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한자를 찾으시는 주님
요한복음 5:1-9
피에르 반 파센이 쓴 '우리 생애의 날들' 이라는 책에 보시면, 그리스도인의 위선적 행위를 묘사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프랑스 '보우그'라는 마을에 '우고린'이란 본성이 착한 곱추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버지 얼굴을 한번도 보지 못했고, 어머니는 술 주정뱅이였습니다. 그를 보살피는 사람이라곤, 누이가 한 명 있었는데, 그 누이 마져, 어느 날 도둑이라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게 되었습니다. 얼마 후 '우고린' 의 누이는 감옥에서 나오지만, 쉽게 직장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또, 설상가상으로 불구인 동생이 병석에 눕게 되자, 그녀는 몸을 팔아 동생의 약값을 대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우고린' 이 장터에 나갔다가, 몰지각한 군중들에게 둘러싸여 조롱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 군중들은, 이 '우고린' 에게, '너의 누이는 몸을 파는 여자라고 하면서,' 놀리고 조롱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나이 많은 신부가 와서는 사람들을 물리치고, '우고린' 구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우고린' 은 모멸감과 치욕을 참을 수 없어, 강에 뛰어 들어 자살을 하게 되죠. 그리고는 그의 누이도, 동생을 따라가겠다고 하며, 권총으로 자살을 합니다.
그들 남매의 장례식 때 많은 사람들로 교회가 꽉 찼습니다. 신부는 강단에서 이렇게 설교하면서 통곡을 합니다.
"기독교인들이여! 생사의 주관자이신 주님께서 심판날 나에게 '네 양이 어디 있느냐?' 고 물으시면, 저는, 아무말 하지 않겠습니다. 주님이 두 번째로 '네 양이 어디 있느냐?' 또 물으셔도 나는 주님께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세 번째로 '네 양이 어디 있느냐?' 고 주님이 물으시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그들은 양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이리떼였습니다!' 라고….
기독교인들조차, 약자에 대해서, 회피하고 있는 현실을 고발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 주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고, 병들고 죽어가는 영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 노 신부의 설교는, 경종을 울리는 메시지가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도, 이런 '우고린' 같은 한 사람이 나옵니다. 그의 이름은 알 수 없지만, 38년된 병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당시에, 그 사람을 부를 때, 그의 이름을 알 수 없어, 그냥, '38년된 병자' 라고 불렀을 지도 모릅니다.
자기 이름을 들어본지 하도 오래되서, 이름조차 잊어버렸을 것 같은 오늘 이 한 병자……
옛말에, '긴 병에 효자 없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병을 오래 앓고 있으면, 가족들 조차, 돌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아마도, 병자는 38년의 오랜 투병생활로 인하여, 가족들에게도, 버림 받았을 지도 모릅니다.
그 긴 세월 동안에, 병을 고쳐 보려고, 많은 돈도 허비했을 거예요. 그러면서, 친구들도 하나 둘, 떠나고, 남은 거라곤, 깔고 앉아 있는, 매트가 전부였을 거예요.
소망이라곤, 전혀 없는, 삶의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는 병자였지만, 그에게 단 한가지 실락 같이 붙잡고 있는 희망이 있다면, '베데스다 연못' 이었습니다.
2절보시면, 양문 곁에, 베데스다 연못이 있었는데, 이 양문은, 말 그래도, 희생에 쓰일 양들을 들여오는 문이였습니다. 그 옆에 베데스다 연못이 있었는데, 이 연못도 그렇게 깨끗한 연못은 아니었습니다. 양들을 들여 오다가, 그곳에 양들을 씻기곤 했던 곳이었습니다.
이렇게 깨끗하지 않는 연못에 환자들이, 왜 모여 들었냐면,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물이 한번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낫는다는 소문이 나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병자들이 모여 들었는데, 이 38년 된 병자도 소문을 듣고, 그곳에서 기다린지가, 어느덧 38년이 지난 것입니다.
어쩌면, 이 병자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사실 우리도 이 병자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습니다. 철저히 파괴 되어, 소생 불가의 인생이 우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만나고, 새사람이 된 것이죠. 주님을 만나고, 삶이 바뀌고, 주님을 만나고, 소망을 가지고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럼, 오늘 이 38년 된 병자가 병 고침을 받았는데, 어떻게 주님께서 고쳐 주시는지 살펴 보기를 원합니다.
