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를 찾아서
막 10 17-22
여러분들의 염려와 기도 덕분에 버지니아에 잘 다녀 왔습니다. 중간에 아틀란타에서 그만 비행기를 놓쳐 무려 10시간 가량 공항 터미널에 있었습니다.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행기는 놓쳐도 주님 다시오시는 순간을 놓쳐서는 안된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덕분에 사람구경 많이 했습니다. 저는 많은 사람을 보면, 꼭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중에서 천국에 몇 명이나 갈까? 또한 인내라는 것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빨리 투산으로 오고 싶었지만 비행기가 준비가 됬는데, 파일럿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행기 안에서 2시간 동안 앉아서, 보스턴에서 오는 파일럿을 기다렸다가 오느라 더 늦은 것입니다. 예전에 중국 최초의 목사 워치만니에게 어느성도가 '목사님 인내가 무엇입니까?' 물었습니다. 그러자 인내는 예수 그리스도 이지 답했다고 합니다. 그말의 의미는 우리가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이 인내가 아니고 오히려 예수님께서 우리를 수천년 기다리고 계신 것이 진정한 인내라는 것입니다.
어느 여인이 비행기를 기다리면서 상점에 들어가 잡지 한 권과 과자 한 봉지를 사 들고 왔습니다. 아직은 시간이 있어서 터미널에 앉아 잡지책을 뒤적이고 있었습니다. 잠시 뒤 뭔가 부스럭 거리는 소리에 쳐다보니까, 옆에 있던 어떤
신사가 방금 자기가 사 놓아둔 과자 한 봉지를 뜯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랐지만 뭐라고 해야 될지를 몰라 그저 자기 과자를 하나 집어먹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남자도 아무 말없이 하나 집어먹는 것이었습니다. 서로 그렇게 말도 없이 계속해서 과자를 하나씩 집어먹습니다. 이제는 하나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그 남자가 마지막 과자를 집어 들더니 절반으로 쪼개어서는 절반은 놔두고 절반은 자기 입에 넣고는 씽긋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가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에 저런 강심장도 다 있나?" "이렇게 뻔뻔한 사람도 있다니?"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 여인은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잠시 뒤 탑승을 알리는 방송이 나와서 그녀는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자리에 앉아서도 그 남자의 뻔뻔스런 모습이 계속 아른거려서 기분이 언짢았습니다.
그러다가 안경을 닦기 위해 손수건을 꺼내려고 종이 가방을 열어 보았더니, 그 속에 자기가 샀던 과자 봉지가 그대로 들어 있는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녀가 열심히 집어먹은 과자는 실상 그 남자의 과자였던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이런 오해를 한번쯤은 한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은 이여인보다 더 심한 오해를 하고있는 한 사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17절 보시면 한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 무릎을 꿇고, 지나가시는 예수님의 길을 가로막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사람을 마태복음에서는 청년이라고 말하고, 누가복음에서는 관원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젊은 사람이었으며, 부자이며, 권력까지 지니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남 부러울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예수님 앞에 무릎꿇고 영생에 관하여 묻고 있습니다. 이 젊은 관원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당시에 아무 지위도 없고, 집도 없고, 야인처럼 사는 예수님 앞에서, 또한 수 많은 사람이 보고 있는 그 상황에서 무릎을 꿇 정도로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또 20절의 말씀대로, 율법을 지키며 살았던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또 한가지 이사람은 구도자 정신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 그 길을 찾았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신학자 C.S 루이스는 '현대인들은 구도자의 정신'을 상실했다고 지적합니다. 요즘 사람들의 온통 관심을 어디에 있습니까? 먹고사는 문제, 직장의 문제, 가정의 문제, 자녀의 문제, 건강의 문제, ……………그런데 이사람은 영혼의 문제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과연계시는가? 그분은 내게 어떤 분이신가? 영생은 무엇인가? 있다면 내가 어떻게 갈수 있는가? 이런 고민은 요즘시대에 별 관심이 없어보이지만 이 사람은 이 영생을 갈망하며 찾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괜참은 사람이었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도, 그의 내면의 생각도 정말 본받을 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21절을 보시면, 예수님도 이 사람을 사랑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이렇게 좋은 면도 많았고, 가능성이 있었던 사람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22절 말씀을 보면 그냥 돌아갑니다.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이 사람이 이렇게 떠나갈 수 밖에 없었던 이유, 그것은 이 사람이 가지고 있었던 어떤 오해 때문입니다. 이 사람이 가지고 있었던 오해는 어떤 것이기에 이 사람을 신앙의 길에서 떠나게 만들었을까요?
