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설교자의 창고/ 비전나리의 설교

수요설교 : 느헤미야 8장 13절 – 9장 6절

by Peartree 2012. 12. 23.

8장 13절 – 9장 6절

 

지난주 말씀을 간략하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을 다 재건한 다음에 영적으로 갈급하니까, 에스라에게 모세의 율법책을 가져와 읽어 달라고 요청을 하고, 수문앞 광장에 모여 7시간동안 일어나 하나님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기억하십니까? 그리고는 9절에 보면, 백성이 다 울고 회개를 합니다. 너무 우니까, 9절 하반절에 너무 슬퍼하지 말고, 울지 말라고 에스라와 느헤미야와, 레위 사람들이 이제 근심하지 말고, 기뻐하라고 하면서 달랬습니다. 여기까지가 지난주에 말씀 드린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지난주에는 하나님의 말씀만 들었는데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끝나면, 하나님의 은혜를 지속할 수 없습니다. 그 말씀을 지키고 살아야만 그 말씀이 우리 삶에 능력으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부흥회를 하면, 그 순간에는 눈물 콧물 흘리며 회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부흥회가 끝나면 언제 그랬냐 싶어,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은혜를 받은 것도 중요 하지만, 받은 은혜를 간직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은 받은 은혜를 더 간직하고 싶어서, 13절 보시면, 그 다음날 "뭇 백성의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율법의 말씀을 밝히 알고자 하여 학사 에스라의 곳에 모여서" 그러니까, 백성의 리더 되는 사람들이 말씀을 더 자세히 알고자 하여 에스라에게 다시 모여

든 것입니다. 교회가 부흥되려고 하니까, 리더들이 마음 자세가 너무 예쁘지 않습니까? 이렇게 일일 부흥회로 끝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리더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 자세히 배워서 백성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리더들이 바로 서 있는 교회는 부흥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리더들이 말씀을 더 자세히 공부하다가, 성경에서 무엇인가 발견하게 되는데, 14절 보시면, 7월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초막절을 지키라고 명령한 말씀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이들은 그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실천으로 옮깁니다. 15절에, "모든 성읍과 예루살렘에 공포하여 이르기를" 초막을 지으라고 모든 백성에게 명령을 내립니다.

15-17절 까지 보시면, 이 명령을 받은 백성들이 초막을 짓기 위해서 산에 가서 각종 나뭇가지를 구해 옵니다. 그리고 초막을 짓고 크게 기뻐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보십시요.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 끝나는 않았습니다.

그 말씀이 무엇이라 말하는지 잘 듣고, 그 말씀을 지켰던 것입니다. 우리도 말씀을 듣고 마는 것이 아니라, 힘써 지키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그러면, 초막절과 이스라엘의 3대 절기에 대해서 잠시 살펴 보겠습니다.

 

이스라엘에는 여러가지 절기가 있습니다. 그중에서 대표적으로 3대 절기가 있는데, 유월절과 오순절과 초막절입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할 때, 바로가 백성들은 놓아주지 않으니까, 모세를 통하여 10가지 재앙을 내리죠, 그때, 마지막 10번째 재앙의 집집 마다 장자를 죽이는 재앙이었습니다. 그때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면, 죽음의 재앙이 넘어 간 것을 기념하기 위한 절기 입니다. 영어로는 Passover, 이 유월절은 죽음이 그냥 넘어 간다는 의미입니다. 이절기는 신약에 와서 어린양되신 예수님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오순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한지 50일이 지난 후, 시내광야에 도착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모세를 통하여 십계명을 받은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이 절기는 신약에 와서 우리가 새로운 성령의 법아래 있기에 성령님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출처] 오순절 (성령이 함께 하는 교회,경서) |작성자 seouljisun

초막절은 출애굽한 백성들이 집도 없이 광야에서 나뭇가지를 주어다 대충 세우고 그 위에 천막을 치고 살았던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지킨 절기입니다.

