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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의 창고/ 비전나리의 설교

수요설교 : 찬 신앙생활이란? - 11:1-2

by Peartree 2012. 12. 23.

찬 신앙생활이란?

느헤미야 11:1-2

 

우리는 지난 10주에 걸쳐서 느헤미야 10장까지 살펴보았습니다. 느헤미야의 대략은 이렇습니다. 1-7장 까지는 예루살렘 성의 재건, 이것은 교회를 외부적으로 셋업하는 시간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외부적으로 셋업하는데, 있어서 외부의 문제, 내부의 문제, 신변위협의 문제들이 있었는데도, 무사히 성을 재건 하였습니다.

그리고 8-9장에서는 두 번의 부흥회를 개최하였습니다. 교회를 다시 세운다음에, 영적인 부흥, 또는 영적 대각성 운동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온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눈물로 회개를 하고, 말씀을 더 사모하게 됩니다.

그리고 지난주는 영적 대 각성운동의 주역들이 서명을 하면서, 두 가지를 반드시 지키기로 결의를 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고, 하나는

교회 버리지 아니라 하고 결단을 하였습니다.

 

오늘 11장에서는, 2차 부흥회를 통해 하나님께 자신들의 마음을 결단한 다음에, '누가 성안에 들어가 살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젠 진짜 현실의 문제에 부딪힌 것입니다.

 

1장 10장 까지는 교회생활이었습니다. 그러나 11장부터는 신앙생활이 시작된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교회안에서의 공동체 움직임이었습니다. 성도 함께 재건하고, 부흥회도 함께 하고, 서명도 함께 하는 완벽한 교회 생활이었습니다.

그러나 11장 부터는 이제 교회를 떠나서 신앙 생활해야 하는 출발점에 서 있습니다. 지금까지 교회 안에서 은혜를 받았으면, 그 받은 은혜를 가지고 세상에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미션이 남은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 교회에 출석하는 것이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배에 빠지지 않고, 교회에서 받은 직분을 잘 감당하는 것이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합니다. 또는 교회에서 예수님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것은 '교회생활' 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교회 밖에서도 여전히 일어나야 비로서 '신앙생활 잘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 밖에서도 집사님처럼, 권사님처럼, 장로님처럼, 직분을 감당하고, 교회 밖에서도 예수님처럼 말하고 행동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교회 안에서만 하는 것은 교회생활이지요.

우리가 보통 이 부분에서 많이 착각을 하고, 넘어지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교회 생활이 중요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세상에 나가서 살 때에는 신앙인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살다가, 교회에만 나오면 거룩해 지려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것은 종교생활 입니다. 진짜 신앙인은 삶 속에서 예수님의 흔적을 남겨야 하는 것입니다.

종교생활을 너무도 잘한 사두개인 바리새인들 보십시요. 그들은 교회 생활이 신앙의 전부인지 알았습니다. 그런 그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마 5: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들처럼 종교생활에만 충실하며, 천국에 들어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 었습니까? 마 16:6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누룩은 빵을 부풀게 하여 먹기 좋게 만드는 것입니다. 지금의 베이킹 파우더 같은 것입니다. 이 누룩이 들어간 빵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한데, 속은 텅비어 있습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저장을 할 수 없습니다. 즉, 주임께서는 이들의 겉모습은 그럴듯해 보이는데, 속은 텅비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 이란 때로는 현장검증을 필요로 할 때가 있습니다. 열심히 성을 재건하며 주의 일 할 때에는 우리는 그 사람이 신앙이 아주 좋은 사람이라고 말들 합니다. 두 번의 부흥회를 통하여, 말씀에 찔림을 받고, 눈물로 회개를 하는 모습을 교회 안에서 본다면, 우리는 '이 사람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런 모습은 교회 안에서만 보여지는 것이 문제입니다. 정작 삶의 현장에 나갔을 때, 또는 어떤 문제에 직면했을 때, 어떻게 반응하고 태도를 보이느냐? 가 진짜 내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참된 신앙은 현실적 문제에 직면했을 때에야 비로서, 그 사람의 신앙이 참 신앙인인지 아닌지 판 가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막 10:20절 보시면, 어려서부터 십계명을 다 지킨 청년이 주님께 찾아와서 어떻게 구원 받을 수 있냐고 묻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네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쫒으라 하니까? 재물이 많은 고로 근심하고 돌아갔다고 말합니다. 어려서부터 교회 생활을 잘 했지만, 막상 현실의 문제에 부딪히니까, 신앙생활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문제에 봉착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활이 교회 생활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각자 흩어져

'신앙생활'을 해야하는 상황이 온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에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였을 때, 아직 적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신변이 안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안에서는 벌어먹고 살 것이 없었습니다. 농사짓거나, 목축을 할 만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경제적으로 안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좋은 것은 예루살렘 성안에 예루살렘 성전이 있었습니다. 그곳에 살면, 늘 하나님과 가까이 할 수 있어, 그것 하나만은 좋았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서 살려고 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살지 않으면 성을 지키기가 어려웠으므로 누군가는 그 곳에서 살아야만 했습니다.

