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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가는 두날개/회개와믿음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 아닙니다. - 찰스 피니 목사님

by Peartree 2013. 1. 24.


찰스 피니

우리의 구원과 거룩함이 무조건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제가 초기에는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지만, 더 많은 성경 묵상과 기도를 통해서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 아니다!’ 라는 진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진리를 뒷받침할 많은 성경 구절들이 있습니다. (겔 18:21-29, 겔 33:12-16, 렘 6:30 등)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생각은 아주 심각한 실수이며 아주 위험한 잘못입니다!”

 

  거룩함을 지속적으로 이루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우리가 계속해서 하나님 은혜를 의지하는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속적으로 거룩함을 추구하거나 구원을 끝까지 지킬 필요도 없이, 거룩함과 구원이 무조건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주장만큼 이상하고 공상적으로 위험한 생각도 없을 것입니다.


   (15) 칭의(Justification)나 성화(Sanctification)나 최종적 구원(Final Salvation) 중 그 어떤 것도 무조건적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는 계속 깨어 있어야 하고, 넘어질까 두려워해야 하며 지속적으로 거룩함을 추구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저의 이런 주장에 반대하면서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낸다”는 다음의 성경 구절을 인용합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요한일서 4:18)

 

  ① 이 말씀의 뜻은 우리의 ‘노예적인 두려움’(Slavish Fear)을 쫓아낸다는 말이지 모든 종류의 두려움을 다 쫓아낸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여러분도 아시는 것처럼, 거룩을 이루기 위한 두려움도 있습니다. 그런 두려움은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함이 곧 지혜의 근본이라 그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좋은 지각이 있나니 여호와를 찬송함이 영원히 있으리로다” (시편 111:10)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 (고린도후서 7:1)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에베소서 5:21)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시편 2:11)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무덤을 빨리 떠나 제자들에게 알게 하려고 달음질할새” (마태복음 28:8)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빌립보서 2:12)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창세기 22:12)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편 112:1)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시편 128:1)

 

  “항상 경외하는 자는 복되거니와 마음을 강퍅하게 하는 자는 재앙에 빠지리라.” (잠언 28:14)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골로새서 3:22)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베드로전서 1:17)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히브리서 12:28)

 

  ② 악인의 특징 중 하나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③ 사랑은 ‘노예적인 두려움’(Slavish Fear)은 몰아내지만, 사랑 안에 있는 거룩을 추구하기 위한 두려움은 몰아내지 않습니다. 거룩을 추구하기 위한 두려움은 우리에게 가장 근본이 되는 것입니다.

 

 

  결론

 

  (1) 행함이 없는 믿음으로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행함이 따르지 않는 믿음으로 죄나 지옥을 피할 수 없습니다. 성도들을 향한 이런 경고의 말씀은 성경 모든 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칭의(Justification)나 성화(Sanctification)가 무조건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주장은 터무니없는 말입니다!

 

  (2) 한번 믿었다고 해서 무조건적이고도 변치 않는 의로움을 가지게 된다는 것은 가장 위험하고 치명적인 오류입니다. 다음이 그 이유들입니다.

 

  ① 만약 어떤 신자가 한번 의롭다 함을 받은 후에, 계속해서 죄를 지어도 정죄함을 받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법이 폐지되었다는 뜻이 됩니다. 그가 한번 믿었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법에 따른 형벌이 영원히 그에게서 효력을 나타내지 못하게 된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러면 그에게는 하나님의 법이 아무 소용없게 됩니다. 처벌할 수 없는 법은 법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죄를 짓더라도 그를 심판할 법이 영원히 폐지되었다면, 그 사람에게는 그 법이 더 이상 법이 아닌 게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법이 공의로운 법이 아니라 단지 권고하거나 상담하는 정도에 불과한 것이 되어 버립니다. 죄를 지은 사람에게 어떤 처벌도 할 수 없고, 그가 지켜야할 강제적인 규정이나 의무도 부과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죄인도 아니고 거룩한 자도 아닌, 그냥 동물 같은 존재가 될 뿐입니다.

 

  ② 신자는 한번 믿었다는 이유로 영원히 그리고 무조건적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실을 증명하는 것 중에 하나는 모든 사람들이 죄를 지으면 자기 양심에 가책을 받게 됩니다. 우리 양심이 우리를 책망하는데 하물며 우리 양심보다 크신 하나님께서 책망하시지 않겠습니까?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거든 하물며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일까 보냐” (요한일서 3:20)

 

