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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의 창고/ 비전나리의 설교

주일설교 : 산소망 - 베드로전서 1장 1-7

by Peartree 2012. 12. 23.

산소망

베드로전서 1장 1-7

 

예수님께서 하늘로 승천 하신 후, 30년이 지난 7월 여름 어느날, 로마의 중심가에 커다란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그 화재는, 로마의 폭군, 네로 황제가 저지른 불이었습니다. 그래서 성난 로마 시민들은 황제를 향하여 항의를 했습니다. 결국, 궁지에 몰린 네로 황제는 크리스천들이 방화의 주범이라고 소문을 내고, 그들에게 뒤집어 씌웁니다.

그로 말미암아, 로마의 크리스천들이 줄줄이 잡혀서 로마 원형경기장으로 끌려갔고, 더러는 십자가형을 당하기도 하고, 더러는 사자의 밥이 되어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때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은 로마를 떠나, 본문 1절의 말씀대로,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져 나그네처럼 집도 없이 바위 굴속에 들어가 피신하여 살게 됩니다. 바로 이때 크리스찬 가운데 가장 영향력이 있던 베드로가 그들에게 편지 한 장을 씁니다. 그것이 바로 저와 여러분들이 읽은 베드로 전서 입니다.

 

위 다섯 개 도시 가운데, '갑바도기아' 는 현재 터키의 '안티키아' 라는 도시입니다. 지금도 성지순례를 가시면, 뾰족뾰족한 민둥산에 수천개의 동굴이 뚫려 있다고 합니다.

당시에 크리스천들은 로마군의 박해를 피해 이곳에서 지하 30피트까지 모래암벽을 파 내려가야 했으며, 굴속으로 로마군이 쳐 들어올 경우를 대비해 한꺼번에 들어올 수 없도록 겨우 한 사람만 통과 할 수 있는 좁은 통로로 지하를 만들어 미로처럼 연결하였습니다.

거기서 바로 그 시대의 크리스천들은 네로 황제의 추적을 피해서 공동생활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다른 것들은 다 포기하고, 예수 믿는 신앙 하나 가지고 목숨만 간신히 부지하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내일의 안전은 없었습니다. 캄캄한 동굴 생활로 인해 시력은 점점 잃어만 가고, 각종 질병으로 사람들이 죽어갔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베드로를 감동시켜 이 편지를 그들에게 보내서, 고난 속에서 위로를 얻고, 환난의 때 의지할 분은 하나님 한 분 뿐이며, 3절의 말씀대로 그 안에서 "산 소망" 이 있게 하시려고 이 편지를 쓰게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도 베드로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흩어졌던 당시의 크리스천들에게 그들이 아직도 소망을 갖고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고 설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소망을 갖고 살아야 할 이유가 어떤 것들이 있는지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3절 보시면, 우리가 거듭났으므로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우리는, 아무리 보아도 이쁘게 보실만한 구석이 없고, 자격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웬 은혜인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므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나를 구원해 달라고 어떤 값도 지불한 적이 없습니다. 그냥 하나님께서 마른 막대기 같은 우리를 택하셔서 귀하신 만드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말입니다. ……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냥 말씀으로만 하시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독자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피흘려 죽게 하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놀라운 은혜입니다. 이것이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여러분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부모님을 비롯하여, 만나본 모든 사람가운데 여러분들을 이토록 사랑했던 분을 혹시 만나 본적이 있습니까? 제가 장담 하건데 절대 만나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옥의 문턱에서 어슬렁 거리다가, 결국에는 그곳에 들어가 멸망 받을 수 밖에 없는 인생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조건 없이 사랑하셔서 그 영원한 죽음의 형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다시 살리셨고, 우리는 산 소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암혈과 토굴속에서 좌절하지 않고 산 소망 (Living Hope) 을 가지고 살아 가라고 베드로는 격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역사적으로 그들은 그 안에서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고 믿음을 지키며 살다가 그 속에서 죽음을 맞이 했다고 합니다.

히브리서 11장 38절에도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 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세상이 그들을 붙잡아 둘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세상도 이기고, 죽음도 초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눈에 뵈는게 없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무서운 것을 같다 보여줘도, 눈에 보이는게 없으니까, 무서울 것도 없는 것이지요. 그 다음으로 무서운 사람은 죽기를 각오한 사람들입니다.

 

저는 몇 년전에 가족들과 Water Park 에 갔었습니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Ride 중에 가장 무섭다고 하는 Dare Devil 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높고, 급경사인지, 보기만 해도 아찔했습니다. 저는 절대 타고 싶지 않았습니다. 근데 저희 가족들이 저에게 자꾸 타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에는 아내가 아니었습니다. 자식들이 아니었습니다. 모두가 Devil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용기를 가지고 탔는데, 죽음을 경험했습니다. 그런 다음에는 제가 타고 싶어서 한번 더 탔습니다. 한번 죽음을 맛보니까, 그 다음은 무섭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미 죽었던 사람들이었데, 다시 죽는것도 두려워 하지 말고 천국의 소망을 놓치지 말고 잘 극복하라고 베드로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 두번째는, 4절 보시면,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기업이 있다는 것이 소망입니다.

