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합의 믿음
히 11:31, 수 2:1-21
지금까지 몇 주에 걸쳐서, 우리는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위대한 믿음의 선배들을 살펴오고 있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 하나 같이, 믿음의 거장들이었습니다. 너무 거장들이라, 나와는 상관이 없는 사람들처럼, 먼 나라 사람 이야기로만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그건 위대한 아브라함이니까, 가능하지, 야곱이니까, 할 수 있지, 모세 정도는 되니까, 믿음으로 바로 왕의 명령을 무서워 하지 않는 것이지, 나는 그들처럼 그렇게 할 수 없을 거야 ! 하며, 나와는 다른 부류의 사람들로, 여겼을지도 모릅니다.
만약에 그렇게 생각했다면, 오늘은 정말 우리와 비슷한 사람, 아니 우리보다, 더 환경이 좋지 않고, 형편도 좋지 않은 한 사람을 소개하겠습니다. 그의 이름이 라합입니다.
이 사람은, 남자도 아니고, 여자였습니다. 당시에 여자는 인구조사에서 제외 시킬 정도로, 사람취급을 받지 못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선거권도 없었다는 거예요.
그리고 이 여인은 이방인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이방인은 개 취급을 당했습니다. 상대도 하지 않았습니다. 예전에 한국에 양반이 나타나면, 쌍놈은 피해 가듯이, 당시의 이방인으로 산다는 것은, 노비나 종으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게다가, 기생이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데, 여호수아 2:15절 본문을 보시면, "그 집이 성벽 위에 있다" 고 기록하고 있는데, 어떻게 성벽위에 집이 있겠습니까? 영어성경은 "for the house she lived in was part of the city wall" 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러니까, 기생 라합의 집은 성벽 위가 아니라, 성벽에 딸린 집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라합의 집의 한쪽 담은, 성벽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라합의 지붕의 높이와 성벽의 높이가 같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중에, 정탐꾼들이 기생 라합의 지붕에서 숨어있다가, 곧 바로 성벽을 타고, 탈출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한국에도 옛날에는, 마을 어귀에, 주막이 있었습니다. 어느 동네에 들어가게 되면, 첫 집이 술집이었으며, 잠자는 여관이었습니다. 라합의 집도, 성에 들어서자 마자, 성벽과 한쪽 벽이 붙은 첫 번째 집이었습니다. 왜 첫 번째 집이었냐면, 성에 들어오는 사람들을 상대로, 호객행위를 하고, 매춘을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한국어 성경으로는 '기생' 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영어성경은 'prostitute Rahab' 이라고 기록해 놨습니다. 그러므로 정확하게는 기생이 아니고, 매춘부였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라합은, 여자이며, 이방인이며, 매춘부였습니다. 내세울 만한 구석이 한 구석도 없는 비참한 삶을 사는 여자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생 라합은요, 여호수아가 보낸 정탐꾼들을, 자기집에 감추어 주고, 무사히 성을 탈출하도록 도와주게 되죠. 그리고 나중에, 이 성이 멸망할 때, 그녀와 온 가족이 죽음을 면하게 되는데, 그 성에서 가장 비천한 여인과 가족들이 살아 남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기생 라합이, 오늘 굵직 굵직한 믿음의 거장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은 사람을 보실 때, 출신성분을 보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희망이 보이십니까? 우리는 최소한 기생 라합보다는 어쨌거나, 겉으로 보기에는 형편이 나은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충분히 믿음의 거장들과 같이,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모세만 거장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저를 비롯해서, 우리 꿈의 교회 성도님들이 충분히 믿음의 거장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 기생 라합이 어떻게 해서, 믿음의 조상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는지, 그리고, 그 비결은 무엇이었는지,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 첫째로, 기생 라합이,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들을 귀가 있는 여자 였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다 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다 듣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귀가 있어도, 얼마든지 듣고 싶지 않으면, 듣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들을 귀 있는 자들은 들을지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반대로, 귀는 있어도, 듣지 못하는 귀를 가진 사람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즉, 진리의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귀가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천국 복음을 그렇게 외쳐도, 그 진리를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님께서 진리를 전하시는데도, 그 생명 얻는 구원의 복음을 듣는 귀들은 따로 있었습니다. 다 귀가 있다고, 다 듣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려면, 반드시 첫 번째로, 해야 하는 것이 있는데, 들어야 합니다. 듣지 않고는 믿음을 가질 수가 없고, 믿음이 성장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을 유심히 봐 보세요. 듣기를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열심히 듣고는, 안 믿겠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들으려고 하지 않는 다는 거예요. 그리고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지 한번 보세요. 복음에 귀를 기울이고, 들었던 사람들이 결국, 예수님을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라합은 들려오는 복음을, 그냥 흘려 보내지 않고, 내게 하시는 말씀으로 붙잡았습니다.
