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갈림길에서
빌립보서 1장 22-26
여러분들 혹시 죽음의 문턱에 이르렀던 경험이 있으십니까? 저는 상당히 오래됬지만 92년도로 기억납니다. 계곡에서 물놀이를 하다가 하마터면 거의 죽을 뻔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제 아내와 저는 단양에 사는 세째 누나집에 놀러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깊어 보이지 않는 계곡에서 물놀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물속에서 앞으로 서서히 걸어 가고 있었고, 저의 아내는 뒤에서 저의 목을 감싸고, 천진 난만하게 물 장구를 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가 두발이 물속으로 빠지는 것이었습니다. 물속 깊이가 2M 조금 넘었던 걸로 기억납니다. 짧은 순간이지만 2번 정도를 물속에 잠겼다가 나왔는데, 마지막 세번째 물속으로 들어가면 다시는 영영 나올지 못할 것이라 직감했습니다. 순간 내 머리 속에 떠오른 것이 예수님의 모습이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왜그런지 모르지만 저의 나이가 생각났습니다. 그렇게 생사의 갈림길에 촉각을 다투는 그순간에25란 숫자가 머리속에 크게 그려졌습니다. 그리고는 여기서 나의 인생이 끝을 맺는구나 하는 생각이 스치는 순간 누군가 저의 등을 떠미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이 예수님이 아니고, 저희 누나가 그러는데, 지나가던 방위였다고 합니다. 아니 제가 누굽니까? 해병대 아닙니까? 그런데 바다의 사나이 해병대가 물에서 죽을 뻔한것을 방위가 살려준것입니다. 그후로 저는 가능한 방위를 무시하지 않습니다.
그후로 저는 삶과 죽음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삶은 무엇이며, 죽음은 무엇인가? 그런데 사실 우리는 매일매일의 이런 순간을 맞고 사는 셈입니다. 매일의 삶이, 우리의 일상 생활이 사실 생사에 갈림길에 서 있는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왜냐하면 언제 우리가 마지막을 맞을지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보게될 본문은 '사느냐 죽느냐' 의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었던 사도바울이 빌립보 감옥에서의 고민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순간에 사도 바울은 어떠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고 있는지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 첫번째로, 바울의 고민은 죽음에 관한 문제 였습니다.
바울은 지금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사느냐 죽느냐 인생의 본질적인 문제 앞에서 무엇을 택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자신의 고민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 고민은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라고 말하는 세익스피어 작품속의 햄릿의 고민과 다른 것입니다. 이 고민은 우리 인생의 가장 근본적인고 핵심적인 고민입니다.
요즘 이러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은 정작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는 심각하게 고민하면서, 정작 죽음 뒤에 과연 어떻게 될까? 라고 고민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같습니다.
쇼핑 센터 가서 옷을 하나 고를 때, 엄청 많이 시간을 드리고, 신경을 쓰고 입어 봤다 벗었다. 입어 봤다 벗었다 이런 많은 노력에 비해, 내가 구원을 받을 것인가? 내가 죽고나면, 죽음 뒤에는 어떤 삶이 있을까? 구원이 있다면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 이런 것을 놓고 고민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우리 인간에게 생각하고, 판단하고, 감정을 느끼는 능력을 주셔서 고민을 하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장 먼저 고민해야 하는 것은 죽음에 관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적어도 인간이면 그래야 하는 것입니다.
