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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의 창고/ 비전나리의 설교

징계와 회복 - 욥기 32:1-5 , 33:19-30

by Peartree 2012. 12. 26.

징계와 회복

욥기 32:1-5 , 33:19-30

 

지금까지 욥의 세 친구들이, 욥을 계속해서 정죄를 했습니다. 총 아홉번에 걸쳐서, '욥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지 못하다는 것' 을,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이해를 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욥도, 이 친구들에게 한치의 양보도 없이, '나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라고 하며, 계속해서 받아 치고 있었습니다.

사실, 총 9번에, 공박과 변론이 오고 갔지만, 결론이 나지 않은 것입니다.

 

결론이 나지 않은 이유를, 엘리후라는 사람이, 지금까지 다 듣고 난 다음에, 설명을 해 줍니다. 1절에 보시면, 욥은 계속해서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굽히지 않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나는 죄인이 아니라고 버티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 , 3절에 보시면, 욥의 친구들은, 욥의 말에 대답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정죄만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싸움이 끝이 나지 않는 것입니다.

 

옆에서 엘리후가 가만히 듣고 있다 보니까, 너무 답답한 것입니다. 왜 듣고만 있었냐면, 4절에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듣고 만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안되겠다는 것입니다. 무례하지만 끼어들어, 나도 한마디 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엘리후가 욥에게 첫 공박을 하는데, 앞에 세 친구들과는 다른 방법으로 접근을 한다는 거예요.

 

앞에 세 친구들은, 줄 곳 뭐라고 했냐면, '인과응보' 에 대해서 공박을 했습니다. '네가 의롭지 못하니까, 고통을 당하는 것이다. 무엇인가 하나님께 잘못한 것이 있으니까, 벌 받는 것이다.' 라는 식으로 욥을 몰아 부쳤습니다. 그래도 욥이 수그러들지 않으니까, 저번 시간에는 어떻게 했습니까? 없는 말도 지어내면서, '과부를 돌아보지 않고, 갈한 자에게 물도 주지 않고, 주린 자에게 먹을 것도 주지 않고, 형제의 물건을 빼앗았다' 고 하면서, 하지 않는 일을, 했다고 모함까지 했었습니다.

 

그러나 엘리후는 분명 달랐습니다. 수준이 한 수 위였습니다.

앞의 세친구는, 욥의 고난과 고통의 원인을 하나님의 징계로만 몰아갔습니다. 그런데, 엘리후는, 하나님의 징계를 통한 회복으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징계만 하신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징계를 하는 목적은,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히브리서 12:8절의 말씀대로, "징계가 없는 백성은 ,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라" 고 말씀하듯이, 사랑하기 때문에 징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엘리후는, 세친구와는 보는 관점이 달랐습니다.

 

19절을 보시면, "사람이 병상의 고통과 뼈가 늘 쑤심의 징계를 받나니" 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징계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25절을 보시면, "그런즉 그 살이 어린아이 보다 연하여져서 소년 때를 회복할 것이요" 라고 말합니다.

회복의 메시지까지 함께 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28절에도, "하나님이 내 영혼을 건지사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 하셨으니 내 생명이 빛을 보겠구나 하리라" 그래서 영혼을 지옥에서 건지시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고, 영원한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말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회복시키실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고통 스럽지만, 지옥에는 보내지 않는 하나님이지 않으냐? 이 고통이 지옥의 고통과 비교 할 수 있냐? 그러니까, 하나님께 감사해야 된다. 엘리후가 이 말을 하는 것입니다.

 

30절 보십시요. "그 영혼을 구덩이에서 끌어 돌이키고 생명의 빛으로 그에게 비취려 하심이니라"

 

이렇게 생명의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에게, 누가 화를 내겠습니까? 영혼은 지옥 구덩이에서 건지시는 하나님이, 생명의 빛을 주시려고 이런 고난과 고통을 허락하신다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이 엘리후의 말로 인하여, 욥은 생각을 달리 합니다. 그렇구나, 이 고통은, 지옥의 고통과 비교할 수 없지, 지옥에 가지 않는 것만 해도,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하나님께서 회복시키겠지! 설사, 회복시키지 않는다 할 지라도, 나에겐 영원한 생명이 있으니까, 잠시 잠깐이면, 없어질 인생, 그것도 하나님께 감사하자!

 

라는 생각이 들었을 거예요.

 

특이한 것은, 욥이 엘이후의 말에, 변론을 하지 않는 다는 거예요. 세친구의 말에는 꼬박 꼬박 반박했지만, 엘리후의 말에는 가끔 한마디 하면서도, 엘리후의 37장 까지나 되는 긴 연설을 다 듣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들을 만 하니까요. 생명을 말씀을 전하니까요.

 

우리도 세상에 나가서, 믿지 않는 사람들과, 또는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과 대화를 할 때, 싸움을 피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치셨으나, 싸매어 주시는 하나님' 이라는 회복의 메시지를 같이 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복음 전함을 잘 들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엘리후처럼, 지혜로운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