이 절기는 신약에 와서 교회 생활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3대 절기가 중요하듯이, 지금 우리들이 신앙생활 하는데, 중요한 것은, 예수님과 성령님, 그리고 교회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하는데, 예수님 없이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성령님의 도우심 없이 할 수 있습니까? 물론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쉽게 착각하는게, 신앙 생활 하는데, 교회없이 신앙 생활 할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무식하면, 용감한 것입니다.

집에서 혼자 성경보고, 기도한다고 합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상당히 경건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라고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구약 시대에도 하나님은 이스라엘 공동체를 통하여 일해 오셨습니다. 신약시대에는 교회라는 공동체를 통하여 일하고 계십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교회 공동체에 속하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에 나오지 않는 것은 신앙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나오지 않고 신앙을 지킨다는 것은 교만 인 것입니다. 저는 교회에 대해서 할 이야기가 참 많습니다. 고민도 많이 합니다.. 교회에 나오지 않고 신앙생활이 과연 성립이 될까? 라는 질문을 자주 던집니다. WWJD (What would Jesus do?) 예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책도 나왔었죠. 과연 주님께서 교회에 나오지 않고 신앙생활해도 된다고 말씀하실까? 저는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을 것 같습니다. 주님은 분명히 마태복은 16장 18절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씀하시고, 주님은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의 머리시고, 마지막에 주님 오실때는 교회를 부르시는데, 이 귀한 교회를 무시하며 신앙을 지킨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사람은 분명 마귀에게 속고 있는 것입니다.

 

보십시요. 18절 보시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주 모이고 있습니다. 7월의 더운 날씨에 그들이 7일간 모이고도, 8일째 되는날, 규례를 따라 성회로 모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규칙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모여서 무엇을 합니까? 깊은 통회의 회개를 하고 있습니다. 먼저 8장에서의 백성들이 울었던 이유는, 오랫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갈증과 갈급함에서 오는 해갈의 눈물이었습니다. 만약에 여러분들 52일 동안 예배도 제대로 드리지도 못하고, 죽어라 일만 하다가, 52일 만에 예배를 드리게 된다면 마음이 어떨 것 같습니까? 아마 분명히 눈물이 나올 것입니다.

 

남자들이 군대에 갈 때 처음으로 훈련소 생활부터 하게 됩니다. 저도 처음 훈련소 생활 할때, 2주를 교회에 가지 못했습니다. 2달도 아니고 2두, 그리고 세번째 주에 교회를 갔는데, 교회 입구에 들어갈 때 까지만 해도 아무런 감동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성전에 들어가 십자가를 보는 순간, 눈물이 쏟아지는데, 주체 할 수 없었습니다. 앞이 하나도 안 보였습니다. 어떻게 자리에 앉았는지 기억도 나지 았았습니다. 약 30 분정도 지난 다음에야 고개를 들고 설교하시는 목사님을 볼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8장 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흘린 눈물이 이런 눈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금 9장에서 하는 회개는 2절 보시면, "자신들의 죄와 조상들의 허물을 자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상들의 허물을 회개하는 기도문이 7절 마지막 절까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율법 책을 읽는 것을 듣고 마음에 찔려서 모인 사람들이 다 울면서 회개하고자 했으나 지도자들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했으나 다시 모여서 회개할 기회를 얻은 것이다. 본문1절에 "그 달 이십사일에 이스라엘 자손이 다모여 금식하며 굵은 베를 입고 티끌을 무릎 쓰며"라고 하였다. 여기 보면 유대인들의 회개는 첫째 칠월 이십사일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본문에 "그 달 이십사일"이라고 한 것은 초막절 행사가 완전히 끝난 날이 이십이일인데 그 이틀 뒤를 의미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초막절 행사와 관계없이 모인 것이다. 이들이 이렇게 모인 것은 온전히 하나님 앞에 회개하기 위하여 모인 것이다. 칠월 초하루 날에 죄를 인하여 슬피 울기는 했지만 나팔절과 초막절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온전한 회개를 할 수가 없었으므로 중요한 절기를 지난 한날을 택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철저한 회개를 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마련한 것이다. 둘째 모여서 회개하였다. 본문에"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여"라고 하였다. 이는 지난번에 초막절을 지키기 위하여 모인 자들과 같이 모든 백성이 다 모인 것이다. 8:2절에"남자 여자 무릇 알아들을 만한 회중 앞에"라고 하였다. 유다 백성이라면 말귀를 알아들은 자들은 빠짐없이 다 모인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드릴 때는 다모여야 한다. 셋째 금식하며 회개하였다. 본문에"금식하며 굵은 베를 입고 티끌을 무릅쓰고 "라고 한 것은 자기의 지은 죄를 깨닫고 애통한 마음의 외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굵은 베"는 슬픔을 상징한다. 우리가 주로 회개할 때 금식하는 것은 생명을 내걸고 용서를 구하는 자세이며 울면서 애통해 하면서 회개하는 것은 자기의 지은 죄가 너무 안타까워서 통곡하며 회개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 앞에 회개할 때 통곡하여야 한다.8:9절에 "백성들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고 하였다. 죄를 깨닫는 자들은 모두가 다 울었다는 것이다. 눈물은 천국 문을 여는 열쇠라고 하였다. 우리는 회개의 눈물 없이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였다.

