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의 문을 연 방언
행 2:1-3
개인과 개인 사이에 혹은 부부 사이에 갈등이 있다는 가장 현저한 증거는 무엇이겠습니까? 대화의 단절입니다. 보통 부부가 부부싸움을 하면 크게는 두 가지 형태로 싸움을 한다고 합니다. 하나는 드러내 놓고 심하게 싸우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하나는 서로 침묵 상태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어느 쪽이
더 나을 것 같습니까?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부부 사이에 생긴 문제로 인해서 침묵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싸우는 것이 훨씬 더 낫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적어도 드러내놓고 싸우는 부부는 어찌하든, 대화를 통해서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고, 침묵하는 부부들은 더 이상 대화를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침묵하는 부부들은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대화를 하지 않는데 서로의 마음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미우나 고우나 대화를 통해서 해결해야죠.
그래서 침묵은 이럴 때는 해롭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다 보면 침묵은 좋을 때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침묵은 금이다" 이런말도 있죠.
침묵기도 들어보셨죠?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을 무너 뜨릴 때 침묵기도로 무너 뜨렸습니다. 옛 기독교의 성자들은 침묵을 하므로 영성을 쌓았습니다.
여러분 그런 경험 있습니까? 기도생활하는 사람이 한참을 사람들과 잡담을 하면서, 남의 흉을 보고 난 다음에, 영적으로 마음이 기쁘지 않고, 하나님도 기뻐하지 않는구나 하는 것을 느끼신 적이 있으실 겁니다.
또 말이 많으면 실수가 많죠. 그렇다고 침묵할 수도, 말을 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싸울 때 만큼은 침묵이 좋지 않지만, 그렇다고 말로 싸우라는 소리가 아니라, 대화를 통해서 해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바보 삼형제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 옛날에 침묵을 요구하는 동굴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굴 안에서 말을 하는 사람은 그 자리에서 죽는 거예요.
이곳에 바보 삼형제가 들어가게 되었는데, 들어가면서 큰 형님이 말합니다.
"야, 너희들 말하면 죽는다" 그러면서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둘째 형님이
"그것봐, 말하면 죽지" 그말을 하고는 둘째도 죽었습니다. 그 때 셋째가 말합니다. "휴, 나는 아무 말도 안했어" 그리고는 셋째도 죽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인간은 결국 완전히 침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대화를 하며 살수 있는 존재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태초에 에덴 동산에서부터 죄가 들어온 후로, 소위 사람들에게서는 죄의
결과로 대화의 단절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이 대화의 단절은 더 큰 불행을 초래하게 만들었습니다. 가인과 아벨 사이에 대화의 단절이 생기면서 서로 믿지 못하고, 증오하며, 결국 비극을 낳게 되죠. 창세기 11장에 가시면, 바벨탑 사건이 나옵니다. 여기서도 이 죄의 결과로 언어의 단절을 초래하게 되죠. 그리고는 뿔뿔이 흩어지고, 민족이 민족을, 나라와 나라가 서로 싸우면서, 지금까지 영어를 배우느라 고생이 계속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승천 하신 후, 제자들과 120명의 성도들이 마가의 다락방이 모여 기도할 때에 급하고 강한 바람 소리 같은 소리와 함께,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 같은 것이 각 사람의 머리에 위에 임하고, 4절을 보시면,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신약 성경에 보시면, 이 방언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곳이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 14장, 그리고 요한 계시록에 이렇게 세 권에서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곳의 방언이 각 각 틀립니다.
사도행전, 그러니까 초대교회때 성도들이 한 방언은 Language 입니다. 각 나라의 외국 말 이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4장에 나오는 방언은 Language 가 아닙니다. 사람이 알아들을 없는 말이죠. 통변의 은사, 또는 통역의 은사가 있어야 무슨 말인지 이해 할 수가 있는 천국의 언어였습니다.
