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의 왕
마 21:1- 11
이번에 카톨릭에서 새 교황이 선출 되었습니다. 교황이 선출될 당시, 새 교황을 보기 위해서 성 베드로 광장에 20만명이 모여 이탈리아 말로 ‘Viva Papa’ 를 외쳤습니다. 번역하면 ‘교황만세’ 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 19일에 새 교황의 첫 공식미사를 하는데 어떤 사람들이 참석했냐면, ‘앙겔라 메르겔 독일 총리, 마리아노 스페인 총리, 장 마르크 프랑스 총리, 유럽연합 상임의장, 미국에서는 죠 바이든 부통령, 브라질 대통령, 짐바브웨 대통령, 대만 총통’ 벨기에 국왕 부부’ 등 180개의 나라들에서 대사들과 국가 수장들이 대검 참석했습니다.
제가 왜 이렇게 잘 알지도 못하는 높으신 양반들의 이름을 소개했냐면,
우리 예수님께서 2000년전에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와 비교해 보기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오늘은 무슨 주일입니까? 오늘은 ‘종려주일’ 이라고 합니다. 종려주일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해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신 날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많은 사람들이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외치며 환영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황을 보기 위해 성 베드로 광장에 모인 20만명정도야 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기껏해야,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 3만명정도였습니다.
교황이나 대통령들은 전용차나 있지요. 우리 주님은 타고 입성할 마차 하나 없어서,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진짜 ‘만왕의 왕’ 이신데 말이죠. 진짜는 이렇게 초라하게 입성하고, 사실 가짜가 더 요란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종려주일에 예수님께서 왜 나귀를 타셔야만 했는지 그 이유를 두 가지 만 살펴 보기를 원합니다.
1) 첫째로,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신 이유는, 겸손의 왕으로 오셨다는 것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5절을 보시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
여러분! 우리 예수님은 겸손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세상에 나귀를 타는 왕 보셨습니까? 어떤 왕이 나귀를 탑니까? 적어도 왕이라면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왕이라면 황금 마차를 타던지, 대통령 전용 캐딜락 방탄차를 탑니다.
그러면 황금마차를 탄 왕과 나귀를 탄 왕은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우선 황금 마차를 탄 왕 주변은 삼엄한 경비를 합니다. 그래서 일반 서민들은 접근 할 수 가 없습니다. 그런데 나귀를 탄 왕의 주변은 아무나 접근 할 수 있습니다. 나귀는 키가 작은 동물이기에 어린 아이까지도 가까이 가서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도 가서 만날 수가 있고, 사회에서 소외되고 버림 받은 사람들도 가서 만날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낮고 천한 저와 여러분들을 만나 주시기 위해서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겸손의 왕으로 오셨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나귀만 타신 것이 아닙니다. 태어나실 때에도 마구간의 말 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또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는데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고 하실 정도로, 예수님께서는 쓰러져 가는 집 한 채도 없이 사셨습니다.
왜 이렇게 사셔야만 했습니까?
저와 여러분들을 만나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 베드로 성당 같은 곳에 사셨다고 해봐요. 감히 어떻게 만날 수 있습니까?
집이 없으시니까, 가난한 나사로의 집에서도 주무시고, 세리 삭개오의 집에도 가시고, 간음한 여인도 만나 시고, 귀신들린 자도 만나시고, 각종 병자들을 만나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요,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날까지 겸손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3:4절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다’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발을 씻겨주기 위해서는 무릎을 꿇어야 하는 것이죠. 세상의 모든 권세를 다 가지신 만왕의 왕이 오히려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해가 되십니까? 죽으시기 바로 전 날까지 무릎을 꿇고 섬기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나의 창조자입니다. 나를 만드신 분입니다. 창조주가 피조물 앞에서 무릎을 꿇고 섬긴다는 것이 인간의 머리로 이해가 되십니까?
오늘 본문 2절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두명의 제자들을 맞은편 마을로 보냅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말씀 하시냐면 ‘맞은편 마을로 가면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3절에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 왜 남의 나귀를 끌고 갑니까? 당신들 도둑들 아니요? 하면 ‘주님께서 쓰시겠답니다’ 라고 말만 하면 즉시 보낼 것이라는 말까지 일러 줍니다.