아마 우리들 귀에 익숙한 단어가 있다면 '기업' 이라는 단어일 것입니다. 우리는 요즘 자주 듣는 말이, 어느 기업이 '부도 났다, 또는 문을 닫았다'. 라는 말일 것입니다. 또 '기업'이라는 말은 성경에도 272회나 나올 정도로 아주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만큼 크리스천들에게도 기업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로마에 살고 있던 크리스천들이 도망쳐 나오느라. 자기들의 기업을 모두 버려두고 나왔다는 것입니다. 하루 아침에 거지가 된것입니다.

 

그러나 이 기업이 무너지는 현장 속에서 초대 크리스천들이 하나님께 드렸던 놀라운 고백 하나를 찾아 보시겠습니다.

히브리서 10장 34절 보시면,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지금 그들의 산업이 무너지고 빼앗김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산업을 빼앗길 때 어떻게 당했다고 합니까? 기쁘게 당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이 땅에서 그들의 기업이 무너지고, 빼앗김을 당하면서도 기쁘게 당했습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알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늘에 있는 기업은, 땅에서 가지고 있는 기업보다 훨씬 더 나은 것이며, 영원히 없어지지 아니하는 기업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그들은 그것을 소망으로 삼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 기업의 세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4절 보시면,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이라는 것입니다.

이 기업은 부도나지도 않습니다. 누구에게 빼앗기지도 않는 기업입니다.

 

그러므로 이 영원한 기업이 당시의 크리스천들에게 있어서 굴속에서 믿음을 지킬 수 산 소망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1. 세번째는, 7절 보시면, "믿음의 시련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되는" 소망이 이었다는 것입니다.

 

제임스 그레이 라는 유명한 신학자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고향길 가는 것이 확실하다면 그 길에서 조그만 어려움이야 내 얼마든지 견딜 수가 있지 않겠는가!"

   

추석 때 혹은 설날 때 보면 한국은 고속도로가 꽉 메워집니다. 차가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12시간씩 정차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고향 가는 사람들은 고생을 하면서 그런 결심을 할 것 입니다.

'내가 다시는 고향에 가나 봐라. 금년 이 마지막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 또 갑니다. 고향에 딱 도착하는 순간 그 고생 다 잊어버리거든요.

 

우리의 본향, 저 천국이 우리의 확실한 소망이라면, 그 길에서 우리가 겪는 작은 어려움, 견딜 만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천국으로 가는데 우리에게 왜 시련을 허락하십니까?

6절을 보시면,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육체의 질병, 인간관계의 단절, 경제적인 시련, 등등 여러 가지 시험 앞에 우리는 근심합니다. 근심 절대 안 하는 성도 봤습니까? 만약 그런 성도가 있다면 그러면 저는 그가 사람인 것을 의심 하겠습니다.

 

성경에도 분명히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해서 근심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의 사람들 이라면 그 근심을 극복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근심은 얼마 동안이어야 합니까? 6절에 보시면,

"잠깐"이라 했습니다.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마침 내 뭐 한다 구요?

오히려 기뻐한다! 는 것입니다.

 

이제 근심을 넘어서서 마침내 기뻐할 수 있는 이 커다란 기쁨의 이유,

그 이유가 뭐라고 말합니까? 7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이 시련을 잘 통과하여 주님이 오실 때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기 위하여 성숙한 신앙인으로 변화될 거라는 것입니다.

 

찰스코우만 박사는 곤충을 연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1년 동안 번데기에서 나방이 나오는 과정을 관찰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번데기에서 나방이 나오는 구멍이 작아서 나오기가 매우 어려워 나방이 몸부림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보고 있나니 너무 불쌍해서 가위를 가지고 좀 잘라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만 쉽게 쑥 나왔는데, 나방은 방구석에서 뒹굴면서 날지를 못했습니다.

이 나방은 이 작은 구멍으로 나오는 고통과 고난의 시간을 통해서 건전한 나비가 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을, 스킵하고 쉽게 나왔기 때문에 성숙한 나방이 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시련을 통해서 저와 여러분들을 성숙한 크리스천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이 시련을 잘 견디며 극복할 때에는 우리의 믿음은 정금과 같이 더욱 순결해 지는 것입니다.

주 앞에서는 거룩한 자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 내 어느 날 주님 앞에 서게 될 때에 칭찬 받을 자로 그리고 영광스러운 자로, 그리고 존귀한 자로 세워질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우리가 산 소망을 붙들고 살아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이 소망과 함께, 남은 생애 기쁨으로 시련을 잘 극복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