그리고 계시록에 나오는 방언은 다시 Language 입니다. 영어 성경도 Tongues 이라고 하지 않고, 전부가 각 나라의 언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오시는 그날에는 다시 언어가 통합되는 것입니다. 그 때에는 영어 배우려고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초대교회 당시에, 한번은 알아들을 수 있는 방언으로, 또 한번은 알아 들을 수 없는 방언을 주셨는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대화의 소통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초대 교회 때 복음 전파의 목적으로 하나님께서는 각 나라 방언을 말하게 하신 것입니다.
본문 5절을 보시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사람이 우거하더니, 7절에 다 놀라죠. 8절에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이뇨" 그러면서 주^^욱, 여러 지방, 그러니까, 언어가 틀린 지방의 이름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무려 15 나라 이상의 사람들에게, 성령의 충만을 받고, 복음을 전하는데, 자기 나라의 말로 듣게 되니까, 놀라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새 술에 취하였다고 조롱하기도 합니다.
대화의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 방언이 아니었다면, 예루살렘에 기거하는 어림잡아 15이상 나라에 복을 전하지 못하고, 침묵할 수 밖에 없던 것입니다. 어떤 신학자는 이 사도행전 2장의 사건이야말로, 창세기 11장에 나타난 바벨탑의 비극을 극복한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이 기적을 일으키시기 위해 성령님은 몇 천년을 기다리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령님이 이 땅에 오신 사건은 주님이 태어나신 사건과 같은 엄청난 사건입니다.
그러면 오늘 이 엄청난 성령의 충만함과 언어의 장벽을 깨뜨린 사건은 어떻게 해서 일어날 수 있게 되었는지 살펴 보기를 원합니다.
- 첫째로, 그들은 다같이 한곳에 모였다는 것입니다.
본문 1절은 보시면, "오순절날이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우대한 전도의 기적이 시작되는 출발점은 어디 입니까? 함께 모인곳에서부터 입니다. 온 성도들의 마음이 하나가 될 때, 그곳에서부터 성령님을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그전 까지만 해도 제자들 사이에는 다툼과 긴장이 있었습니다. 주님의 나라가 임하시면, 나는 오른쪽에 너는 왼쪽에 앉아라, 다투던 사람들이 이제 함께 모이기 시작하니까,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들은 마음을 하나로 묶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바로 전 1장 마지막절 보시면, "제비 뽑아 맛디아를 얻으니" 가룟유다가 자살한 다음에 그 자리를 대신할 제자 한명을 영입하는 과정에서, 1장 23절에 후보자가 두명이었습니다. 후보자가 많은 데서 한명을 뽑으면 뽑히지 않은 사람들이 여러명이라 상처가 적습니다. 그러나 두명중에 한명은 되고, 한명은 떨어지고, 이거 잔인한 겁니다.
그래서 제비를 뽑게 되는데, 뽑은 후에 아무말이 없습니다. 그리고 2장으로 그냥 넘어오죠.
예전에는 단체에서 내 목소리를 내기를 좋아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하나님의 영광과 복음전파만 생각하고 내 목소리는 죽이고 하나로 모였다는 것입니다.
- 두번째로, 기적이 일어날 수 있었던 이유는, 말씀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다음, 14절부터 베드로의 설교가 나옵니다.
베드로가 얼마나 명설교를 했던지, 사람들이 마음에 가책을 받고 "우리가 어찌 할꼬" 하며 회개할 준비를 하고 있죠. 37절에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그러니까, 베드로가, 38절에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각각' 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단체로 믿는 것이 아니고, 세례도 단체로 한꺼번에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각자 한사람 한사람, 예수 믿고, 각자가 세례받고, 그럴때 각자에게 성령이 임하시는 것입니다. 예전에 어떤 사람은 "교회에 나오세요" 하면 우리 와이프는 잘 나갑니다. 말하는 분이 있었습니다. 자기는
"부인 천국 갈 때 치마꼬리 붙잡고 갈겁니다" 하는거예요. 지금 이런말을 하는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각자입니다.