 

유대 백성들이 모여서 금식하며 베를 입고 티끌을 머리에 쓰고 회개하였는데 무엇을 어떻게 회개하였는가 하는 것이다. 본문 2절에"모든 이방 사람과 절교하고 서서 자기의 죄와 열조의 허물을 자복하고"라고 하였다. 이는 유대인들의 회개의 실질적인 내용을 말하고 있다. 첫째 이방 사람과 절교이다. 본문에"모든 이방 사람과 절교하고"라고 했는데 당시에 유대와 예루살렘에는 이방 사람들이 많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제까지는 별생각 없이 그들과 함께 지내면서 그들의 여자들을 아내로 데려오기도 하고 며느리를 삼기도 하였고 자기의 딸들을 그들에게 주기도 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긴 것이다. 이들의 교제가 빈번하여 짐으로 종교적으로 희석되어 가고 있었다. 전통적인 신앙이 점점 무너지게 된 것이다. 그래서 우상을 숭배하게 되고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하기도 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의 열조들의 죄인 것이다.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망한 것도 유다가 바벨론에 망한 원인도 모두가 여기에 기인한 것이다. 그러매도 불구하고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은 그 일을 다시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이방 사람을 완전히 배격하고 살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들과 교제하여 살게 되면 신앙에 손해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여기서 교제란 인사하고 정을 나누고 하는 것을 문제삼는 것이 아니라 결혼을 하고 동업을 하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방 사람들과 사귀게 되면 술도 먹어야 하고 죄도 지어야 한다. 왜냐하면 세상이 다 그러하기 때문에 나도 그렇게 해야 그들과 교제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도 진정한 회개를 이루려면 이방인과의 교제를 끊어야 한다. 즉 세상 줄을 끊어야 한다. 못된 습관을 끊어야 한다. 쾌락을 끊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것을 끊지 못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수가 없는 것이다. 둘째 자기의 죄와 열조의 죄를 자복하면서 회개하였다. 본문에"자기의 죄와 열조의 죄"라고 했는데 이는 자기 자신들이 범한 죄와 자기 조상들이 지은 죄를 함께 자복하고 회개하였다고 했다. 오늘 우리는 흔히들 내 지은 죄만 회개하기 쉽다. 그런데 본문에 모인 유대사람들은 자기들의 지은 죄는 물론이요 조상들이 지은 죄까지 회개한 것이다. 이는 조상들이 지은 죄가 자기들과 무관하지 않다는 말이다. 셋째 율법을 읽으면서 죄를 자복하고 하나님께 경배하였다. 본문3절에 "이날에 낮 사분지 일은 그 처소에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 책을 낭독하고 낮 사분지 일은 죄를 자복하고 그 하나님께 경배하는데"라고 했다. 유대인들은 하루를 열두 시간으로 생각한다. 하루에 세 시간을 말씀을 읽고 세 시간을 자복하고 예배를 드리면서 회개하였다는 것이다. 오늘 여기서 우리는 어떻게 회개 하는가?를 깨닫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회개할 때에 하루에 세시간 정도는 성경을 읽어야 하고 세 시간 정도는 기도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회개하는 레위사람들

