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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의 창고/ 비전나리의 설교

인생의 수수께끼 - 요한복음14:1-6

by Peartree 2012. 12. 26.

인생의 수수께끼

요한복음14:1-6

 

오래 전 미국의 아주 평범한 가정에, 4살된 아주 예쁜 사내 아이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그 아이의 부모가 그 아이를 데리고, 점쟁이를 찾아가 그 아이의 미래를 봐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점쟁이는 "이 아이는 마흔 세살 밖에 살지 못할 것 같습니다." 라고 말했어요. 이 말이 그 아이의 마음속에 깊에 각인되었습니다. '나는 마흔 세살 밖에 살지 못하는 존재구나!' 아이가 커 갈수록, 마흔 세살이 가까워 올수록, 초조한 마음은 더 커져갔습니다. 그리고는 마흔 세번째 생일이 지나고, 일주일 후 그 아이는 병원 영안실에 안치 되었습니다. 사인은 마약 중독이었습니다. 그가 바로, 세계적인 가수 엘비스 프레슬리입니다. 그는 많은 사람에게 갈채를 받으며, 화려하게 살았지만,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마약으로 위로를 삼다가, 그만 비참한 인생을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그가 죽었을 때, 부검을 해 보니까, 10가지 마약이 배속에서 검출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약 많이 드시지 마십시요. 엇그제 신문을 보니까, 미국에서, 총으로 죽는 사람보다, 약을 잘 못 복용해서 죽는 사람이, 총에 죽는 숫자의 26배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총보다, 약이 훨씬 무서운 것입니다. 마약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의사에게 진단을 받고, Prescription 받아서, 약국에서 약을 사 먹은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죽는 다는 거예요.

 

그런데, 총 보다도, 약보다도 더 무서운 것은, 희망이 없는 것이 가장 무서운 것입니다.

엘비스 프레슬리는 마흔 세살, 이후의 소망이 없었어요. 그래서 마흔 세 살 까지만, 살다 가려고, 그렇게 마약을 먹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요. 이 세상 사람들 거의 다가, 엘비스 프레슬리 처럼 살고 있는 거 아십니까? 엘비스 프레슬리는, 마흔세살이면 그의 인생이 끝나는 것으로 믿고 살았지요. 이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도, 80평생, 길면, 90평생이면, 인생이 끝나는 것으로 굳게 믿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저 역시도, 그렇게 믿고 사는 사람 중에 한 사람입니다.

 

저뿐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열한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근심하지 말라고, 하신 것을 보면, 제자들이 근심 걱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어떤 근심이었냐면, 이 '영생' 에 문제, '죽음' 에 문제에 대해서 근심 걱정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듯이, 가룟유다가 떡 한조각을 받고, 밖으로 나가니, '밤' 이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유다가 이제, 몇 시간 있으면, 군사들과 함께 예수님을 잡으러 올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14:28절에 보시면, '내가 아버지께로 간다' 는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제자들의 귀에는 예수님이 죽으신다는 말로 들린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걱정 근심이 많겠습니까?

 

어쩌면, 제자들의 마음속에는 불신의 싹이 트고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아니, 지금까지, 영생이니, 구원이니, 말해 놓고는, 죽는다니,…… 그럼 영생은 없다는 말인가, 지금까지 영생은 믿고, 따라온 우리는 뭐야!, 우리를 속인거야!' 라는 생각이 들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 제자들의 마음을 예수님은 꿰뚫어 보시고는,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말씀하시죠. 다른 말로 하면, 걱정하지 말아라, 영생은 있다, 90살까지 살고 끝이 아니라, 영원히 살 것이라고 말하시면서, '내말을 믿으라' 고 말씀 하시는 거예요.

 

그렇게 말해도 제자들은 반신 반의 한 것 같아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2절에, "내 아버지 집에는 거할 곳이 많도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살집을 마련하러 가는 것이다. 3절에 보시면, 살집을 다 마련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데라고 갈 것이다, 그리고 그 곳에서 함께, 영원히 살 것이다' 라는 말씀을 하시죠.