성령 받는 사람 옆에 우두커니 있다가 어떨결에 덤으로 받는 것이 아니고, 신앙도 각자, 성령도 각자입니다. 이런 일들은 말씀을 들음으로 일어 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의 형식을 보면, 다양한 순서들이 있습니다. 처음에 예배의 부름으로 시작해서, 축도로 끝을 맺습니다. 그리고 이중에 초대교회때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는 순서가 있습니다. '말씀'과 '기도'와 '찬양' 입니다. 다른 것은 다 빠질지라도 이 세가지중에 한가지라도 빠지면 예배라 할 수 없습니다. 그 외에 나머지는 사도신경, 교독문, 축도, 이런 것들은 전통에 의해 생겨난 것입니다. 예전에는 강대상 위에 종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있는 곳이 많이 있죠. 어떤 분은 목사님이 예배드리기 전에 종 안치고 예배 드렸다고, 어떻게 종을 안 칠 수 있냐고 따지시는 분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본질의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예배의 본질은 말씀과 기도와 찬양이죠. 오늘은 설교를 하지 않고 예배를 드리겠습니다. 이러면 얼마든지 제게 와서 따져도 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모이면 기도하고 말씀듣고 찬양했던 것입니다.
- 세번째는, 방언의 기적은 찬양가운데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47절 보시면, "하나님은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여기서 칭송은 칭찬이 아니고, 기뻐하는 것을 말합니다. (enjoying) 기쁨으로 찬양할때에 성령님이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제가 여렸을 때, 기억나는 것이 있는데, 겨울방학 때 심령대부흥성회를 하면
보통 찬양을 1간도 넘게 하였습니다. 지금 같으면 다 도망갑니다. 시간이 문제가 아니라, 마루바닥에 앉아서, 공간은 좁죠, 앉을 자리도 없어 박수도 제대로 못치고, 찬양은 다양하지도 않고, '내게 강 같은 평화' 이 찬양만 2분 넘게 하고, '불길 같은 성신여' 찬송가 173장만 20분하고, 악기는 피아노와 큰북이 전부였습니다. 그런데도 모두가 기쁨으로 찬양한 기억이 납니다.
사도행전 16장 25절 보시면, 바울과 실라가 옥에 갇혔을 때에, 찬미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옥문이 열리는 기적이 일어나죠.
구약에 이스라엘백성들도 홍해를 건넌 다음에 찬양하죠, 늘 찬양과 함께 살았습니다. 마지막까지 찬양하는 것이 성도의 의무입니다. 계시록 19:5절 보시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명하시죠. "보좌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하나님의 종들 곧 그를 경외하는 너희들아 무론대소하고 다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라 하더라" 누구든지 어떤 성도든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는 명령이죠.
이처럼 초대교회 성도들은 성령의 충만을 받기위해 함께 모여서 기도하고, 말씀을 나누며, 찬양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들은 주님의 꿈을 이루기 위해 한마음이 되어 하나로 뭉쳐야만 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보시면, 그 이후로 성령의 충만을 받은후에, 누구도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싸운 흔적이 없습니다. 더 낮은 자리에 처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성령받기 전에, 그들의 꿈은 세상에 있었는데, 이후에 이들의 꿈은 복음전하는 꿈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이꿈을 이루는데, 성령께서 도와주시기 위해서 언어의 장벽을 허무신 것입니다. 성령님은 보혜사입니다. 우리는 Protect 해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의 일을 하려고, 애쓰고, 찾으면, 우리의 꿈의 합당하다면, 성령님께서 도와주신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성령의 시대입니다. 지금우리가 사는 이시대도 성령의 시대입니다. 성령님은 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슬플때가 기쁠때도. 그 분과 늘 동행하여서 승리하시기를 주의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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