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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의 창고/ 비전나리의 설교

우리에게 가시가 존재하는 이유 - 고후 12:1-10

by Peartree 2012. 12. 25.

우리에게 가시가 존재하는 이유

고후 12:1-10

 

투산에는 Cactus 가 참 많습니다. 이 Cactus 의 특징은요, 가시로 덮여 있다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Cactus 가시에 찔려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찔려본 적이 없다면, 진정한 투산 사람이 아니예요. 투산에 산다고 한다면, 적어도, Cactus 가시에, 두 세번은 찔려봤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아직, 투산 사람이 아닌가 봅니다.

 

그런데 여러분, 선인장이 왜 가시로 덮여 있는지 아십니까? 이 선인장 속에는 수분이 많이 있다고 해요. 그래서 사막의 초식동물들에게 표적이 되는데, 선인장 겉에 있는 가시는, 그런 동물들이 선인장을 갈아먹지 못하도록, 보호하는 기능을 한다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는, 우리 Kevin이랑, Bobcat 이야기를 하다가, 선인장 위에 올라가 앉아 있는, Bobcat 을, 사진으로 본적이 있습니다. 참 대단한 동물같지 않습니까? 어떻게, 저렇게, 온통 가시가 덮힌, 선인장 위에 올라가, 태연하게 앉아 있을 수 있을까?

'아마 우리도 저 비밀을 알면, 절대로, 가시에 찔릴 인은 없을 것이다.' 란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 우리 사람들에게도, 선인장처럼, 가시가 있다는 거 아십니까? 그래서, 그 가시로, 사람들을 찌르고, 마음에 상처를 주고, 시험에 들게 만든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 가시가 나를 찌르려고 할 때마다, Bobcat 처럼, 찔리지 않고, 오히려 그 가시 위에 앉아 있는, 비법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존 올트버그' 라는 사람이, '고슴도치 딜레마'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에 보시면, 이런 글이 있습니다.

겨울이 닥치자 추위에 떨던 고슴도치 두 마리가 고민을 합니다.

'서로 가까이 붙으면 체온을 나눌 수 있지 않을까…….`그러면서, 서로 가까이 다가가지만, 이내, 상대방 가시에 찔려 상처를 입고, 다시 떨어집니다. 그러자, 또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온 몸이 얼어붙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 작가는, '고슴도치는 외로운 동물이다. 고슴도치는 떼지어 다니는 법이 없다. 늑대와 사자와 뱀들도, 서로, 떼를 지어 다니지만 고슴도치는 함께 다니는 법이 없다. 왜냐하면, 그 가시로 다른 동료를 찌르기 때문이다.' 라고 썼습니다.

 

여러분 혹시, 내 주위에, 함께할 친구가 없다면, 혹시 나에게 사람을 찌르는 가시는 없는 지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북미산 고슴도치는 몸에, 약 3만6천개의 가시를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요. 보통 1인당, 3만개가 넘는, 마음의 상처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 상처는, 다 다른 사람에게, 찔려서 받는 상처라는 것이죠.

 

여러분 ! 혹시 여러분의 고슴도치는 누구입니까? 나를 찌르고, 내 마음을 힘들게 하는 고슴도치가, 혹시 같은 교회 안에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같은 직장에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집 식구입니까?

어떤 분은, 목사님, 저에게는 고슴도치가 없습니다. 제가 고슴도치입니다. 그래서 저는 찌르기만 합니다. 라고 하시는 분도 있을지 몰라요.

어찌됐든, 누가 고슴도치가 됐든, 어느 한쪽은, 그 가시에 찔려, 힘들어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가시를 우리에게 허락하시는가? 생각해 보신적 있으십니까?

 

이 가시 같은 이웃만 없으면, 이 가시 같은 질병만 없으면, 이 가시 같은, 가난만 없으면, 내 인생 괜찮게 살 수 있을 텐데, 라고 생각해 보신적 없으십니까?

 

그래서 오늘은, '우리 인생의 가시'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 말씀에서 살펴 보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시면, 가시에 찔려 살아가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바울입니다. 바울이 가지고 있는 가시는 어떤 가시였냐면, 질병이었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선천청 말더듬이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또 다른 설은, 심한 안질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날 때, 빛이 너무 세서, 그때부터, 시력이 급격히 떨어지고, 눈에서는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또 다른 설은, 간질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그래서 의사인 누가가 바울이 죽을 때까지, 함께 있으며 간호해 준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이 세가지 중에 어느 것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바울은 육체의 가시로 인해, 복음을 전하는데, 상당한 제약을 많이 받았을 것입니다.

 

그럼, 바울이 가시를 극복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는지 살펴 보기를 원합니다.