지금 같으면, 서로 앞다투어 서울이나, 뉴욕 같은 곳에서 살려고, 땅 투기, 부동산 투기를 했을텐데,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성벽도 멋있게 재건해 놓았는데, 아무도 그 안에 살기를 원치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 2절 보시면, 당시 세 종류의 사람들이 예루살렘성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합니다.

첫째는 백성들의 두목이었고, 둘째는 자원하는 사람들이었고, 셋째는 백성들 중에서 제비 뽑힌 사람들이었습니다. 두목(백성의 리더) 들은 자신들의 해야할 직분이므로 성안에 남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자원하는 사람은 예루살렘 살지 않아도 되는데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안에서 살기로 자원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도 예루살렘에 살려고 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백성들 중에 십분의 일을 제비 뽑아 예루살렘으로 강제 이주를 시켰던 것입니다.

 

은혜 받을 때는 좋았지만, 교회 생활을 좋았지만, 정작 하루 24시간 하나님과 함께 생활 한다고 하니, 부담이 되었던 것입니다. 거기에다 경제사정도 신변의 안전도 좋지 않으니,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살다가, 1년에 몇 차례, 유월절이나, 초막절 같은 명절에만 올라와서 교회생활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느헤미야 11장에서 1-2절의 짤막한 구절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져 하는 말씀이 무엇인지 살펴보고져 합니다.

 

  1. 첫째, 하나님의 성 예루살렘은 언제나 인기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루살렘은 사람들 보기에 서울이나 뉴욕같이 인기 있는 도시가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간섭이 없는 더 넓은 곳으로 가려고 예루살렘을 멀리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도 "생명으로 인도 한 문은 좁고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 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고 사람들이 많이 몰려있는 곳은 예루살렘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만 합니다. 오늘도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 예루살렘과 같은 꿈의교회에 나오신 여러분들은 좁고 협작한 생명의 길로 잘 찾아 오신것입니다.

 

  1. 둘째, 제일 먼저 예루살렘 성에 살기로 작정한 사람들은 백성들의 두목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도 살기 싫어했던 곳을 두목들이 먼저 선택하는 나라는 부흥하고 발전하는 나라입니다. 그 나라가 흥할 나라인가 아니면 망할 나라인가를 알아보려면 그 나라의 지도자들이 먼저 모범을 보이는지 그렇지 아니하는 알아보면 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교회가 될 교회인가 아닌가를 알아보려면 교회의 지도자들이 어떤 자세로 교회를 섬기고 있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힘들고 위험한 곳에 교인들만 있고 교회의 중직 자라고 하는 지도자는 존귀하고 대접받는 자리에만 있으려고 한다면 그 교회는 결코 좋은 교회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지도자들이 선한 목자인가 아니면 삯군 목자인가를 알아보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가 힘든 자리에서 섬기는지 아니면, 위에서 군림하고 있는지 알아 보면 됩니다.

 

우리 꿈의 교회에 도 두목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분들을 무거울 중(重)자를 써서 중직자 라고 부릅니다. 무거운 일을 교인들 앞서서 감당해야 한다는 뜻에서 중직자 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거울 重자의 중직자 보다는 가운데 中자의 중직자가 많으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가운데 서서 영광을 받으려고 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 꿈의 성도님들은 모두다 무거울 중을 쓰는 중직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저마다 사람은 전도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예배드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십일조를 드리는 것, 봉사하는 것, 제자훈련을 받는 것, 기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을 합니다.
중요하다고 말하는 기준이 사람마다 교회마다 다 다르기 때문에 그 중에 어떤 한 가지만 가장 중요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들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순종입니다.
주님께서 '전도하라' 하면 '예'하고 전도하러 나가는 것
주님께서 '말씀을 읽어라' 하면 '예'하고 말씀을 읽기 시작하는 것
주님께서 '예배를 드려라' 하면 '예'하고 즉시로 예배를 드리는 것
주님께서 '기도하여라' 하면 '예'하고 즉시로 무릎을 꿇는 것
저는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순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교회안에서의 생활은 중요하게 여겼는데, 교회 밖에서의 신앙생활은 그렇게 기뻐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예루살렘이 가까이 있을 때가 기회였는데, 그 절호의 기회를 몰랐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있는 교회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복인지 모릅니다. 그와 같은 때를 놓치는 사람은 정말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느헤미야나 백성들의 두 목과 같이 그리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교회에 남기를 원했던 백성들과 같이

우리 꿈의교회에도 사명을 앞장서서 감당함으로 교회와 하나님 나라의 중심에 서는 축복을 받으시는 저와 여러 분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