- 첫째는, 친근하게 물으시며 찾아오신 예수님께서 고쳐 주셨습니다.
여러분, 혹시, 2000년에, 예수님의 모습은 어떠하셨는지, 한번 상상해 보신적 있으십니까? '나사렛 예수' 라는 영화를 보시면, 예수님은, 미국 사람같이 생기셨습니다. 코가 뼈쪽한 잘생신, 미국 배우 같이 말이죠. 그런데, 사실, 정통 유대인들 보시면, 지금의 팔레스타인 사람들 처럼, 피부는, 동양 사람보다, 더 검게 그을린 피부고, 머리카락도, 노랑머리가 아니라, 우리처럼, 검은 곱슬 머리에 가깝다고 합니다.
거기 까지는, 이해를 하겠는데,
그러면, 예수님이 행동은 어떠 하셨는지, 상상해 보셨습니까? 근엄한 한국 양반 같은 행동을 하신 것 같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니까요…아니면, 30살의 청년이었기 때문에, 혈기 왕성했습니까?
찰스 쉘던이란 분의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라는 책에 보시면, 예수님은 겉으로 보기에, 하나님이 아들처럼, 근엄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어렸을 때부터 목수의 아들로, 시골에서 자랐기 때문에, 근엄함은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종교지도자들과 자주 충돌하였고, 때로는 그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 이라고 하시고, '성전을 채찍으로 엎으시는 것' 만 봐도, 근엄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백성을 사랑하는 인자한 모습은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라고 말합니다.
빌라도의 보고서를 보시면, 당시의 빌라도가, 예수님을 유심히 관찰하고 기록한 글입니다.
거기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30세 가량으로 보였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그렇게도 마음을 잡아끄는 평온한 얼굴을 본 일이 결코 없었습니다.
이 젊은이는 선동적이거나 반항적인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한번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들은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음이 가득하다."
이런 예수의 오만한 언행에 대한 항의가 날마다 총독청에 줄을 이어 들어왔습니다.
이런 자료들로 보아, 예수님께서는 단호하신 분이였던 같습니다. 불의와는 타협하지 않는, 젊은 혁명자였던 거예요. 그러면서, 불쌍하고, 병든 자들에게는 한 없이, 약하시고, 사랑을 베풀어 주시는 주님이셨던 것입니다.
오늘 6절을 보시면, 38년된 병자에게 예수님께서 다가가셨습니다. 세상에 그 어떤 사람도 거들떠 보지 않는 병자들 틈에서, 그리고 저 한 구석에서,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세상에서 가장 연약해 보이는 한 인간을 주님은 놓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이나 되니까, 찾으시죠. 우리들 눈에 이런 사람이 눈에 들어오겠습니까? 일부러 피하지 않으면 다행이죠.
그런데, 우리 주님은 다가가셔서, 부드러운 음성으로 이렇게 묻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성경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물어본 사람이 여럿 있습니다. 그 때 사람들은, 거의 다가 대답을 잘 했습니다. 정답에 가까운 말을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네가 믿느냐? 네, 내가 믿나이다.' 라고 답하기도 하고, 또 백부장이 하인을 고쳐 달라고 할 때도, 백부장은 '그냥 오시지 말고, 말로만 하면 낫겠나이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실 때도, 나사로의 누이들이, '주님이 여기 계셨더면,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겁니다.' 라고 말하죠.
참, 적재 적소의, 믿음의 답변을 하는 것을 보면, 말도, 믿음의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느낍니다.
같은 말이라도, 참 잘해야 합니다.
믿음이 없는 말은 입밖에도 내지 말아야 해요. 가령, 이런 말입니다. '안될꺼야, 난 왜 이렇게 안되지, 재수가 없어, 또 실패 할꺼야, 소용없어, 시간 낭비야, 그게 가능하긴 한거야. 포기해, 등등,
이런 말들은 마귀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들이예요.