이 복음을 성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정작 들을 귀를 가진 사람은, 라합 한 사람이었습니다. 다 귀가 있었지만,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귀한 단 한 사람이었습니다.
여호수아 2:10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라"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고, 이방의 나라들을 전멸시키며, 이곳 요단강 앞에까지, 그 약하디 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셨다는 이 복음이 성에 가득 펴졌습니다. 지금 이시대에도, 복음을 듣지 못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복음의 홍수시대입니다.
1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 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 라합은요, 이 복음을 듣고 처음에는 두려워 했습니다. '마음이 녹고, 정신을 잃을 정도'로 위대하신 하나님에 대한 소문 앞에 두려워서 어쩔줄 몰랐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을 처음 접할 때는, 두려움으로 접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복음을 기회로 삼고 복음을 믿으면, 그 두려움이 기쁨으로 변하지만, 복음을 믿지 않으면, 두려운 나머지, 왜 날 두렵게 하냐고, 하며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미워합니다.
보세요. 세례요한이, 복음을 전하고, 예수님이 복음을 전할 때, 두려운 말씀이었습니다.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 그곳은 구더기도 죽지 않고, 사람을 소금치듯 한다. 그리고 그 고통이 끝도 없이 영원하다. 얼마나 두려운 말씀입니까? 그래서 살기 위해서 복음을 받아 들이면, 그 두려움이 기쁨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36절을 보시면, 베드로가 예루살렘에서 첫 설교를 합니다. 이 설교도 두려운 말씀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이 설교를 듣고, 사람들이 베드로를 찾아와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의 첫 번째 복음 선포를 듣고 두려운 나머지, '우리가 어찌할꼬' 하며, 살 방법을 물었던 거예요.
그리고 그 복음을 믿으면, 말 그대로, '복음' 입니다. 복음은 '복된 소리' 라는 뜻입니다. 기쁨의 소식 이예요. 기쁨을 찾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지 않으면, 계속해서 두려워 하고, 나중에는, 복음 전도자를 미워해서, 결국에는 세례요한도 죽이고, 예수님도 죽이고, 베드로도 죽이 잖아요.
지난 주에 아는 목사님과 대화 중에, 그 목사님이 다른 교회로 가신다는 소릴 들었습니다. 갑작스런 소식이라 깜짝 놀랬습니다. '재밌게 목회 잘하고 계신줄 알았는데, 왜 그러냐고, 무슨 일이 있냐?' 고, 물었더니, 여러 가지 이유를 대시는데,
그 중에, 가장 큰 이유가, 성도들이 강단의 권한을 넘어선다는 거예요. 이것을 '강단권' 또는 '설교권' 이라고 하는데, 목사들이 전하는 설교에 대해서는, 가능하면,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단에 빠졌다거나, 강단에서 저주를 한다거나, 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설교의 권한만큼은 목사에게 주어야 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설교를 하면, 그 교회 성도님들이 "왜 '무서운 설교' 를 해서 '두려움' 을 주느냐" 고, 따진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이 목사님이 말하길, 마태복음 24장을 본문으로 해서 설교를 하는데, 당연히 두려운 것이 맞지 않습니까? 저에게 물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전체가 두려운 말씀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말씀에 두렵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말씀을 믿고, 준비하고, 깨어있으면, 평안이 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믿지 않으려고 하니까, 그 말씀이 자꾸 두렵게 느껴지는 거예요.