 

이것이, 3절의 말씀이 저와 여러분들이, 그토록 고대하는, 주님의 재림의 사건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면, 저와 여러분이 살 집은 다 지어놓고 오시는 것입니다. 그 집은, 이 땅에 있는 집과는 비교도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은, 최소한, 집 한 채는 가지고 있는 분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난하지 않습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이 가난한 거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기 때문에, 믿지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의심 많은 도마가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주님, 어디로 가시려고 하는 것입니까? 다시 말하면, 주님은 어디에서 오셨습니까? 주님의 고향은 어디입니까? 라는 질문입니다.

 

도마의 이 질문은, 참 중요한 질문입니다. 도마의 이 질문으로 인해,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며, 또 가셔서 어떠한 사역을 하실 것이며, 그 사역을 다 마친 후에는, 다시 오실 것 까지 우리가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의심 많은 도마라고 부르기 보다는, 질문 잘 하는 도마라고 불러야 합니다.

아마도 예수님께 던진, 수 많은 질문들 중에, 오늘 도마의 질문은, 최고의 질문이었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사실,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이 도마가 던진, 질문을 하고 살아야 합니다. 이 질문을 던지지 않는 사람은, 엘비스 프레슬리 처럼 살다가, 인생 그냥 끝내고 싶은 사람들입니다.

'도대체 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인생인가?' 라는 고민 한번 해보지 않는 사람은, 영생에도 관심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영생에 대해서 너무 궁금하니까, 주님에게서 해답을 찾으려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인 것이죠.

 

여러분, 이 영생에 대한 해답은요. 세상 어디에서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세상의 수 많은 철학자들이, 이 답을 찾으려고 해도 찾지 못했습니다. 공자도 석가도, 마호메트도, 우리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명확하게 길을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도 우리와 똑 같은 사람이기 때문에 모르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이 대답을 줄 분은, 오로지,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2절을 보십시요. 우리가 가야 할 곳에 어디라고 말씀합니다. "아버지 집" 이라고 말씀합니다. 아버지의 집이 우리가 가야 할 고향입니다. 지금 주님께서는 그곳으로 다시 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저와 여러분의 살 집을 마련하신 다음에 다시 오겠다고 말씀합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너희들도 나처럼, 영원히 살 것이다.' 이 말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말로만 허풍 떠는 것이 아니라, 군대의 조교처럼, 먼저 시범을 보여주시고, 너희들도 그와 같이 할 것이라는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불교를 보세요. 석가가 다시 살아난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79살에, '파와' 라는 마을에서 대장장이 아들 '춘다' 가 주는 음식을 먹고는, 심한 식중독으로 죽었습니다. 그 후에, 석가가 살아 났다거나, 하는 말이 없습니다. 그래서 불교에는, 극락이 없습니다. 석가는 극락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부다피아' 라는 불교 인터넷 홈페이지 가보면, 불교에서 말하는 죽음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정작 부처님 자신의 사후에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무기' (기한 이 없다)고 하여 논하려 하지 않으셨다" 라고 기록했았습니다.

석가 자체는 죽음 이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는 수행의 종교지, 영생의 종교가 아닙니다.

 

그래서, 불교에서 말하는 극락은, 한국불교에나 극락을 말하지, 불교의 원조라고 하는, 인도에서는 '극락'이라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면, 불교에 극락이 있다손 치더라도, 극락은 뭐고, 환생은 무엇입니까? 극락에 가는 사람은 뭐고, 짐승이나, 곤충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은 무엇입니까? 불교는 앞뒤가 맞지가 않습니다.

 

예수님은, 믿으면, '아버지 집' 으로 간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믿지 않으면 지옥으로 간다고 말하죠. 인생의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목적지가 분명합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불교는 목적지가 분명하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석가가 가본적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석가가 죽었다가, 살아나서, 분명한 길을 제시해 주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죽었으니, 그의 제자들이, 종교로 만들다 보니까, 오합지졸인 것입니다.