1) 이 사람은 예수님에 대해서 오해를 갖고 있었습니다.
17절 보시면, 이 사람이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으로 부르시자 , 예수께서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하십니다. 이 말씀은 마치 예수님은 선하지 않다는 인상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의도는 나는 '선한 선생 그 이상'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이 말씀은 곧 '내가 바로 하나님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많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첫 번째 오해입니다. 예수님을 선한 선생으로는 보되 하나님으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4대성인의 한 사람으로 봅니다. 만약 예수님이 그들이 생각하는 선한 선생중의 한 사람이라면 기독교에 구원이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 존재 가치가 위태롭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예수님을 인간으로 보고자하는 무수히 많은 가설들을 내세웁니다. 다빈치코드라는 영화가 그런것입니다. 한국 SBS 다큐멘터리 '예수는 과연 신의 아들인가?' 라는 것을 통하여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에 대해서 시청자들로 하여금 의심을 갖게 만드는 것입니다.
당시에 예수님께서 죽으신 이유가 그런 이유였습니다. 어느날 나사렛 청년 예수가 나타나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며 돌아다녔을 때 많은 사람들은 이 주장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고 좋은 말씀을 주시고,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시는 것은 좋은데, 예수님이 하나님이란 주장만큼은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자신이 하나님이라는 주장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도 이 문제는 세상사람들을 곤혹스럽게 만듭니다. 예수님을 인류의 선한 선생으로 받아들이는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소크라테스나 공자나 이런 분처럼 예수를 생각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하나님이요, 우리의 구세주라니요 이것은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 첫 번째 오해의 문턱을 넘어서지 못하고 슬퍼하며 돌아가는 것입니다.
금세기의 위대한 신학자였던 C.S 루이스가 켐브리지의 채플에서 한 번은 설교를 하면서 '예수의 구주되심' 이란 주제로 설교를 했습니다. 설교가 끝난 뒤 한 학생이 C.S 루이스교수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만약 오늘 선생님께서 예수는 위대한 본받아야 할 모델이라고 말했다면 우리 모두는 선생님에게 박수를 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구세주이다 라는 케케묵은 기독교의 교리를 얘기했음으로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것입니다."
이 때 C.S 루이스는 그 청년에게 이런 반문을 했다고 합니다.
예수는 모델로 이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자로 오신걸세. 석가모니는 삶의 모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간디도 그렇습니다. 테레사 수녀 그렇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모델이시기전에 구원자라는 것입니다. 이 구원은 사람은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밖에 할 수 없습니다.
예들들어 설명하겠습니다. 수영을 아주 정말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느날,
수영을잘 하는 친구가 수영을 가르쳐 준다고 하며 자기를 따라 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잘 할 것 같지만 이 사람이 결국에는 그대로 따라하지 못하고
하면 할수록 물속에 가라 앉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수영
잘하는 모델이 아니고, 물속에서 건져줄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청년은 예수님을 선생으로 보는 오해를 한것입니다.
2) 이 사람이 가지고 있었던 오해는 구원에 대한 오해입니다.
오늘 이 사람이 던질 질문이 무엇입니까?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
이까?" 잘못된 질문은 잘못된 대답을 얻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 사람은 '구원
과 영생은 우리가 무엇을 해서 얻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이 사람이
가지고 있었던 두 번째 오해입니다.
이 사람은 나름대로의 도덕적인 프라이드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자신감이 있
었습니다. 19절 보시면,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놀랍게도 이 청년은 이 모든 계명은 어려서부터 다 지켜왔다고 말합니다. 나는
누구에게 피해준 적도 없고, 항상 부모에게 효도 잘하고, 어른들 공경하고, 사
람들에게 욕먹을 짓 안하고, 양심에 따라 살아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이 말씀합니다.