동물들은 고민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신경성 위장병에 걸린 돼지를 본적있습니까? 불면증에 잠못자며 고생하는 개들을 본적있습니까? 없습니다. 동물들은 종교도 없고, 죽음 이후를 준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런 병에 걸리기도 하며, 죽음을 준비하며 살아 갑니다. 왜냐하면 인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동물은 생각없이 사는 존재지만 인간은 생각하며 살고, 의식있는 존재이기에 깨달음이 있고, 아는 것이 있기 때문에 고민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긴 수염의 할아버지가 있는데, 수염이 너무 길어서 무릅 밑에 까지 내려오는 할아버지가 있었는데, 손주녀석이 어느날 할아버지에게 질문했습니다. '할아버지 밤에 주무실때, 그 수염을 이불 속에 넣고 주무세요? 이불 밖에 넣고 주무세요?' 애들은 창의적이잖아요. 기발한 질문들은 하잖아요, 이 말은 들은 할아버지가 잠잘 때 수염을 어떻게 하고 자는지 생각해본 적도 없고, 그것 가지고 고민할 문제도 아니었기 때문에, 오늘밤 자보고 대답해주마, 하고 그날밤에 잠을 잡니다. 이불속에 수염을 넣고 자는데, 답답해요. 그동안 꺼내고 잔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수염을 꺼내고 자니까, 또 허전한 겁니다. 그래서 또 수염을 집어 넣습니다. 그러니까 또 답답해, 그래서 또 꺼냅니다. 밤새도록 그렇게 하다가 불면증에 걸렸다고 하는 근거 없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몰랐을 때는 전혀 고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알게된 순간 부터 고민이 되는 것입니다.
죄가 뭔지를 몰랐을 때는 고민이 없었습니다. 그냥 죄 지으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죄인지 아닌지 모르니까요. 그러나 죄가 무엇인지 알게 되는 순간부터 고민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게 죈가 아닌가,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생을 진지하게 살아야 되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부터 고민이 되는 거예요. 그러므로 우리는 고민을 안하고는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고민을 하되 어떤 종류의 고민을 하고 사느냐 가 중요한 것입니다.
바울은 오늘 사는냐, 죽느냐의 갈림길에서 영혼에 대한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천년 만년 그냥 살것 처럼 착각하고 살다 보니까, 정말 중요한 이 고민은 안하고 쓸데 없는 고민만 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여러분 오늘 만약에 우리의 인생이 마지막이라면, 여러분의 삶 뒤에 어떠한 삶이 따라올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해 본적 있습니까?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분명한 답이 있습니까? 여기에 대한 해답은 교회를 20년 30년 다녀도 상관이 없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것은 한번 죽은 것은 정한 이치요 그 후에는 심판이 따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하는 것입니다. 이 심판의 문제를 여러분 해결 하셨습니까? 그것 때문에 주님께서 이땅에 오셨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분명히 알고 계시다면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바울은 지금 이 고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이문제를 놓고 깊이 고민해 보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 두번째로, 바울의 고민은 주님과 함께 있고 싶은 것이었습니다.
23절 보시면, 바울이 두 사이에 끼었다고 말합니다. 이 두사이가 무엇이냐면, 주와 함께 살 것이가, 아니면 이 땅에서 조금 더 살것인가 하는 고민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어느쪽을 소원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니까 바울이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죽음이었습니다.
왜요? 죽음 그 차체가 좋아서가 아닙니다. 죽는 행위가 좋아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죽음을 통과하고 나면 천국에서 그리스도와 함게 영원한 삶을 사는 그 삶이 시작될 것이기에, 죽음도 별거 아니고 오히려 더 좋은 수 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감옥에서 살아서 나가는 것 보다, 오히려 이 세상을 떠나서 주님과 함께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것을 원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천국에 대한 진정한 소망을 가지는 것입니다. .. …그래서 죽음조차도, 이 땅에 있는 모든 값어치가 천국의 어떤것과도 비교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할 때, 바울처럼 "죽는 것도 유익하다" 라는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곳에 사랑하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찬송가에도 있습니다. "내주 예수 계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 나라" 주님이 계신 곳이면 그 어디나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천국의 핵심은 주님이 계신곳입니다.
그래서 천국에 가고 싶다고 한다면, 이 세상이 힘들고 고통스러워 천국 가고 싶은 것이 아니라, 주님을 만나고 싶어서 천국을 사모해야 되는 것입니다.
- 세번째로, 바울의 고민은 남의 유익에 있었습니다.
