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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의 창고/ 비전나리의 설교

너무나 현실적이었던 제자 빌립 - 요한복음 1:43-46

by Peartree 2012. 12. 25.

너무나 현실적이었던 제자 빌립

요한복음 1:43-46

 

40대 중년 한 그리스도인이 노모님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최근 주일 아침 교회 가기가 싫어진다는 겁니다. 그 이유는 3가지입니다.
① 아침에 일어나기가 힘이 들고. ② 요즘 따라 장로님의 기도가 너무 길어서 짜증스럽고. ③ 봉사자들이 준비없이 봉사하는 바람에 전체 예배 분위기가 안 살아서 교회 가기 싫다.
노모님이 회답을 보냈습니다. 그래도 교회에 가야 한다. 그 이유는 3가지다. ① 주일 아침 예배 드리는 것은 선택이 아니고 명령이기 때문이다. ②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배하는 것은 라이프 스타일이지 네가 선택할 일이 아니다. ③ 그래도 네가 교회 담임목사인데 가야지 안가면 되겠느냐.  
교회를 담임한 담임목사도 가끔은 교회가기 싫을 때로 있나봅니다. 교회의 부정적인 면만 보면 그럴수 있습니다. 교회의 안좋은 면만 보기 시작하면 목사라도 시험에 들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읽은 빌립에 관한 기사는 복음서에서 요한복음에만 네번 기록하고 있는데, 오늘 읽은 본문의 말씀을 제외하고 나머지 세번은 빌립에 관하여 부정적인 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자 빌립에 대해서 읽다보면 제자라는 사람이 그럴수 있나? 시험에 들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 대해서 살펴 보시면 우리에게 위로를 주는 것이 있습니다. 제자도 이렇게 약할 수도 있구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도 늘 부정적이 측면만 있는 것이 아니라 괜찮은 면도 있음을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읽은 본문 말씀을 통하여 발견 되어집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장단점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빌립의 성품을 주님은 어떻게 더 발전시키기를 원하시는지 빌립에 관하여 몇가지를 찾아 은혜를 나누고져 합니다.

 

  1. 개인전도에 탁월했던 제자였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시면 빌립이 예수님을 만나고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가장 친한 친구 나다나엘 찾아가죠 그리고는 " 율법과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라" 라고 말하죠, 그러니까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대답합니다. 그러니까 바로 빌립이 뭐라 말합니까? 그 유명한 대답 46절 "와 보라" "come and see" 주님께로 초청하는 메시지가 아주 단순합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대사 같지 않습니까? 43절 보세요 "나를 쫒으라" "Follow Me" ……간단하게 구원초청하는 내용입니다.

 

보통 MBTI 를 통해서 기질 검사해보시면, 거의 유사하게 나오는 통계가 있는데, 부부의 성격은 비슷한 사람이 거의 없다라는 것입니다. 정 반대의 성향을 띄는것을 많이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친구는 그렇지 않습니다. 친구는 유유상종입니다. 비슷한 사람끼리 어울리며 친구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번주에 저와 제 아내가 MBTI 검사를 한지가 오래되서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해서 함께 같이 검사를 해 봤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저와 제 아내는 40가지 문항중에 2-3가지 제외한 나머지가 거의 같은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래서 발견한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싸우지 않고 친구처럼 사는구나 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야기를 하다보니 부부자랑이 되어 버렸습니다. 상처받으셨으면 용서하십시요. 이번에 성경공부 시간에 성격이 아주 좋은 분을 발견했습니다. 주복미 집사님이신데, 저와 똑같이 나왔습니다. 성격이 좋으시다니까 여러분중에 동의를 하지 않으신다는 눈빛을 하시는 분들도 있는것 같은데, 뭐 상관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빌립과 나다나엘이 거의 기질이 같은 친구들이였습니다. 너무나 현실적이고, 계산적인 두사람이었습니다. 이성으로 믿어지지 않으면 도대체 믿지 못하는 성품의 친구들이었습니다. 논리적으로 과학적으로 객관적으로 증명이 되야만이 믿는 친구들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논리적으로 대화를 통해서 전도 하려고 접근하면 불가능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을 부르실때, 제자들의 기질을 파악해서, 거기에 맞게 그들을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베드로 같은 사람은 다혈질이죠. 이런 사람은 따르라 하면 당장 따릅니다. 그러나 아무생각없이 주님을 따를것 같은 베드로에게 의미를 부여해 주며 생각하게 만들며 그를 부르셨다는 것입니다.주님은 베드로의 이름을 바꾸어 주시고 그의 본질적인 부분을 건드리시며 베드로를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또 안드레같은 경우는 "무엇을 구하느냐?" 이렇게 화두를 던지고 대화를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안드레를 부르시죠. 그런데 이 빌립같은 경우 주님은 거두절미 하고 나를 쫒으라하고 부르십니다. 그리고는 끝입니다. 주님은 빌립을 부르실때 왜 네가 나를 따라야 하는지, 왜 내가 메시야고, 하며 논쟁적으로 나가면 이러한 기질에게는 안되단는 아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런사람에게 한마디로 부르셨습니다. 그때 빌립이 아무소리 안하고 주님을 따르죠

 

이자리에 앉아계신 여러분들도 내가 왜 어쩌다가 여기에 앉아있지? 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여러분들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분들에게는 이렇게 접근하시고, 저런 분들에게는 저렇게 접근하시고 다루어서 여러분들을 이자리에 불러 모으셨다는 것입니다.

