건인 것입니다.
부모자식간에도 만납입니다. 스승과 제자의 만남이 있고, 회사에서는 동료들간의 만남이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목사와 성도간의 만남이 있습니다. 나라에는 대통령과 국민들의 만남이 있습니다. 어떤 만남이냐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서로가 잘 만나야 합니다.
이번에 코네티컷의 총기 난사 사건을 보면서, 부모와 자식 간에도 저렇게 비극적 만남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영국의 한 부자집 소년이 스코틀랜드의 어느 시골로 놀러가 수영을 하다 발에 쥐가 나 익사할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 때 부근에서 일하던 농부의 아들이 그를 구해줬습니다.
영국소년이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에게 그 사실을 말하자 아버지는 그 시골소년의 소원이 무엇인지 알아오게 했습니다. 시골 소년의 소원은 의학공부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에 영국소년의 아버지는 그 시골소년이 의학공부를 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소년은 덕분에 의학공부에 매진해서, 노벨의학상을 받았습니다. 그가 바로 페니실린을 발견한 알렉산더 플레밍입니다.
또 그를 도와줬던 영국소년은 훗날 수상이 된 정치가 윈스턴 처칠입니다. 처칠은 2차 세계 대전 중 스탈린과 회담을 하러 소련에 갔다가 폐렴으로 죽음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는데 그때에 플레밍이 발견한 페니실린으로 완치할 수 있었습니다.
영국소년 처칠이 수영하다 쥐가 났을 때 시골소년 플레밍이 없었다면.....처칠수상이 폐렴으로 큰 고통을 겪었을 때 플레밍 박사의 페니실린이 없었다면.....이 두사람의 만남은 그야말로 운명적인 만남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아무리 아름답고 극적인 만남이라 할지라도 죄에 빠져 저주 가운데 있었던 우리의 인생이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그 사건만큼 중요한 만남이 있습니까?
그 예수님을 만나면, 생명을 얻습니다. 지옥가는 인생에서 천국가는 인생으로 팔자가 고쳐지는 만남입니다.
주님 만나 주님 따라가다 보면 그 마지막의 목적지는 주님 계신 천국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저와 여러분들을 주님의 나라로 인도하기 위해서, 이 낮고 천한 인간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 예수님은 우리와 영원히 친구 맺기를 원하십니다. 또 그 예수님은 우리를 영원한 주님의 나라로 인도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하시려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이렇게 이땅에 오신 주님을 우리는 반드시 만나야 하는데, 어떻게 만날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태어날 때,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한 부류는 동방의 박사들이었고,한 부류는 들에서 양치는 목자들이었어요.
동방의 박사들은 주님을 찾아 다닌 사람들이었고, 양치는 목자들은 맡은 일에 충성을 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주님을 찾으며, 있는 그 자리에서 충성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의 영원한 친구가 되어 주시고, 그 것도 모자라 우리를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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