그러면서, 그 교회 성도들과 이런 일이 자주 있었는데, 결국에는, 다른 분에게 맡기고, 다른 곳으로 가데 되었다는 거예요.
여러분 두려운 하나님의 말씀이 살리는 말씀입니다.
보세요. 오늘 라합이, 이 하나님에 대한 소문을, 두려운 말씀이 아닌, 다른 말씀으로 들었다고 한다면, 믿었겠습니까? 안 믿었을 거예요. 마음이 녹고, 정신을 잃을 정도의 두려운 말씀으로 들었으니까, 하나님을 찾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귀를 가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 둘째로, 기생 라합이,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듣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믿음을 행동으로 옮겼다는것입니다.
본문을 보시면, "라합은 정탐꾼들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라합이 복음을 듣고 그쳤던 것이 아니라, 믿음을 행동으로 보여주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라합의 행동은 사실 목숨을 건 행동이었습니다. 성 안에 아무도 라합과 같은 행동을 한 사람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병사를 숨겨준다는 것은 자기를 돌아보지 않은 무모한 일이었습니다. 그만큼 그는 확신에 찬 믿음이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성경 66권 중에서 '행함의 믿음' 을 가장 많이 강조한 야고보서에서도 라합이 행동이 믿음이 있는 행동이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2:25을 같이 읽겠습니다.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행함이란 믿음의 전진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널 때 믿음으로 강에 들어서므로 강물이 갈라졌습니다.
만약 이때, 믿음을 행함으로 보이지 않았으면, 강은 갈라지지 않았을 거예요.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미문에서 나면서 부터 앉은뱅이된 사람을 일으킬 때 아무리 베드로와 요한이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했다 할찌라도 앉은뱅이가 나는 일어날 수 없읍니다 하고 앉아만 있었다면 하나님의 기적은 나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믿음은요, 행함으로 꽃을 피우는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야고보서는 단호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르로 해서 이 라합에 어떠한 축복을 받냐면, 나중에 이스라엘이 이 성을 쳐들어 왔을 때, 성 안에 모든 사람들은 다 죽임을 당하지만, 라합과 그의 가족 만큼은 구원을 받습니다.
또
마태복은 1:5절을 보시면, 예수님의 족보에, 감히 여자 이름이 올라와 있는데, 라합이 올려져 있습니다. 이 라합이 다윗왕의 고조 할머니가 됩니다. 엄청난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이방여인이며, 매춘부 치고는, 놀라운 축복이 아닐 수 없읍니다. 그러므로 믿기만 하면, 출신 성분도, 넘어가는 것입니다. 믿는 즉시, 우리는 억만 장자 부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믿는 즉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거예요. 우리 아버지 되신 하나님은, 온 우주의 주인이십니다. 우리도 같이 우주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라합 한 사람의 믿음으로, 영문도 모르고, 라합의 가족이 구원을 받았듯이, 들을 귀가 있는 믿음과 그 믿음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믿음을 통하여,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족들이 구원 받는 역사가, 우리 교회에 일어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설교자의 창고 > 비전나리의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자 - 고후 5:20-6:1 (0) | 2012.12.25 |
---|---|
축복과 저주의 길 - 신 11:18-32 (0) | 2012.12.25 |
네 행복을 위하여 - 신 10:12-22 (0) | 2012.12.25 |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이유 - 신 8:11-20 (0) | 2012.12.25 |
복의 근원이 되십시요 - 창 12:1-9 (0) | 2012.12.25 |
2011년 신년 특별새벽기도 여섯째날 - 사사기 7:1-12 (0) | 2012.12.25 |
2011년 신년 특별새벽기도 다섯째날 - 히10:22-25 (0) | 2012.12.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