   

이렇게 온 백성이 모여서 금식하며 티끌을 무릎 쓰고 자기의 죄와 열조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할 때 백성의 지도자인 레위 사람들이 그 회를 인도하였음을 알 수 있다. 본문 4절에"레위사람 예수아와 바니와 갓미엘과 스바냐와 분니와 세레뱌와 바니와 그나니는 대에 올라서서 큰 소리로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고"라고 하였다. 첫째 지도자들이 개회 운동에 앞장섰다. 여기에"레위사람 예수아와 바니와 갓미엘과 스바냐와 분니와 세레뱌와 바니와 그나니"에 대하여는 정확한 신원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8:7절에 이들의 명단이 있는 것으로 보아 백성들에게 율법 책의 말씀을 해석하여 설명하여 가르쳐 주던 자들임을 알 수 있다. 이들은 백성들의 지도자요 이 지도자들이 백성들 이 잘 보도록 대에 올라서서 하나님 앞에 회개 자복한 것이다. 본문에 "큰 소리로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고"라고 하였는데 이는 고난당하는 상황에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기 위하여 소리 내어 간구하는 행동을 가리킬 때 자주 사용되는 말이다. 즉 이스라엘 백성의 죄 문제를 해결을 하나님께 간구하는 행동인 것이다. 둘째 여호와를 송축하며 회개하였다. 본문5절에 "또 레위사람 예수아와 갓미엘과 바니와 하삽느야와 세레바와 호다야와 스바냐와 부다히야는 이르기를 너희 무리는 마땅히 일어나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지어다 주여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송축 하올 것은 주의 이름이 존귀하여 모든 송축이나 찬양에서 뛰어남이니이다"라고 하였다. 하나님 앞에 큰소리로 부르짖어 회개한 후에 여호와 하나님을 송축하자고 하면서 하나님을 송축한 것이다. 우리가 죄를 자복할 때 들어주시는 그 하나님께 찬양하며 송축하여야 하는 것이다.

 

 

본문: 느헤미야 9: 1-3
제목: 기억의 힘

제가 알고 있는 어떤 분은 평상시는 조용하다가도 술만 들어가면 과거 모든 일을 기억합니다. 결혼식 날 이야기, 이사 갈 때 이야기, 거의 날짜 까지 기억을 가고 과거이야기가 끝나야 잠을 잡니다. 그때마다 그 분의 부인께서는 그럽니다.
'웬 수 같은 술 때문에 ...저 기억들 언제나 잊어버리나'

남자들만 그런가요? 어떤 여자 분은 평상시는 조용히 있다가 남편하고 싸울 때면 지나간 이야기가 나옵니다. 제발 그만하라고 해도 또 기억을 하고 또 기억을 합니다.
"시어머니가 자기에게 한일, 시동생 이야기, 첫 월급 탔을 때, 어떤 여자에게 전화 온 것,"
모든 것을 기억합니다. 사람들은 기억이 안 되기를 바랍니다.

카톨릭에서 나온 닐 기유케트가 쓴 [모든 것을 새롭게]라는 작은 책에 소개된 예화입니다.
불과 한 달 전에 남편과 사별한 54세의 루이자라는 부인이 나옵니다.
남편과 사별한 후 남편에 대한 기억으로 괴로워합니다.
길을 가다가도 남편의 외모와 비슷한 사람을 보면 힘이 듭니다.
의사는 고통스러운 기억을 모조리 지워주는 머스를 맞으라고 합니다.
머스(Mirth:기쁨)라는 주사입니다. '비극적인 사건에 대한 기억 반응 차단'의 영문 머리글자 약자입니다. (an acronhym for Mnemonic Interception of Reactions to Traumatic Happenings)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들이 자꾸 기억이 나 고통스러운 사람들이 이 주사를 맞으면 고통스러운 기억을 한꺼번에 싹 지워 줍니다. 24세기 최고의 발명품 가운데 하나입니다. 실제로 미국과 프랑스에서 기억의 고통을 완화시켜주는 망각의 알약을 만든다고 합니다. 모르겠습니다. 과연 기억을 없애는 것이 좋은 것인지?