 

한번은 석가의 제자들이 석가에게 죽음에 대해서 물었다고 합니다. "선생님, 사람이 살다 죽으면 어떻게 됩니까?" 석가모니, 왈 : "이 사람들아 사람이 살아서 일도 모르겠거늘, 죽은 다음에 무슨 일이 있을지 내가 어떻게 알겠느냐." 라고 했다고 합니다.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불경에 그대로 있는 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곧이 많도다"

이 보다 확실한 말씀이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이 진정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돌아갈 집이 없는 사람이 제일 불쌍한 것 같아요. 배고프지만, 돌아갈 집이 있으면, 그래도 행복하지 않습니까? 하루 종일 일터에서, 일하고, 돌아가 집이 없다면, 어떠할 것 같습니까? 참 비참할 것 같지 않습니까? 반겨주는 아내가 있고, 반겨주는 남편이 있는, 그 집 때문에, 힘을 얻는 것이고, 돌아 가 안식할 수 있는 집이 있기 때문에, 아무리 힘들어도, 참고 견디는 것이죠.

그래서 동물들도요. '귀소본능' 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코끼리도 태어난 곳에 가서 죽습니다. 연어도 산란기가 되면, 태평양 가로질러 자기가 태어난 곳에 가서, 알을 낳는 다고 합니다. 이처럼 살아 있는 모든 것은, 고향을 생각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의 고향은 어디입니까? 경기도 전라도 경사도가 아니라, '아버지 집' 이 우리의 고향입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 집에 다시 가는 방법은, 딱 한가지 입니다. 1절을 보세요.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6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어느 날, 아이들이 동네에 모여서 구슬치기도 하고 딱지치기도 하고 땅 따먹기도 하고 있었습니다. 많이 딴 아이는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고, 또 잃어버린 아이는 시큰둥해서 있고, 다 잃은 아이는 아예 울고 있었습니다. 많이 딴 아이에게 조금만 달라고 사정을 해 보지만 그 아이는 무자비하게 거절을 합니다. 이윽고 해가 서산으로 뉘엿뉘엿 넘어가자 땅거미가 깔리면서 점점 어둠이 찾아옵니다. 길에서 놀던 아이들도 하나 둘씩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뒤에서 다정한 어머니의 아들, 딸들을 부르는 소리가 들립니다. 울던 아이들도 다정한 엄마의 소리에 '엄마'하며 달려가 엄마의 품에 안깁니다. 모두들 즐겁고 행복한 표정으로 집을 향해 달려가고 있을 때 구슬을 다 따고, 땅도 다 딴 그 아이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습니다. 그 아이의 얼굴에는 슬픈 기색이 연연했습니다. 손에는 구슬과 딱지가 가득했지만 조금도 그 아이를 기쁘게 해 줄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아무 데도 갈 곳이 없는 고아였기 때문입니다.

 

딱지를 다 따 모으고, 구슬을 다 차지했을지라도 해가 지자 갈 곳이 없는 그 아이는 전혀 기쁘지 않았습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이 땅을 많이 차지하려고, 재산을 한 푼이라도 더 모아보려고 발버둥치고 바쁘고 분주하게 살고 있지만, 언젠가는 인생의 밤이 찾아와서 죽음이 우리를 부르는 그 날에,

돌아갈 집이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 때, 갈 곳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될까요. 인생의 황혼이 되어서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행복한 표정으로 주님 품으로 갈 때, 아무도 불러주는 사람이 없어서, 갈 곳 없이 방황하다가, 지옥으로 가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비참하겠습니까?

 

그래서 여러분, 영적으로 길 잃은 사람은 내 남편이 될 수도 있고, 내 아내가 될 수도 있고, 나를 낳아주신 내 부모님이 될 수도 있고, 내 형제들, 일가친척, 사랑하는 죽마고우가 될 수도 있으니, 내가 이 길을 아는 사람으로서 어찌 그를 그냥 편안하게 바라볼 수가 있을까요. 그래서 이 복음 전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생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이 문제를 답해줄 사람은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이, 십자가 지시고,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셔서, 그 길은 분명하고, 명쾌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원하옵기는, 우리 꿈의 교회 성도님들이, 주님께서 제시하신, 그 분명한 길로 잘 달려가, '아버지 집' 에 넉넉히 들어가고 남음이 있는 귀한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