  ③ 한번 믿었다고 해서 영원히 그리고 무조건적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에스겔서 18장 21절에서 29절, 에스겔서 33장 12절에서 16절에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나 악인이 만일 그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떠나 내 모든 율례를 지키고 법과 의를 행하면 정녕 살고 죽지 아니할 것이라. 그 범죄한 것이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 행한 의로 인하여 살리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어찌 악인의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서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의에서 떠나서 범죄하고 악인의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대로 행하면 살겠느냐 그 행한 의로운 일은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범한 허물과 그 지은 죄로 인하여 죽으리라. 그런데 너희는 이르기를 주의 길이 공평치 않다 하는도다 이스라엘 족속아 들을지어다 내 길이 어찌 공평치 아니하냐 너희 길이 공평치 않은 것이 아니냐. 만일 의인이 그 의를 떠나 죄악을 행하고 인하여 죽으면 그 행한 죄악으로 인하여 죽는 것이요. 만일 악인이 그 행한 악을 떠나 법과 의를 행하면 그 영혼을 보전하리라. 그가 스스로 헤아리고 그 행한 모든 죄악에서 돌이켜 떠났으니 정녕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 그런데 이스라엘 족속은 이르기를 주의 길이 공평치 않다 하는도다. 이스라엘 족속아 나의 길이 어찌 공평치 아니하냐 너희 길이 공평치 않은 것이 아니냐.” (에스겔 18:21-29)

 

  “인자야 너는 네 민족에게 이르기를 의인이 범죄하는 날에는 그 의가 구원치 못할 것이요 악인이 돌이켜 그 악에서 떠나는 날에는 그 악이 그를 엎드러뜨리지 못할 것인즉 의인이 범죄하는 날에는 그 의로 인하여는 살지 못하리라. 가령 내가 의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살리라 하였다 하자 그가 그 의를 스스로 믿고 죄악을 행하면 그 모든 의로운 행위가 하나도 기억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지은 죄악 중 곧 그 중에서 죽으리라.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죽으리라 하였다 하자 그가 돌이켜 자기의 죄에서 떠나서 법과 의대로 행하여 전당물을 도로 주며 억탈물을 돌려 보내고 생명의 율례를 준행하여 다시는 죄악을 짓지 아니하면 그가 정녕 살고 죽지 않을지라. 그의 본래 범한 모든 죄가 기억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정녕 살리라 이는 법과 의를 행하였음이니라 하라.” (에스겔 33:12-16)

 

  위 성경 구절처럼 명확한 증거는 없을 것입니다. 이 말씀에 분명히 드러나 있듯이 “가령 내가 의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살리라 하였다 하자 그가 그 의를 스스로 믿고 죄악을 행하면 그 모든 의로운 행위가 하나도 기억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지은 죄악 중 곧 그 중에서 죽으리라.”(겔 33:13)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저에게 되묻기를, 이 성경 구절이나 이와 유사한 성경 구절들이 의인이 그의 믿음에서 실족할 것이라고 단정 짓지 않고, 만약 죄를 짓게 된다면 정죄함을 받게 될 것이라고 가정법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그것과 상관없이 분명한 사실은, 한번 믿었다고 해서 변함없이, 그리고 무조건적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주장은 이 성경 말씀과 분명히 반대되는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한번 믿음으로써 자신이 지속적으로 거룩을 지켜나가는 것과 지속적으로 순종하는 것의 조건들을 만족시켰다고 착각합니다.

 

  ④ 한번 구원이 영원한 구원이 아닌 것은, 모든 성경에서 나온 경고, 책망, 권면의 말씀 등, 성경에서는 가능한 모든 방법을 통해 최종적인 구원을 얻는 조건으로 끝까지 거룩함을 이루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번 믿었다고 해서 무조건적으로나 영원토록 거룩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성화된 만큼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들이 한번 믿었다고 해서 이미 완전하고 무조건적이고도 영원히 거룩하게 된 것이며 이미 최종적 구원을 얻었다면 왜 그토록 많은 성경 말씀에서 구원을 잃을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겠습니까? 한번 믿었다고 해서 절대로 변치않게 의로워졌다면 왜 구원받기 위해서는 끝까지 인내해야 한다고 말씀하시겠습니까?

 

  ⑤ 한번 구원이 영원한 구원이 아닌 것은, 그들의 믿음이 진리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 감정적으로 그렇게 믿고 싶어하는 성향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감리교 신자들이 칼빈주의의 감정적인 입장을 반대하는 이유에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한번 구원받은 사람도 그가 실족하게 되고 최종적으로 실족한 상태에서 죽게 되면 그의 구원을 잃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만약 어떤 지식이나 믿음이 죄나 지옥으로부터 무조건적으로 피할 수 있게 하고 무조건적인 의로움과 구원을 보장한다면, 그것은 도덕적 자유의지의 힘을 무효화시키는 것이며 모든 사람을 실족시키게 될 것입니다. 만약 그들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사람의 자유의지가 가지는 힘을 모두 무효화시켜 버릴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에 대해 기도하는 것은, 성경의 모든 경고의 말씀들을 통해, 자신은 이미 무조건적으로 죄나 지옥을 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바른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기적인 사람들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계속 이런 주장을 하시는 분들께 성경에서 성도들을 향해 주시는 모든 말씀을 읽어 보셨는지 묻고 싶습니다.