성서에는 광야에서 나온 것을 기억시키기 위해 초막절을 지키게 합니다.
이것을 이들이 잊어서 다시 그들에게 기억시킵니다. 8장 14절 '발견하였다'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기억하였다 란 말입니다.
수문 앞 광장에서 말씀을 듣고 자기들이 하지 않은 것은 기억 한 것입니다.
9장에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초막절을 지키고 7월 24일 또 다시 모였습니다.

1절 '다 모여서'
금식을 하고, 베옷을 입고, 티끌을 무릅씁니다.
그리고 하루 3시간 말씀을 듣습니다.
이들은 하루 3시간의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무엇이 일어납니까?
기억입니다. '이 모든 것을 돌이켜 본 뒤에'(38) 원어에는 '콰 라스' 라고 합니다.
이 말의 의미에는 지난 모든 것을 생각하다, 기억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 내용이 무엇입니까? 6절부터 37절 까지의 기도입니다.
11절 홍해를 가른 일
12절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
15절 바위에서 물주고 먹 거리를 주심
하나님이 크고 강한 분임을 기억한 것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자신들의 비참함이 기억납니다.
1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의 열조가 거만히 하고 목을 굳게 하여 주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였다고 했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애굽으로 돌아가고자 우두머리를 세웁니다.
18절 광야에서 금으로 송아지를 만들어 그것을 가지고 애굽에서 인도하신 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멸시하였다는 말입니다.
그 뿐 아닙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무엇을 하였습니까?
26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반역 합니다. 율법을 등집니다.
바벨론 포로고 끌려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치욕스러운 삶을 산 이유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30절 하나님은 참다가 결국은 백성을 넘깁니다.

그래서 오늘날 어떤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까? 36절 종살이를 합니다.
37절 그들의 농사지은 소산을 세금으로 다 내야 합니다. 이 모든 일이 기억나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고 나자 9장에 보면 그들은 지난 역사의 일들이 모두 기억나는 것입니다.
이 치욕스러운 기억, 드러내 놓고 싶지 않은 기억, 민족적인 불행을 가져온 이 기억이 언제 생각이 났습니까? 이들은 술을 먹을 때 생각이 난 것이 아닙니다. 싸울 때 기억난 것이 아닙니다. 예배를 드릴 때, 말씀을 들을 때 이들에게 기억이 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다가 기억나는 것이 복입니다. 어떤 이들은 말씀을 듣다가 자기의 부끄러움이 기억나면
"날 두고 하는 이야기 아닌가?" 결국 시험에 듭니다.

유대인들은 그때 어떻게 합니까?
'자백'한 것입니다.(2)
에스라가 읽어준 말씀을 듣고 그들은 자신들의 안 좋은 기억을 자백 합니다.
부끄러운 기억으로부터 자유 함을 받는 길은 자백하는 것입니다.
고통스러운 기억은 숨긴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숨기면 숨길수록 위선자가 되고 그 고통스러운 기억의 노예가 되어 버립니다.

일본을 보십시오. 자꾸 과거의 잘못을 숨기려고 합니다. 그렇게 숨긴다고 숨겨집니까? 이웃 나라와 관계만 불편해집니다. 독일은 자신들의 잘못을 깨끗이 시인하고 드러내 놓고 머리숙였습니다. 유럽에서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과거가 이제 문제가 되지 않고 있습니다.
누구에게 자백해야 합니까? 그들은 기억해 냅니다.
9절 홍해를 건너게 하신 것도
12절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인도한 것도
14절 거룩한 안식일은 지키게 해 준 것도
15절 때마다 필요한 먹 거리를 주신 분도
누구입니까? 주님입니다.

