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한계시록 2장 8 - 11
어느 부자가 하나님께 자기 재산을 천국으로 가져가겠다고 졸랐다.
하나님께서는 처음에는 안 된다고 하셨지만, 끈질기게 졸라대는 통에 마지못해 허락하셨다. 그리고는 말씀하셨다.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천국에 올 때 네 재산을 가져와도 되지만, 가방 하나에만 담아와야 한다.”
부자는 자기 재산을 모두 팔아 금으로 바꾼 뒤 흐뭇해했다.
“이렇게 할 줄이야 하나님께서 미처 모르셨겠지.”
천국 문에 다다르자 베드로가 소지품은 가지고 들어갈 수 없다고 말했다.
부자는 하나님께 허락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베드로는 가방에 무엇이 들었는지 보자고
했다.
가방을 열어 본 베드로는 깜짝 놀랐다. 그리고는 베드로가 하는 말...
“아니? 도로포장 재료는 무엇하러 이렇게 잔뜩 가져오셨습니까?”
우리는 보통 ‘부자’를 표현할 때 ‘잘사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 을 ‘못사는 사람’ 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을 잘못된 표현입니다. 부자가운데
인생을 잘못사는 사람도 얼마든지 있고, 가난한 사람가운데서도 인생을 잘사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도 누울 방한칸 없이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그러기에 ‘가난한 사람’은
요즘 논리로 따지면 ‘못사는 사람’ 이어야 하는데, 예수님은 정말 ‘잘 사신 분’ 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가난하게 인생을 살았지만, 진정한 부자들이 그래도
이 땅에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서머나 교회의 성도들이 이런 사람들 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은 가난하지만 실제로는 부자였던 서머나교회의 성도들은 과연 어떠한 사람들이었는지 살펴 보고자
합니다.
서머나라는 도시는 예나 지금이나 부요한 도시입니다. 서머나는 당시에 유일하게 3층으로된 Market이 있던곳으로 유명합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3층으로 된 Mall 이 있었을 정도로 시장이 번성했던 곳입니다. 그리고
소아시가 일곱 도시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도시였고, 남부럽지 않을 만큼 풍요로운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부유한 도시에 살고 있던 서머나 교인들만
유독 가난했습니까? 그 이유는 예수 이름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9절 보시면,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다른 번역본에서는 환난과 궁핍을, “비참한 생활과 가난’이라고 번역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이름 때문에
비참하고 가난한 생활 한 것을 주님이 알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9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알고 있다’ 라는 표현을 두번 사용하십니다. 또 한번은 “자칭
유대인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을 아노니” 그리고 ‘실상은’ 이라 표현도 두번 사용하십니다. 가난하지만 실상은 부요한
자고, 저들이 유대인이라고 하지만 실상은 사단의 모임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믿는자뿐만 아니라 사단의 모든 활동을 낱낱히 불꽃
같은 눈으로 감찰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마지막에 주님앞에 섯을 때에, 이 땅에서 선한 싸움 싸우고, 모진 환난과 궁핍을 견디면서,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은 삶을 산후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아들아 내가 너를 안다, 딸아 내가 너를 안다’ 라고 하시면, 그들의 귀에 이 한마디가 어떻게 들리겠습니까? 이 한마디 최고의 위로로 들릴 것입니다. 이 한마디로 인하여
모든 슬픔이 눈녹듯 녹아 내리고, 주님 때문에 흘렸던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것입니다. 우리가 이 전능하신 하나님께 이 한마디 듣기 위해서 오늘도 달려가는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하고
싶은 것 하지 못하고, 예수님 때문에 새벽에 일어난것도, 예수님
때문에, 주일 아침 일찍 반찬 만들고, 예수님 때문에
억울한 일 당할 때도 우리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주님은 늘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각자 각자를 알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신앙은 각자 입니다. 다른
사람으로 인하여 나의 신앙이 흔들릴 필요가 없습니다. 보십시요, 서머나 교회
성도들은 이 사단이 그렇게 예수믿지 못하게, 교회에 모이지 못하도록 경제적을로, 핍박을 가하고 옥에도 집어 넣는데도 죽어도 예수님 때문에 견디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즘의 성도들 보십시요. 조그마한 일만 생겨도, 마음이 조금만 불편해도 주님에게서
멀어질 준비를 하고 사는 것 같습니다. 예수 믿는 다는 것은 좁은길입니다. 그 길은 좁아서, 앉을 곳도 없습니다. 편히 쉴 곳도 없습니다. 죽으나 사나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런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지 않고 내맘대로, 내 기분대로 산 사람이 주님앞에서 섯을 때 주님이 똑같이 ‘내가
너를 잘안다’ 라고 하시면, 그 말아 어떻게 들리겠습까? 심판의 소리로 들릴것입니다. 내가 불평하고 좌절하고, 돌아설때에도 주님은 여전히 날 보고 계셨다는 것을 생각하면 부끄러울 것입니다.