그런데 오늘, 정말, 이 38년된 병자, 38년동안, 병을 앓느라, 사실, 마음의 여유도 없고, 믿음도 없고, 전혀 희망도 없었을 거예요. 그에게 오로지 희망이 있다면, 물이 움직인 후에, 누가 나를 업어, 저 연못에 풍덩 빠뜨려 주는 것이 희망이었을 거예요.
7절 보시면, 이 병자의 대답은, 사실, 10점짜리 대답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 라고 물었으면, 어떻게 대답해야 맞습니까?
네, 낫기를 원하나이다, 저를 불쌍히 보시고, 병을 고쳐 주옵소서, 내가 믿나이다' 이렇게 대답하면, 100점짜리 답변이죠.
그런데 기껏 대답한 것이, "나를 물에 넣을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이 병자는, 연못이 자기의 병을 고쳐 주는지,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100점짜리 대답을 원한 것이 아닙니다. 이 병자가 비록, 10점 짜리 대답을 했을 지라도, 고쳐 주려고 맘 먹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병자들 가운데, 그 병자를 찾아 오셨던 거예요.
이것이, 주님의 사랑이고, 주님의 인자한 모습입니다. 강한 사람들에게는, 단호하고, 일체의 용납이 없었지만, 약한자에게는 한없이 인자한 주님이셨기에, 오늘 주님의 그 사랑 때문에 이 병자가 고침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 두번째로, 이 38년 된 병자가 고침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끈기와 열심이 있었습니다.
보세요. 38년동안, 한번도 못에 들어 가 본적이 없는 병자였습니다. 그러면, 사실상 불가능 한 것입니다. 어지간히 끈기 있는 사람도, 몇 년 버티다, 가망성이 없으면 포기할 거예요. 그런데, 이 병자는, 38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6절에 예수님께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 물었을 때 도, 전혀 포기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라고 말하죠. 누군가 나를 도와 주기만 하면,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은혜를 받습니다. 끈기가 있어야 합니다.
야곱처럼,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라고 하며, 붙자고 늘어져야 복을 받습니다.
이 병자도 보시면, 굉장한 노력가 입니다. 물이 동할 때 마다, 한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으니, 얼마나 낙심했겠습니까? 그러나 자포자기하지 않고, 어쩌면 안된다는 거 알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주 유명한 영화죠. 빠삐용이라는 영화를 보면, 주인공이 누명을 쓰고, 종신형을 선고 받습니다. 그리고 그 주인공은 기회만 생기면, 탈출하려고 하죠, 그때마다, 형을 점점 가중되죠. 나중에는, 무인도 섬으로 보내지는 되, 그곳에서도, 틈만 있으면, 탈출할 연구를 하고, 급기야는 섬을 탈출하게 되죠.
오늘 이 38년된 병자의 이야기는, 가만히 생각해 보시면,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영원한 죄에 의해서, 살 가망이 전혀 없는 우리들을, 주님은 다른 병자들을 제치고, 저와 여러분들을 찾아 오셨습니다.
찾아 오신 주님 앞에, 우리는 신앙의 고백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죠. 그런데도, 주님은 고쳐 주시려고 마음먹고 찾아 오셨습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들이, 그렇게 허물이 많더라도, 주님이 여전히 사랑하시는 이유입니다.
그 주님 앞에, 우리가 보여야 할 것은, 이 병자처럼, 포기하지 않는 신앙입니다.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저 천국에 들어 갈 것이라는, 소망을 버리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만 먹고, 살아가신다면, 결국에는, 내가 깔고 앉아 있었던, 죄의 누더기를 벗어 던지고, 천국 문을 향햐여, 뛰어가는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설교자의 창고 > 비전나리의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내가 유다 성으로 올라 가리이까” - 사무엘하 : 2:1-7 (0) | 2012.12.25 |
|---|---|
| 2012년 4월 22일 주일 예배 (야외 예배)설교: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 시편 8편 (0) | 2012.12.25 |
| 잊지 말아야 할 회개 - 사무엘상 31:1-13 (0) | 2012.12.25 |
|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 사무엘상 30:1-15 (0) | 2012.12.25 |
| 종말의 신앙 - 마가복음 13:14-27 (0) | 2012.12.25 |
| 불신앙의 죄 - 사무엘상 28:1-14 (0) | 2012.12.25 |
|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 사무엘상 26:1-21 (0) | 2012.12.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