 

  성화된 사람은 오직 사랑에 의해 영향 받지, 자신의 희망이나 두려움에 의해 영향 받지 않는다고 생각하시는 분께 말씀드립니다. 사랑은 그에 합당한 행동을 낳습니다. 또한 그 사람의 희망이나 사람을 두려워하는 마음도 그들이 어떤 일을 결정하거나 지속적인 순종을 유지하려고 할 때 필수 불가결한 요소로써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자신은 이미 무조건적인 의로움을 받았다고 믿거나, 자신의 최종적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그런 확신이 그들의 구원에 걸림돌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의하십시오. 그것은 무조건적인 의롭다하심의 확증이 아닙니다. 그들의 의로움과 구원은 그들이 끝까지 거룩을 지켰는가 아닌가에 달려있습니다. 그들이 죄에 빠지게 되면 정죄함을 받고, 죄 가운데 죽거나 실족한 상태로 죽게 되면 결국 구원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자신의 자유의지로 믿음과 인내를 나타낼 때, 마침내 의롭게 되고 구원받게 됩니다. 이런 확신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완전한 거룩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게 하며, 모든 방법을 동원해 선한 일을 하도록 그 사람을 격려합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이 자신은 예수님을 너무나 진실하게 믿고 있어서 지속적인 거룩과 불변의 의로움과 영원한 구원을 무조건적으로 얻었다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너무나 위험하고 파괴적인 믿음이며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 권하시는 마음의 상태가 전혀 아닙니다.

 

  (4) 도덕적인 존재에게는 무조건적인 성화나 무조건적인 의롭다함의 상태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죄를 지을 가능성이 완전히 없어질 뿐만 아니라, 거룩해질 수 있는 가능성도 완전히 없어진다는 말입니다. 거룩이란 도덕적 자유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도덕적 자유란 옳은 일이나 잘못된 일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도덕적인 존재에게는 어떤 상황에서도 의로움과 성화와 최종적인 구원은 항상 조건적이라는 말이 됩니다.

 

  (5) “이 땅에서 항상 나그네로 지내라” 혹은 “나그네로 있을 때 두려움으로 지내라”고 말씀하신 뜻은 불신앙이나 죄의 상태로 있지 말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언약들은 모두 조건적이기 때문입니다. 성화의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 우리의 믿음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칭의의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 성화를 필요로 합니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가 가진 자유의지를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베드로전서 1:17)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항상 겸손히 행하고, 우리의 마음을 동이며 깨어 있어 인내함으로 우리 앞에 놓인 경주를 달려 나가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 아니다”가 진리라는 것입니다.

 

  저도 예전에는 지금과 반대되는 생각을 가졌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저도 “그렇게 되면 하나님 복음의 약속이 아무 소용이 없게 되는 것 아닌가?”라고 생각했었습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붙들 수 있는 사람만 내가 붙들겠다.”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 같이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더 깊은 묵상과 기도와 더 깊은 성경연구를 통하여 패러다임의 전환이 왔습니다. 제 영으로 무엇이 정확한 진리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 아니다!”라는 말이 하나님 통치 원리와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때마다 임하는 하나님의 축복을 취하십시오. 일용할 양식에 대한 약속들이 모두 조건적으로 주어진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스스로 노력하고 자신을 돌보는 사람을 돌본다”는 말이 있듯이 하나님의 모든 언약들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건강을 약속하셨을 때, 우리는 하나님이 정하신 자연적인 법칙을 따른다는 조건하에서 건강을 선물로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건강을 지키려는 자의 건강을 지켜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장수를 약속하시면 우리는 하나님이 정한 삶의 법칙을 따라야 오래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살려고 노력하는 자를 살게 해 주십니다.

 

  이것은 영적인 축복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신자들의 신앙심이 깊어지는 것은 자신이 더 깊은 신앙을 가지려고 노력하는 것에 비례합니다. 그들의 신실함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그들이 실족하지 않게 지켜주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신실한 자를 항상 살펴보시며 그들이 넘어지지 않도록 도우십니다. 신실한 자가 기도의 영을 가지고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모습을 지켜보십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자신의 자유의지를 가지고 스스로 깨어 있으려고 노력하고 신실함을 가지려고 애쓰는 만큼 그들을 도울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거부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농부가 열심히 밭을 갈고, 기술자가 자기 일을 열심히 하며, 학생이 늦게까지 열심히 공부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적 통치는 피조물인 우리의 자유의지를 통해 가장 훌륭한 결과를 도출해 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이루기 위해 자연적이고 필수불가결한 방법을 사용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한 생각을 배제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9) 견인의 교리(Perseverance of the Saints)는 비성경적 주장입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견인의 교리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한번 믿었다고 해서 그것이 무조건적이고 변할 수 없는 의롭다함의 상태로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닙니다. 대신에 성도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끝까지 순종하면서 그 믿음을 지켜나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