 

나다나엘의 기질을 누가 잘 알겠습니까? 친구 빌립입니다. 자기와 같은 기질을 갖고 있는 그에게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화두를 던지고 논쟁을 하려고 하는 나다나엘을 향하여 논쟁하지 않고 "와 보라" 한마디로 부를 대 나다나엘 따라 왔다는 것입니다. 빌립이 전도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도 지혜롭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1. 그러나 믿음으로 보는 눈이 약했던 제자였습니다.

     

요한복음 6장 보시면 큰 무리가 주님을 따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빌립을 시험하고져 빌립에게 묻습니다.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그때 빌립이 각 사람에게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200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합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이런 빌립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은 계산에 밝고, 합리적이고, 분석적입니다. 이것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의 대답속에는 치명적인 오류가 하나 발견되어 집니다. 그는 이러한 주님의 질문에 "주님 저의 머리로는 답이 나오지는 않습니다. 주님이 이 문제를 해결해야 되겠습니다" 라고 대답했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무 계산적인 것은 때로는 미련한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서울의 이태원에 가게를 차린 40대 남자가 장사가 되지 않자. 간절히 기도 드렸다. "월수입이 천만원이 되면 200만원을 헌금하겠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다음달부터 갑자기 장사가 잘 되어 그는 800만을 벌었다. 그러자 이사나이는 하나님께 다시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정말 대단하십니다, 먼저 당신의 몫을 떼어놓고 주시다니요". 라고 했더랍니다.

 

우리가 계산하지 않고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때 주님은 그곳에서 역사하십니다.

빌립의 이렇게 계산하고 있을대, 안드레가는 5병이어를 가진 한 소년을 주님께 데리고 와서 주님께서 하실것을 믿음으로 바라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3장에 보시면, 아브라함의 목자와 롯의 목자가 서로 소유가 많아 다툴 때 아브라함이 롯을 불러 다투지 말고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하리라 하고 선택권을 롯에게 줍니다. 롯이 눈을 들어 요단을 바라보니 물이 넉넉하고 여호와의 동산같이 택하여 그리고 갑니다. 그런데 그곳이 소돔과 고모라 성이 되는줄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의 약속하심을 믿고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장막을 쳤다는 것입니다. 결국에는 롯은 그곳에서 자신의 아내는 소금 기둥으로 변하고 재산하나 건지지 못하도 도망쳐 나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거부가 되는 축복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때로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 인것으로 착각하고 그것을 택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보이는 것 말고 보이지 않는 약속을 믿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1. 오래 믿어도 주님을 알지 못했던 제자였습니다.

     

요한 복음 14장 7절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그때 빌립이 툭 텨나오면서 "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이 말을 들으신 예수님의 반응은 어떻겠습니까? 억장이 무너지셨을 겁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3년 6개월 훈련을 마치고 다락방에서 마지막 수료식이 있는 자리입니다. 이제는 훈련이 거의 다 끝난 상태 입니다. 그런데 이 빌립이 전혀 믿음이 없는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이 질문을 차라리 요한 복음 1장에서 처음 예수님을 만나는 장소에서 했으면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산전수전 다 겪고 이제 와서 하나님을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이해가 가십니까?

 

그때 주님께서 9절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그토록 교회를 오래 다녔는데 왜 나를 알지 못하느냐 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있었던 사건인데, 몇년전에 한국의 순회선교단 대표이신 김용의 선교사님께서 워싱턴 DC 에서 집회를 하고 있었을때 일화입니다. 한주간 집회를 하시는데, 그 지역에서 정말 덕망이 있으시고, 신앙의 연륜도 있고, 교회에 큰일도 많이 하신 장로님이 계시는데, 중병에 걸려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장로님이 며칠전부터 아무도 안 만나고 가족도 보기싫어하고 성격이 난폭해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김용의 선교사님보고 집회가 끝나면 심방가자고 부탁해서 심방을 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가서 장로님께 말을 시키는데, 말을 하지 않고 돌아 눕더라는 것입니다. 입만 꾹 다물고 온갖 인상을 보기 흉할 정도로 일그러져 있더라는 것이예요. 그래서 그 장로님의 구원상담을 하기 위해서 "장로님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것을 믿으시죠" 그러자 그 장로님은 벌떡 일어나더니 "예수고 뭐고 다 귀찮소"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사건이 워싱턴 DC 일대에 엄청난 쇼킹한 사건이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한평생을 예수님 없이 자기만 위해 살다가 임종 직전에 주님 영접하고 천국에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평생을 주님을 믿는다 하며, 충성하며, 섬겼던 사람이 마지막에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며 지옥으로 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목격한 김용의 선교사님이 이 일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고민에 빠졌다는 것입니다. 즉, 다시 말하면 많은 사람들은 이 분이 평생에 주님을 잘 믿었기에 설마 지옥에는 가지 않겠죠 하며 사람들이 그렇게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제가 앞으로 자주 말한텐데, 구원은 현재 진행형입니다. 지금 믿고 있어야 합니다. 과거에 믿었던 것도 안되고, 앞으로 믿을 것이다도 안되는 것입니다. 지금 현재 내가 믿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을 맺습니다.

 

그러나 빌립이 유다처럼 구원을 받지 않은것은 아닙니다.

기독교 전승에 의하면, 소아시아의 히에라 폴리스라는 도시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기독교를 박해하는 무리들에게 잡혀서 몰매를 맞고 십자기를 지면서 순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빌립이 왜 죽어 가면서 예수를 전하려고 했을까요?

자기 같이 믿음이 그렇게도 자라지 않던 자에게까지 주님은 그를 끝까지 사랑하시고 영생을 선물로 주셨기에 그 사랑이 너무 감사하여 목숨을 걸고 전했던 것입니다.

 

오래 전 미국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신앙의 도전을 주었던 어린 소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