오늘 서머나 교인들은 기독교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직장에서 쫓겨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재산을 몰수당하기도 합니다. 옥에도 갇힙니다.
이것이 바로 서머나 교회가 처해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돈을 붙잡아야 하는지, 아니면, 예수님을 붙잡아야 할 것인지,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 했습니다. 서머나 교인들은 이런 식으로 예수님을 향한 그들의 믿음을 시험 받았던 것입니다.
만약에 오늘날 우리교회
여러분들이 이런 경제적인 환난을 당한다면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런 가난을 통하여 우리에게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영원한 축복을 주려 하시는가보다 ! 하나님 참 감사합니다. 이런 마음이 들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 내가 무엇을 잘 못 했다고 이런 어려움이
오는 것입니까? 저는 교회도 열심히 다녔습니다. 헌금도
잘했습니다. 봉사도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어려움을 주다니 하나님 이럴 수 있는 것입니까? 하고 하나님께 항의하시겠습니까?
우리교회
성도님들은 어떠한 환난이 와도 주님 한분으로 충분하다고 고백하는 서머나 교회 성도들 같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옆사람에게…인사…주님이면
충분합니다.
그런데 환난과 궁핍을 당하고 있는 서머나 교회에 예수님은 또 말씀하시는데, 10절을
보십시요.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아니
지금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우유 살돈도 없는데, 빌도 못내서,
물도 끊기고, 전기도 끊키는데, 나름대로
환란을 당하고 있는데, 또 다른 고난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이 고난은 환난과 궁핍만이 아니라 감옥에도 들어가는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예수님께서, 그 고난을 이기도록 도와주시겠다는 말씀은 안하시고,
죽도록 충성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죽도록 충성하다보면 다른일에 신경쓸틈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충성하다 보면, 시험들을 틈도 없습니다. 그러면 충성이 무엇입니까? 영국 런던의 워커 미술관에는 콘트러라는 화가가 그린 유명한 그림이 하나 있습니다. 그 그림은 폼페이라는 도시가 베스비우스 화산의 폭발로 인해 그 화산재에 묻혀 전멸 당하는 비참한 모습을
그린 것이었습니다. 화산재와 용암이 비와 눈처럼 폼페이 성에 내렸습니다. 사람들은 화산재와 불을 피해 성밖으로 몰려 나갔습니다. 이들로
인해 대 환란이 야기되었습니다.
이 혼란 속에서도 성문 곁에서 묵묵히
서 있는 사람이 하나 있습니다. 그는 그 성의 문지기였습니다.
뜨거운 화산재와 불이 우박처럼 쏟아지는 그 혼란 속에서도 자신의 맡은 일에 충성하고자 그는 서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그림의 제목은 바로 '충성'이었습니다. 충성은 죽음 앞에서도 자신의 책임을 잃어버리지 않는, 다시 말해서 죽음을 이기는 사명감인 것입니다.
이렇게 죽도록 충성하면,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면류관을 주시겠다고 소망의 약속을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면류관이라고 하니 자꾸만 머리에 쓰는 관을 생각하시는데, 이말은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생명의 면류관을 받은 사람은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습니다. 첫째
사망이란 모든 사람들이 다 죽는 죽는 것을 말하고, 그 다음에 사망이 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한번 죽으면 끝이라고 여깁니다. 그러기에 수틀리면 살기 어렵다고 자살을 하는데 자살 하는 것으로 끝이 나는 것이 아닙니다. 한국이 세계에서 자살률 1위입니다. 한해에 15000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이렇게 해서 문제가 해결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또다른 죽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9:27절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첫번째는 육신의 죽음입니다. 두번째 죽음은 사람의 영혼이
영원한 지옥에 들어가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이 두가지는 피할 수 가 없는 것입니다.