21절.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
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물론 예수 잘 믿기 위해서 우리 재산을 다 팔아야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
도 재물을 가지고도 하나님을 잘 섬긴 사람들은 많습니다. 아브라함도 그렇고
욥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이 사람이 자
기의 실상을 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 말씀은 이 청년에게 충격이었습니다. 더군다나 22절 보니까 이 청년은 재산
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22절.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
며 가니라. 이 청년의 충격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충격이기 보다는 자기 자
신에 대한 충격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자기는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말씀을 듣고 보니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경건하게 자라났고, 모범생이
란 사람도 들었을 것이고,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는 말도 들었을 것입니다. 은
근히 자기는 남보다 더 나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
앞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청년의 오해는 구원과 영생은 자기 힘으로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열심히 살면, 열심히 기도하면, 열심히 선행을 베풀면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진 것입니다.
이 오해는 오늘의 교회 안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열심히 무엇을
하면 하나님이 감동해서 자기에게 영생을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
들에게 필요한 것은 이 청년의 자각입니다.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구나... 내
가 괜찮은 사람인줄 알았는데 내가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죄인
이구나... 이것을 깨달으셔야 합니다. 정말 자기가 죄인인 것을 깨닫지 못하면
십자가가 믿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우리에게 주신 목적이 율법을 지키라고 주신것이지만 근본
적인 목적은 그 율법을 지킬 수 없어 나는 죽었구나하고 깨닫게 하기 위한것입
니다.
롬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구원과 영생은 우리 힘으로 얻을 수 없는 것이라면 도대체 구원얻을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오늘 이 사건은 제자들에게도 충격이었습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10:26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막 10:26 제자들이 심히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27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막10:27절.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영생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영생은 선물입니다. 우리 힘으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힘으로는 절대로 얻을 수 없습니다. 구원은 선물입니다. 여러분은 이 영생의 선물을 받아들이셨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쓸데없는 고집을 피우시면 안됩니다. "내가 할 수 있어요...내 힘으로 해결할 수 있어요..." 이렇게 고집피우지 마십시오. 다만 주님께 나아가 이렇게 고백하십시오. "주 예수여,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를 도와주소서. 나에게 영생을 허락하여 주소서.." 이렇게 기도하신다면 여러분은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3) 이 사람은 제자도에 대해서 오해했습니다.
이 청년은 헌신없는 제자도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것도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사람들은 희생없는 기독교인의 삶을 상상합니다. 아무 것도 손해보지 않는 교회생활을 생각합니다. 아무런 댓가를 치루지 않고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나에게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오해합니다.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분이십니다.
• 우리의 충성을 요구하십니다.
계2:10...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 희생을 요구하십니다.
눅9:23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우리가 주님 따르는 길은 결코 희생이 없는 길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충성과 헌신이 필요합니다. 희생과 값지불이 필요합니다. 우선순위를 조정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먼저 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 인생의 주인되셔셔, 내가 주인삼은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20세기 초반에 런던 신문에 다음과 같은 광고가 등장했다. '위험하고 모험적인 여행을 하기 원하는 사람들 모집함. 낮은 급료, 쓰리도록 차가운 추위, 수개월에 걸친 어두움, 계속되는 위험, 안전하게 돌아오리라고 확신할 수 없음. 성공할 경우 명예와 인정이 주어짐'
그 광고는 남극 탐험가 어니스트 경이 낸 것이었다. 그때 그 광고를 보고 수천 명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새대에 우리에게 영생을 선물로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 따르는 이들은 얼마나 됩니까?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말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 자신의 삶을 헌신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되냐는 것입니다.
영생은 나의 노력으로 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앞에 나와가 나는 죄인입니다. 불쌍히 보시옵소서 라고 밖에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에 사랑 많으신 하나님은 그냥 우리를 외면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손을 잡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다음엔 그 사랑에 너무도 감사하여 죽도록 충성하는 것입니다. 이것의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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