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만난 직후에……
행 9장 10 -23절
오늘의 본문은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후, 그가 어떠한 일들을 했는지를 소개하는 부분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전의 사건은 이렇습니다. 바울 (사울)이 예수믿는 자들을 잡으러 다메섹으로 가는데,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비추었고, 바울이 땅에 엎드러지죠. 그리고 예수님께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주여 뉘시오니까?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그리고는 바울이 그 충격에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9) 사흘동안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울을 이렇게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의 패턴을 들어보면 각양 다른 모습으로 사람들을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이 언제 부르셨는지 모르게 주님을 만나는 경우도 있고, 바울처럼 강력하게 충격을 받으면서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울처럼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다가 주님을 만나는 사람도 있고, 나다나엘 처럼 무화가 나무 아래서 오실 예수님을 묵상하며 기다리다가 만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각기 다른 사람들을 다양한 방법으로 부르시는 이유는 무었입니까? 사람들의 성경과 처한 환경이 틀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만난 환경은 틀릴지라도 동일하게 위를 부르신 공통점은 우리가 이땅에서 해야 할 일들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사명이라고 합니다. 사명. 그래서 이 땅에서 가장 잘 사는 사람은 하나님 주신 사명을 발견하고 그 길로 가는 사람이 최고 행복한 사람일 것입니다. 사명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깨진 항아리도 사명은 있는 것입니다.
살짝 깨져 금이 간, 못 생긴 물 항아리가 있었습니다.
주인은 그 항아리를 물 긷는 데 사용했습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주인은 금이 간 항아리를 버리지 않고 온전한 물 항아리처럼 아끼며 사용했습니다.
'나로 인해 그토록 힘들게 길어 온 물이 조금씩 새 버리는데도 주인님은 나를 아직도 버리지 않다니...'
깨진 항아리는 늘 주인에게 미안한 마음 이였습니다.
어느 날, 깨진 항아리가 주인에게 물었습니다.
"주인님, 왜 저를 버리지 않으시나요?
전 별로 쓸모가 없는 물건인데요."
주인은 아무 말 없이 물이 담긴 항아리를 지고 집으로 향했다.
"얘야, 우리가 걸어온 길을 보아라."
늘 물을 길어 집으로 돌아오던 길가에는꽃들이 싱싱하게 피어 있었습니다.
항아리가 물었습니다.
"어떻게 이 메파른 산길에 예쁜 꽃들이 피었을까요?"
주인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습니다.
"바로. 네 몸의 깨진 틈으로 새어나온 물을 먹고 자란 꽃들이란다."
오늘 저희들이 읽은 사도행전 9장은 예수님께서 바울에게 복음전도의 사명을 주시기 위해서 부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장 8장 까지는 누가 나옵니까? 사도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거의 다가 베드로의 이야기 입니다. 그리고 9장 부터는 바울의 이야기 시작됩니다.
그렇다면 제가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바울을 택하였습니까? 제자들이 12명씩이나 있는데, 왜 굳이 바울을 택하여 쓰실 필요가 있냐는 것입니다. 12명을 3년 6개월 같이 자고 먹고 합숙 훈련을 했는데, 바울이 필요했던 이유가 뭐냐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서 주님께서 바울을 택한 이유를 몇 가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 11절 –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충격에 3일 동안 앞도 보이지 않고, 시금은 전폐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 다메섹에 사는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에게 말씀합니다. 바울을 찾아가서 안수하므로 다시 볼 수 있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이때 바울의 기도제목이 무었이었겠습니까?
첫째, 하나님 앞을 좀 볼 수 있게 해 주세요. 답답합니다.
둘째, 이렇게 눈멀게 하신 그 예수님을 알고 싶습니다. 이 두가지 였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택하신 이유입니다. 그는 기도가 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주님께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제자들 보십시요. 막 14:41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전날에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나를 위해 기도해 달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아랑곳하지 않고 열심히 졸며 자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번 한번이 아닙니다. 눅 9장 32절에도 예수님께서 제자들은 데리고 변화산에 올라가 기도하는데, 역시 기도하지 않고 졸며 자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에는 기도 훈련이 제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사도행전으로 넘어 오면서 베드로도 제 9시기도 시간, 제 6시 기도시간 이렇게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님은 만나자 마자 기도도 어떻게 하는지 모르고 훈련도 제대로 받지 않았지만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울이 이런 모습을 보시고 다듬기만 하면 큰일을 할 것을 미리 알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 20 절 –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제일 처음으로 한일이 무엇입니까? 기도하고 그리고 즉시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바울과 베드로의 차이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강조했습니다.
거기에 비해 베드로는 인간적인 예수님을 강조했습니다. 그럴수박에 없습니다. 베드로는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과 3년을 넘게 같이 사신 분이고, 바울은 예수님께서 인간으로 오셨을 때 본적도 없고 만난 적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후 바로 베드로를 만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전하는 이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강조하는 이 복음이 희석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후에 누구를 가장 많이 만나고 싶었겠습니까? 베드로 입니다.
당시에 기독교 정통이 누구입니까? 베드로 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물려 받은 정통입니다. 마치 이어 달리기에서 앞에 주자에게서 바톤을 바로 물려받은 것과 같은 인물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갈 1:17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만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3년 동안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 이라는 이 복음을 확립하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지 않고 베드로를 바로 만났다면 하나님은 굳이 바울을 택할 필요가 없습니다. 바울을 택한 이유가 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이다 라는 복음 때문이었습니다.