 

  1. 첫째로, 바울이 그의 가시를 극복하기 위해서, 그 가시를 숨기거나 부끄러워하지 않고 드러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8절에 보시면,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이 편지는 고린도 교회에게 쓴 편지입니다. 지금 사도바울이, '나는 주님께, '세번씩' 이나 나의 질병을 고쳐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이 기도제목을 쓸 때에는, 고민 많이 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질병에 대한 기도제목을 나누므로 해서, 내가 질병을 가지고 있는 것을 몰랐던 성도들까지 알 수도 있었기 때문이예요. '아무 말 하지 않으면, 영원히 비밀로 부쳐지는 건데,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필요 있나,' 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자기가 가진, 그 질병의 가시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여실히 드러내며, 인정합니다.

여러분, 치료의 근본은, 그 병을 인정하는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암에 걸린 사람이, 자기가 병에 걸린 사실을 알기 전까지, 절대 병원에 가지 않습니다. 알코올중독자가, 중독에서 빠져 나오려면, 본인이 중독인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나는 멀쩡하다고 하면, 절대 끊지 못합니다.

가정도 마찬가지 입니다. 부부간에, 위기가 오면, 서로, 차이점을 인정하고, 극복해야지, 나는 아무 문제 없다고 하면, 위기를 극복할 수가 없어요.

 

세상에는 예수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이 구원을 받으려면,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자기가 죄인 인 것을 인정'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자기 영혼이 구원받기 위해서, 주님께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나는 아무 죄가 없다고 하면, 절대 예수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에게 가시가 있다고 인정하는 것이, 치료의 첫걸음입니다.

 

'다른 사람이 알면, 창피합니다.' 라고 하며, 감추고 있으면, 그를 위해서 기도해 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옛말에, '병은 자랑하고 보아야 한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좀, 알아야 기도 한마디라도, 더해주죠.

 

재작년만 해도, 성도님들이 저에게 와서, '목사님, 무슨 문제가 있는데, 기도해 주십시요.' 라는 말을 잘 하지 않았습니다. 문제가 없던 것인지, 아니면, 목사의 기도를 과소평가해서 그런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런데 요즘은, 우리 성도님들이, 기도제목을 저랑 많이 Share 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나누는 것입니다.

문제를 공유하는 것입니다. 가시를 인정하고,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때 부터, 치료가 시작되는 거예요.

 

가룟유다의 가시는 '탐심' 이었습니다. 마약에 가룟유다가 주님께 나와, 주님 저의 가시는 '탐심' 입니다.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예수님 저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 라고 했더라면, 아마도 상황은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가시를 뽑으려면, 먼저는, 그 가시를 인정하고, 드러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가시를 위해서, 함께 기도하며, 극복해 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1. 두번째로, 바울이 자기의 가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 가시를 자랑하고 기뻐했습니다.

 

본문, 9절을 보시면, 주님께서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라고 하시니까, 바울이 뭐라고 하냐면,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니, 간질병이 자랑할 일입니다. 안질이 자랑할 일이고, 선천적 말 더듬는 것이 자랑할 일입니까?

사람의 생각으로 보면, 자랑할 일이 전혀 아니죠.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자랑할 만 한 일이었습니다.

 

선천적 말 더듬는 나를 하나님께서, 복음의 사도로 세웠다는 것이, 자랑할 일이 아닙니까?

눈의 시력이 떨어지고, 앞이 잘 보이지도 않지만, 그래서 어쨓거나, 그 눈 가지고 복음 전하러 다닌 다는 것이 자랑스럽지 않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그에게 평생 가시인, 이 질병을 자랑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질병으로 하여금, 바울이 더 겸손하게 하나님을 섬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가시가 , 바울을 만들어 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여러분 여러분의 가시를 꼭꼭 숨겨두시겠습니까? 숨겨두면, 겉으로 보기에, 괜찮아 보일 수 있지만, 치료는 받지 못합니다.

 

한국기독교의 거장이라고 한다면, 고 한경직 목사님을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평생, 청빈과 겸손의 삶을 산 성자 같은 분이시죠. 그런 한경직 목사님이, 그렇게 훌륭한 삶을 살 수 있었던 이유는, 일제시대 때에, '신사참배' 였습니다. '가시' 였습니다.

 

당시에, 신사참배를 하지 않고, 순교를 당하신, 주기철 목사님 같은 분도 계셨지만, 거의 대부분의 목사님들은, 이건, 시대가 그러니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이다.' 라고 하며 '우상숭배가 아니다' 라는 해석을 하며, 그리고는 거의 다가, 천황에게 절을 했습니다. 그때, 고 한경직 목사님도, 천황에게 절을 했습니다. 씻을 수 없는 과오를 범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그의 평생의 '가시' 였습니다. 이 '신사참배' 생각만 하면, 가슴을 찌르는 거예요. 마음이 너무 아픈 것입니다.