24절 보시면,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유익하리라" 이 번역이 좀 어색한데, 이런 말입니다. '내가 빌립보 감옥에서 살아 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 라는 말입니다. 25절 보시면, 바울이 감옥에서 살아 나갈 것을 확신하고 있고, 26절에 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면,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풍성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암시하고 있는 것은 그러므로 '나는 살아 나가게 될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누구를 위해서요? 빌립보 교회를 위해서. 자기를 위해서요? 아닙니다. 빌립보 교회를 위해서….. 자기를 위해서는 죽어서 천국에가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것이라고, 그것이 훨씬 더 좋다 라는 표현을 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살아 나가는 것이 교회를 위해를 위해서 유익하니라, 그래서 너희와 함께 신앙 생활하고, 함께 기쁨을 나누고, 너희와 함께 선교하고, 복음 증거하고, 목회하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인도할 것이다. 이렇게 확신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고린도전서에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이런 같은 말을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24절에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이말씀을 우리 삶속에 적용해 보시기 바랍니다. 잘못 들으면, 나는 망하고 다른 사람은흥하란 말이야, 이렇게 들릴 수 있습니다. 남의 유익을 구해서 너는 손해 봐라 이런 말처럼 들리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계산법 안에는 남의 유익을 구할때 그것이 곧 나에게도 유익이 된다는것입니다.
이것이 천국과 지옥의 차이입니다. 천국과 지옥의 차이는 천국은 시원한 에어콘이 있고, 지옥은 뜨거운 불구덩이가 있는 것도 아니라, 사랑이 있고 없고의 차이입니다.
어떤 사람이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천국과 지옥을 갔다 왔다고 합니다. 이 사람이 지옥을 갔는데, 예상외로 진수 성찬이 차려져 있는 것입니다. 지옥이 불구덩이라 사람들이 다 피골이 상접해서 다 말라 비틀어져 있을줄 알았는데, 이렇게 잘 먹고 있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다 쫄쫄 굶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니까, 지옥에 식사법이 있는데, 손에 젖가락이 다 붙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젓가락이 3m나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3m 되는 젖가락으로 그것을 집어 먹어야 되는데, 입으로 들어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도 먹지 못하고 굶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국에 가니까, 어떻겠습니까? 서로 먹여 주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만든 이야기입니다. 지옥이 이 정도만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렇게 지옥은 철저하게 남은 죽이고 자기만 사는 것이 지옥이고, 천국은 나의 유익이 아니라, 남의 유익을 위해 사는 곳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고 구원 받으셨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피 흘리시고, 우리를 위해 다 내어 주셨듯이, 우리도 남을 유익을 위해 사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가 할일이고, 교회가 할일 인 것입니다.
알프레드 노벨은 노벨상의 창시자입니다. 그가 노벨상을 제도를 만든 것은 우연치 않은 기회때문이었습니다. 다이나 마이트를 만들고 많은 폭발물을 만들어 사람들을 죽게 만들어 많은 돈을 벌어 들인 그의 형이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신문에서 이름을 형의 이름을 자기 이름으로 잘못 기재 한 것입니다. 알프레도 노벨 죽다. 다아나마이트를 만들어 많을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 넣어 돈을 벌은 악한 사람" 라는 기사를 읽으면서 충격을 받습니다. 나도 언젠가는 죽게 될텐데, 내가 죽고 나면, 나도 이런식으로 기사가 나오고 사람들에게 이렇게 기억될것이 아닌가, 그래서 이제까지 모은 전 재산을 노벨상 기금으로 조성하면서 노벨상제도를 만든 것입니다.
이렇게 생사의 갈림길에 서있는 자신의 인생을 생각해 보면, 진지하게 우리의 남을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돌아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의 남은 인생 그것이 얼마가 되더라도, 우리주 예수님과 영원한 천국에서 삶을 누리기를 소망하면서, 주님 앞에 가는 그날까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멋있게 사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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