요한 복음 1장 42절 보시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처음 만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안드레가 자기형 베드로는 예수님께 인도하는데 뭐라 예수님을 소개합니까?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당시에 유대인들에게 메시야는 대단한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왕이 나타난것입니다. 나라의 해방을 가져다 줄 왕이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막 달려갔는데, 예수님이 앉아계시는 거예요, 처음만났는데 어떻겠습니까? 실망한것입니다. 못생긴 아저씨가 앉아 있는 것입니다. 왕의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성경에 못생겼다고 이사야 53장 5절 보시면 "흠모할 만한 것이 없다" 라고 써있으니 못생긴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예수님의 첫 만남은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헤어집니다.
그런데 눅 5장 3절-5절 두번째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베드로가 이날은 밤새 고기를 한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깊은데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베드로는 고기잡는 전문가 였습니다. 그런데 목수가 와서 조언을 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짜증나죠.. 예를 들어 유신현 집사님과 같은 영어선생이 영어문제를 풀지 못하고 쩔쩔매고 있는데, 수학 선생이 와서 제가 한번 풀어 보겠습니다. 하면 황당하겠죠. 그런데 베드로는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립니다. 그런데 그물이 찢어지게 잡았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스친 것이 무엇입니까? 야 이분이 얼굴은 촌티나는 분이지만 메시야구나….그때부터 예수님을 슈퍼맨으로 봤습니다. 죽은 사람을 살리지 않나. 5000명을 먹이지 않나, 물위를 걷지 않나. 그래서 자기도 물위를 걷겠다고 하지 않나. 그래서 베드로는 이때부터 예수님을 인간예수로 봤습니다. 굉장한 분이시지만 3년 6개월의 동고동락 하면서 예수님의 인간적인 면을 많이 보았기 때문에 그 이상을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처음부터 봤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신 것을 보면 베드로는 와 정말 대단하시다. 놀라게 되죠 왜입니까. 인간이신 예수님이 그런 큰 능력을 행하는 것으로 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 광경을 봤다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인데 뭐 그정도야 기본이지 뭐.
그때 만약에 바울이 아라비아로 가지 않고 베드로를 직접 만났다면, 베드로가 바울에게 어떤 말을 했겠습니까? 예수님은 귀신도, 쫒아내고,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고, 물위를 걷고, 막 얘기를 했겟죠. 그때 바울은 어떻게 반응했을 까요? 하품을 하고 이었겠죠. 하나님의 아들인데, 그 정도는 당연한거 아닌가?
바울이 예수님을 위대하게 본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세상에 왔다 갔다는 것을 위대하게 본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들의 손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에 바울은 놀랐다는 것입니다. 우주비행사 제임스 어윈이 달에 다녀온 뒤 많은 사람들이 어윈에게 사인을 받으려고 몰려들었습니다. 그때 어윈은 '뭐 달에 갔다 온 것이 그렇게 대단합니까?" 정말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 지구에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것보다 놀라운 일은 세상에 없습니다.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바울이 예수님은 만나자 마자 전한 것이 이 복음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 22절 –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니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복음을 전하므로 해서 그때부터 바울의 신변이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23절 보시면,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니라. 사울을 죽이려고 서로 짰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에 가서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하면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그러면 대체 그리스도가 뭐길래 이들이 이토록 신경이 날카로워지며 강경해지는 것입니까?
그리스도란 '기름부음을 받았다' 라는 뜻입니다. 구약에서는 기름부음을 받을 수 있는 직책은 세사람이었습니다. 제사장, 왕, 선지자 .. 그래서 유대인들이 기대하던 메시야는 이 세가지 직분을 다 충족시키는 분이어야 메시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만 해도 메시야 즉, 그리스도인지 알았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예수님 가시는 길에 옷을 펴고, 종녀나무(왕권을 상징) 가지를 꺽어 예수님 가시는 길에 펴고 야단 법석을 떨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어 왕이 되지 않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죠. 그래서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무슨 메시야냐, 이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메시야는 그렇게 쉽게 십자가에서 죽으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분을 메시야라고 하면 죽이겠다는 것입니다.
2000년이 지난 지금도 그렇습니다. 그럼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마지막 때 다시 오실 예수님은 어떤 분으로 오십니까? 왕으로 오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찬양 할 때 이렇게 "주님 다시 오실때까지 나는 일어나 달려 갈리라 ………영광의 왕이시라" 예 그렇습니다. 마지막에 왕으로 오시면서 메시야 직을 완전히 성취하시는 것입니다. 행 5장 30-31그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그래서 왕으로 오셔서 천년동안 나라를 통치하시고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우리들은 예수님을 구원자요, 왕으로 기다리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12제자들은 키워 놓고 또 바울을 택한 이유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그 이유가, 기도로 시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죽음을 무릎쓰고서라도 담대하게 전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속에서도 이 세가지를 잊지 않고 실천 한다면 분명히 주님은 여러분들을 들어 쓰실 것입니다.
기도
- 기도로 시작하는 삶을 사는지
- 하나님의 아들이 예수님이시며, 그분이 왕으로 다시 오실 것을 전하고 있는지. 바울은 목숨을 걸고 전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를 드립니다.
저희 들의 죄와 허물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이땅에 오셔서 죽기까지 저희들을 사랑하심을 감사합니다. 깨진 항아리와 같은 저희들은 끝까지 믿고 바라보시니 감사드립니다.
이제부터 우리의 삶이 바울을 본받는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예배하고 돌아가는 저희들을 오른손으로 장중에 사로 잡아 주시옵소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종교적으로 혼란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저희들은 진리의 영되신 성령께서 바른 길로 걸어갈 수 있도록 역사해 주시옵소서. 저희 꿈의 교회가 마지막 시대에 이 복음을 잘 감당하기 원합니다. 힘과 능력과 은혜를 더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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