 

꽁꽁 묻어두고 싶었죠. 남이 모르게 말이죠. 그러나, 그분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한 목사님 가는 곳 마다, '저는 신사참배를 했습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라고 하며, 자랑아닌 자랑을 하고 다녔습니다. 사실, 자랑이겠습니까? 자랑 할 것이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 일로, 나를 더 겸손하게 만드니, 그것이 자랑이었던 것입니다.

 

1990년 종교계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템플턴상' 수상소감에서도 한경직 목사님은, 세계의 언론이 보도를 하는데도 여지없이, "저는 신사참배를 했습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라고 말해서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여러분들의 가시는 무엇입니까?

건강이상입니까? 신체적 결함입니까? 가난입니까? 아니면, 모난 성격입니까? 중독입니까? 우울증세 입니까? 용서하지 못하는 쓴뿌리 입니까?

 

제가 지금 열거한, 모든 가시들은, 자랑할 만한 것은 아니죠.

그러나 바울은 뭐라고 말씀합니까? '내가 약할 때에 곧 강함이라'

이런 가시들로 인하여, 내가 약한 것 처럼 보이지만, 주님은 이러한 것들을 통하여, 나를 더욱 강하게 하시고, 겸손하게 만드시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바꾸실 거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약한 것들을 자랑할 만 하죠.

 

여러분, 우리에게 가시가 존재하는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더 강하게 만드시기 위해서 가시를 주신 거예요.

 

사도바울이, 선천적, 말더듬이었다고, 전도를 하지 못했습니까? 극복하고 더 잘했습니다. 눈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전도를 다니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유럽 전역을 세바퀴나 돌았습니다. 걸어서 말이죠.

만약에 사도바울이 간질이었다면, 복음전하다, 간질로 쓰러지면, 그만 멈췄을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쓰러져도, 또 일어나, 설교하고, 쓰러져도, 또 일어나 설교했을 거예요.

주님은 이렇게, 강하게 만드시기 위해, 우리에게 가시를 허락하시는 거예요.

 

교회 안에도, 나를 찌르는 가시교인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때마다, 누가 더 잘 찌르는지 한판 붙어 보겠습니까? 성경은 그렇게 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바울처럼, 그 가시교인도 나에게 유익함이라. 라고 고백하셔야 한다는 거예요.

 

몇 년 전에 돌아가신, 고 이중표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분은, '별세목회' 를 만드신 분입니다. 별세목회란 ? ' 내가 죽어야, 예수님이 산다' 는 목회철학입니다. 이분이, 젊었을 때, 어느시골교회로 부임을 하게 되었는데, 그 교회에 가시교인이 있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 기도했다고 합니다. "주님, 저 가시 교인 때문에 목회를 못하겠습니다. 설교도 찌르고 매사에 찌르니 너무 아파서 목회가 안 됩니다. 저 교인은 지금까지 수많은 목사들을 찔러서 교회를 떠나게 했고 저도 견딜 수 없습니다. 저 묵은 가시를 다른 데로 보내 주시옵소서."

그때 주님이 말씀하시는데,

"종아, 그가 갈 데가 없다. 그 가시를 누가 받아 주겠냐?" 라고 하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 그러면 그 늙은 가시를 천당으로 일찍 데려가 주옵소서."

그러자 주님께서, "아직 때가 안 되었다."

"주님, 그러시면 그 가시를 꺾어 주옵소서. 그 못된 버릇을 고쳐 주옵소서."

그러자 주님께서, "나도 못 고치겠다. 나도 그 가시는 고칠 능력이 없다." 그러시는 거예요.

그래서 이 목사님이, "전능하신 주님, 병든 자를 고치시던 그 능력으로 고쳐 주옵소서."

그러자 주님이, "나는 병든 자도 고칠 수 있었고, 죽은 자도 살릴 수 있지만, 가룟 유다는 못 고치고 도리어 내가 죽었다. 너도 고칠 생각 말고 너나 죽을 생각을 해라."

 

그때 이 목사님이 깨닫고, '별세목회' 를 시작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남에게 난 가시 뽑아 내려고 하지 마십시요. 내가 죽으면, 아픔도 느끼지 못합니다. 내가 살아 있어서, 그 가시에 찔리지 않으려고, 싸우고 난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꿈의 교회 성도여러분,

 

내안에 가시가 보이십니까? 그러면 감추지 마시고, 드러내십시요. 그리고 그 가시를 자랑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자랑하시다 보면, 그 가시로 인하여 어느새 변화되어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서 가시가 보이십니까?

그러면, 그 가시, 꺽어버리려고 애쓰지 마십시요.

내가 살아 있어서, 고통을 느끼는 것입니다. 내가 죽으면, 아무리 찔러도 아프지 않습니다. 그러면, 찌르다가 말게 되겠죠.

 

그래서, 바울처럼, 약한 것이 강하게 되듯이, 여러분의 가지고 있는, 그 가시를 통하여 복이 되는 역사가 이루어 지시길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