남편 다섯을 두어 고통스런 기억으로 처참하게 살아가던 여인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운 기억을 가지고 살겠습니까? 자기 부모에게도 아는 모든 사람에게 숨기고 싶었을 것입니다. 사람 만나기를 싫어합니다. 예수님이 그 여인을 찾아갔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예수님께 자백합니다. 그러자 그 여인은 어떻게 됩니까? 기뻐합니다. 회복됩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자신이 만난 메시야를 소개하였습니다.
인생이 달라졌습니다. 복음증거자가 됩니다.

"예수앞에 나오면 모든죄사하고 주의품에 안기어 편히쉬리라 우리주만 믿으면 모두구원 얻으며 영생복락 면류관 확실히 받겠네 (205장 1절)"
그런데, 예수님이 나를 이렇게 베풀어 주었는데 먹을 것 입을 것 다 주셨건만
16절 우린 목이 뻣뻣하지 않았습니까? 18절 금송아지 만들지 않았습니까?
26절 불순종 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잘 난 것으로 착각하고 살지 않았습니까?

이들은 자기들 마음이 흔들릴까봐 무엇합니까?
1) '이방사람과 결별'을 한 것입니다.(2)
결별하였다는데 그것이 무슨 큰일입니까? 좀 더 배경을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당시에 이스라엘과 가장 활발하게 교류를 맺었던 이방인들은 두로에 사는 장사치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와서 장사를 하는 등 매우 활발한 경제적인 교류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안식일에도 물건을 사고파는 장사를 했습니다.
오히려 안식일에 더욱 빈번한 교류를 한 것입니다.
유다 백성들이 이것, 즉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그들은 안식을 거룩히 지키기 위해서 그들과의 일상적인 경제적인 교류까지도 끊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이방인과의 절교는 경제적인 문제요. 어려운 결단입니다.
8장에서 초막절을 안 지켰다고 기억할 때 그들은 바로 지키듯이 9장에서도 바로 행동으로 옮깁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마음이 변할까봐 무엇합니까?

2) '언약을 세우고'(38)
모든 것을 기억하고 나서 주님을 앞으로는 잘 섬겨야겠다는 언약 문건을 만듭니다.
그리고 느헤미야를 비롯하여 민족 지도자 84명이 서명을 합니다.
이것이 10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과거의 기억이 거침돌이 아니라 디딤돌이 된 것입니다.

결론
24세기 최고 발명품인 영혼의 진통제라는 머스 이야기를 다시 합니다.
"머스(Mirth: 기쁨) 주사를 맞으실 준비가 되셨습니까, 부인?"
루이자는 의료 기술자를 바라보았다. 젊고, 쾌활하며, 점잖은 옷차림을 한 젊은이였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자신의 앞날에 놓인 모든 것을 체념한 후였다.
"난 맞지 않을 거예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하면 24시간 이내에 머스 주사를 맞게 되어 있었다.
그것을 3번 거부하면 제스트에 수용되게 됩니다.
'제스트'(ZEST: 이것 역시 '사회적 내성 교육 지역'[Zone of Education in Social To Ierance]이라는 용어의 머리글자를 딴 약어이다. 일단 제스트에 수용된 사람들 중에는 다시 돌아온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루이자는 자신이 방금 내린 결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세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머스를 거부한 것입니다.
불과 한 달 전에 세상을 떠난 남편에 대한 기억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그녀의 뇌리 속을 파고들곤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기억이 고통이지만, 기억을 안 한다는 것은 남편에 대한 배신이며 한없이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2주일 후, 루이자는 '눈물의 골짜기'에 도착했습니다. 두려움 속에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웬걸 이곳 사람들은 인위적인 쾌락이나 공포, 번뇌 같은 것에 사로잡혀 있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그들은 생동감과 활력이 있었습니다. 그곳의 이름과 너무나 잘 맞아떨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제스트('열정'이라는 뜻)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말 그대로 열정으로 가득 차서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들에겐 슬픔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고난의 기억을 통하여 고난 받는 자를 위로하게 되었고
더욱 주님에게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의 조언자가 말합니다.
"고통은 힘이 들지만 때로는 고통이 좋을 때도 있어요.
고통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다른 사람의 고통을 함께 나눌 수 있고,
늘 나 자신을 주님에게 맞추게 되지요."
생각해 보세요? "그리스도가 머스 주사 맞는 걸 상상할 수 있겠어요?
사랑하는 친구 나사로가 죽었을 때 그리스도는 어떻게 하셨죠? 눈물을 흘리셨어요."
그러기에 주님은 눈물을 흘리고 우리가 고통스러워 할 때 우리를 더욱 위로하시지요."
시간이 흘렀다. 머스 약을 먹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자살률이 급격히 높아진 대신,
제스트에서는 완전히 영에 가까웠습니다. 사람들은 고통 때문에 자살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머스 요법 덕분에 모든 고통이 제거되었지만, 극심한 권태는 몰아 낼 수가 없었습니다.
고통이 기억 안 되는 것은 삶이 진부했으며 아무런 의미도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살 하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말씀 앞에 기억이 고통스럽지만 이것이 필요합니다.

