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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의 창고/ 비전나리의 설교

하나님을 보리라 - 욥기 18:1-21 , 19:1-6, 20-22

by Peartree 2012. 12. 26.

하나님을 보리라

욥기 18:1-21 , 19:1-6, 20-22

 

오늘은 욥의 두번째 친구, 빌닷의 두번째 공박입니다. 우리가 새벽에 욥기서를 연구하면서, 흥미로운 사실 한가지를 발견할 수 있는데, 대화의 강도가 점점 격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하나님께 용서를 구해 봐라, 그러면 혹시 하나님께서 회복시켜 주실지 아느냐?" 라고 하면서, 희망을 주는 대화도 오고 갔습니다. 그런데, 2회전에 들어서면서, 희망의 메시지가 보이지 않습니다.

오늘 18장 전체를 보시면, 온통, 저주의 말만 퍼 붙고 있습니다. 본문 3절을 보시면, 빌닷이란 친구가 욥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어찌하여 우리를 짐승으로 여기며, 부정하게 보느냐" 라고 말합니다. 상당히 화가 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를 개 돼지로 보느냐!" 이런 말입니다.

그리고는 그 다음서부터는, 온갖 안 좋은 소리를 늘어 놓습니다. 18:5절 부터는, 중간에 끊김이 없습니다. 문법적을 열거법이라고 하죠. "것이며, 것이며, 것이며" 무슨 말입니까? 화가 나서, 쉬지 않고, 단숨에, 저주를 퍼부은 것입니다.

 

19절에 보시면, "그는 백성가운데서 아들도 없고, 손자도 없을 것이며, 그의 거하던 곳에는 한 사람도 남은 자가 없을 것이라" 이라고 말합니다. 후손이 끊어질 거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당시로서는, 저주에 가까운 말입니다.

 

이런 빌닷의 공박에, 욥은 어떻게 반박하고 있습니까?

 

2-3절을 보시면, "너희가 내 마음을 번뇌케 하며 말로 꺽기를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 너희가 열번이나 나를 꾸짖고 나를 학대하고도 부끄러워 아니하는구나"

이제 나를 그만 좀 괴롭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욥기서를 연구하면서, 발견할 수 있는 또 다른 진리는, 말이라고 해서, 다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고난을 당하는 사람이 있으면, 다가가서 말로 위로를 합니다. 그런데, 꼭 말로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마음으로 위로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욥처럼 고난 당하는 사람이 있으면, 말없이 같이 있어주는것이 최고인 것입니다. 괜히 말로 위로한답시고, 상처를 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또 몸이 아픈 사람은 상처도 쉽게 받습니다. 오해도 쉽게 하기도 하죠.

 

지금 욥의 몸이 어느 정도로 아프냐면, 20절을 보시면, "내 피부와 살이 뼈에 붙었고 남은 것은 겨우 잇꺼풀 뿐이로구나" '피골이 상접했다' 는 말 들어보셨죠. 지금 욥이 그런 것입니다. 살 가죽이 뼈에 붙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살은 없고, 가죽만 남은 것입니다. 그리고 "잇꺼풀 뿐이로구나" 라고 말하는데, 치아도 다 빠지고, 잇몸만 남은 상태예요. 그래서 살아 있는 것이 기적인 것입니다. 음식이 있어도 잘 씹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얼마나 불쌍합니까? 이런 사람을 앞에 놓고, 세 친구들이 지금, 얼마나 말로, 욥을 괴롭히고 있습니까?

21절 보세요. 욥이 예전에는 반박이라도 했었는데, 이제는 그 반박도 할 힘도 없는것 같아 보입니다. "나의 친구야,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기라, 나를 불쌍히 여기라, 하나님의 손이 나를 치셨구나."

22절에,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처럼 나를 핍박하느냐 내 살을 먹고도 부족하냐?"

 

제발, 이제는 말로 나를 괴롭히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욥은, 이 고통에서, 건져주실 하나님을 확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욥기서에서, 19:25-26절이, 욥의 최고의 고백이라고 합니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영어 성경은, "I know that" 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나는 안다. 나를 구원하실 분이 살아계시고, 후일에, 이 땅위에 우뚝 서실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믿는다는 표현보다, 더 강한 표현입니다. 확신에 찼을 때, 우리는 '안다' 라는 표현을 씁니다.

 

이 엄청난 육체적 고통과, 친구들에 의한 심적인 고통이 말이 아니지만, 훗날에 회복시키실 하나님을 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욥의 믿음이었습니다.

 

보통 욥이 당하는 이정도의 고통이면, 하나님을 원망할 텐데, 욥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26절 보세요.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욥의 소원은 이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것.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하나님 뵙기를 소원하는 욥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꿈의교회 성도님들도, 하나님 뵙기를 소망삼고, 힘든 삶 가운데, 승리하시는 귀한 하루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