첫째 사망은 호흡이 멈춘 후에 일어납니다. 그런데 둘째 사망은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은 후에 일어납니다. 계시록 20장 12-14절
보시면, 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13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14 사망과 음부도 불 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 못이이라” 여기에 둘째 사망이 나옵니다. 곧 불 못입니다.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되는 곳입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은 죽도록
충성하면 이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안니 한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믿는 성도들의
가장 큰 소망입니다. 이 소망이 없다면, 예수이름
때문에 가난하게 살 필요도 없습니다. 옥에 갖힐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열심히 돈벌이 잘살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소망이 있기에
핍박가운데서도, 가난 가운데서도, 감사하며, 충성하는 것입니다.
이 충성은 한두해 하다가 마치는 것이 아닙니다. 끝까지 달려가는 것입니다. 한결같이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디모데 후서 4장 9-10절
보시며,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라고 디모데에게 편지를 쓴것입니다. 데마 같은 제자는 처음에는 열심히 바울을 도와주고 따라다녔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충성된 제자 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나이가 먹고 노인이 되니, 옛날처럼 능력이 나타나지 않자 그를 버리고 세상으로 가버린 사람입니다.
그러나 디모데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어떤 사람이 충성된 사람인지는 세월이
자나봐야 안다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 입니다. 교회가
막 성장할 때에는 돕는
사람도 많이 옵니다. 충성하는 사람도 많이 나섭니다. 그러나
교회가 약하고 힘이 없을 때에는 충성하는 사람이 많이 않습니다. 그런데 정말 주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아끼는 사람은 이럴 때 그 진가를 발휘합니다. 진정으로
충성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이때 구분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오늘 10절 보시면, 예수님께서 예언을 하셨습니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합니다 이 예언은 156년 2월 2일
사도요한의 제자이며, 서머나 교회의 담임목사인 폴리갑이 순교하는 사건으로 예언이 성취됩니다. 당시에 로마 황제의 신상에 참배하기를 거절했던 폴리갑과 11명의
성도들이 유대인의 밀고로 체포됩니다. 그러나 폴리갑의 인격과 덕망을 흠모하던 총독은 “예수를 욕하고, 황제의 신상에 절하며, 당장에 풀어 주겠다”고 말합니다. 그때 폴리갑은 이렇게 말합니다. “86년동안 내가 섬겨온
주님, 그분은 언제나 나를 인자하게 대해주셨오. 내가
어찌 그분을 모독할 수 있단 말이요” 하고 칼에 찔려 순교하게 됩니다. 당시에 화형에 처할려고 했는데, 바람이 불어 폴리갑을 태우지
않자, 옆에 있던 병사가 칼로 찔러다고 합니다.
지금 터키의 이즈밀이라는 도시가
당시의 서머나 입니다. 이곳을 방문하면 어김없이 폴리갑 기념교회를 방문하게 됩니다. 이 교회당 벽에는 유명한 화가 레이몽 페레가 그린 폴리갑 순교화가 걸려 있다고 합니다.
이 그림의 구석에는 양손이 묶여서, 순교의 장면을 지켜보며,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한 사내의 모습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화가가 자신의 모습을 그려 넣은 것이라고 합니다.
누구든지 순교자가 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죽도록 충성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서머나의 모든 성도는 생명의
면류관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주님 다시 오실 날이 하루
하루 가까워 지고 있습니다. 주님이 오시든지, 우리가
가던지 몇십년이면 주님의 얼굴을 뵙게 될것입니다. 주님께서 ‘내가
너를 안다’ 라고 하실 때 그 말이 한없는 위로의 말로 들려지는 복이 임하길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그리고 그 날까지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하시다. 생명의
면류관을 받아 누리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