다윗은 간음죄를 졌습니다. 자기 부하의 아내를 범했습니다. 숨기고 싶은 기억입니다.
그런데 나단 선지자의 말씀을 듣던 중 그는 자기의 부끄러운 죄를 기억하게 됩니다.
다윗이 그 고통스런 기억을 끝까지 숨기고 살았다면 다윗은 성군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주님 앞에 갖고 나왔습니다. 부끄럽지만 솔직하게 자기의 부끄러운 기억을 들고 왔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그를 용서해 주십니다.
토요일 새벽에는 3시부터 잠이 오질 않았습니다. 갑자기 하나님이 기도를 시키십니다.
"예배를 못 드리게 하는 세력들이 가득 하다 그들과 영적 싸움을 하라는 하나님의 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누군지는 몰라도 누군가를 위해 기도를 시키셨습니다.
악한 영들이 이 땅에 예배하러 천군천사들과 오는 거룩한 예배의 무리들을 좋아하지 않기에
누군가를 못오게 방해할 수 있습니다.?사람들의 마음에
-피곤으로
-약속으로
-여러 가지 일들로 악한 영이 방해할 수 있습니다.
혹시 교회에 못 오도록 방해 받은 사람들 계십니까?
그날 아침 새벽기도 오신 분과도 같이 기도 하였습니다.
저희 집 식구들은 자동차 타고 다니면서 건물만 보면 이것 교회 하면 좋겠다가 인사입니다.

심지어 코스코에 가서도 이 사람들이 교회당으로 들어오는 사람들 같다
모든 사람들이 성도로 보입니다. 교회 성장을 위해 LA를 방문하고 왔습니다.
사랑의 교회 앞을 지나며 분명 우리 교회라면 저렇게 하지 않을 텐데
온통 교회 생각입니다. 제 평생 이렇게 교회 건물에 대하여
생각을 많이 한 적은 없습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분명히 예언합니다. 우리에게는 분명 좋은 교회당을 주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이 시기가 얼마나 좋습니까? 이런 시기, 교회당 찾으러 다니는 시기는 이때뿐입니다. 이 시기를 같이 탑시다.
보세요? 영적인 눈을 조금만 가집시다. 구름 기둥 불기둥을 지금도 체험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예배 장소를 인도하지 않습니까?
왜 가정에서 머물게 합니까? 전쟁에 있어서 가장 요란한 싸움터는 아무나 안 보냅니다
준비된 자에게 보냅니다. 영적으로 준비하라고 아직은 안 보냅니다
앞으로 서서히 들어갈 것입니다
이런 체험을 하고 있다니....
이 시기가 고난이라고요? 영적으로 민감 할 수 있는 시기가 바로 이 시기인데
오히려 축복입니다. 이런 점에서 전 어려운 시기의 일들을 잊지 않고자 합니다.
오랫동안 기억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