그렇게 해서 7절에 보시면,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는 제자들이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펴고, 예수님께서 그 위에 타게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 제자들이 나귀 두마리를 끌고 왔습니다. 어미 나귀와, 어린 나귀, 이렇게 두마리를 끌고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둘 중에 어떤 나귀를 타셨을까요?
본문 5절을 보시면, “짐승의 새끼”를 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미 나귀를 탈 수 있었을텐데, 나귀 새끼를 타셨어요.
우리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왕이면, 크고 넓고 튼튼한거……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 한번 상상해 보세요. 보통 어미 나귀의 키가, 나귀 등까지 3 feet 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어린 나귀는 그 보다 더 작겠죠. 그리고 당시 예수님의 키를 6 feet 정도로 추산하면, 예수님의 발이 땅이 끌렸을 거라는 것이 일반적인 학자들의 의견입니다.
여러분 상상을 한번 해 보세요.
6 feet 되는 건장한 청년이 아주 작은 새끼 나귀를 타고 길을 간다고 생각해 보세요. 폼이 납니까? 볼품이 없었을 것입니다. 만왕의 왕이라고 하면서,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Palm Tree) 흔들어 대죠. 그런데 고작 왕이라고 하는 사람은 어린 나귀나 타고 간다고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의 발은 땅에 질질 끌리죠 ……차라리 걸어가는 편이 낳았을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아이들 소꿉장난하는 것 같이 유치하고 초라한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이 모습이 겸손의 왕 우리 예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 같으면 이런 나귀 타지 않을 것입니다. 창피해서 그거 어떻게 탑니까? 최소한 현대 소나타 정도는 타야죠.
16세기에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마틴 루터와 쯔빙글리는 개신교 역사에 큰 획을 그은 아주 대단한 분들입니다. 이 두 분이 종교개혁을 해 나가면서 다른 것은 생각이 같았는데, 성만찬 (주의 만찬) 에 대해서 만큼은 견해가 달랐습니다.
마틴루터는 원래 카톨릭 신부였기 때문에, 성만찬이 카톨릭 쪽에 가까웠습니다.
그리고 쯔빙글리는 지금의 개신교쪽에 가까웠어요. 이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눌 때마다
의견충돌로 서로 얼굴을 붉히기가 일쑤였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두 사람이 스위스의 어느 산을 함께 오르게 되었는데, 마침 그때 두 마리의 염소가 매우 좁은 다리 위에서 서로를 노려보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두 염소는 다리의 중간에서 서로 오도 가도 못하고 곧 한판 싸움이 붙을 것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아래쪽에서
위로 올라가던 염소 한 마리가 다리 위에 납작하게 엎드린 것입니다. 그러자 다른 한 마리가 그 엎드린 염소의
등을 밟고 유유히 다리를 건넜습니다. 그 후에 나머지 염소 한 마리도 자기의 갈 길을 가는 것을 본 것입니다.
함께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루터와 쯔빙글리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서 서로 화해의 악수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겸손이란 이렇게 낮아지는 것입니다. 겸손이란 섬김입니다. 겸손이란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요.
그래서 교회도 마찬가지 입니다. 낮아져야지 한 영혼 구원 할 수 있습니다. 낮아 지지 않으면 어림도 없습니다. 우리가 겸손하지 않으면 우리의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전도는 말로 ‘교회에 나오세요’ 라고 하는 것 보다, 겸손한 나의 모습을 보여주면 전도가 저절로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한 영혼 구원 하시기 위해서 낮은 자의 모습으로 오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종려 주일에 나귀를 타시고, 낮고 천한, 겸손한 자의 그 모습으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것입니다.
2) 두 번째로,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신 이유는, 세상 죄를 짊어 지신 예수님 이심을 나타내시기 위해선 것입니다.
본문 5절을 보시면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말씀합니다.
나귀는 멍에를 매고 일을 하는 짐승입니다. 나귀는 본래 타고 다니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멍에를 메고 일을 하는 짐승으로 알려졌습니다. 나귀는 짐을 잘 집니다. 무거운 짐
을 싣고 끌고 가는 인내가 한이 없는 짐승이 나귀입니다.
이사야 53:6절에 예수님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 시키셨도다”
우리 인간의 모든 죄악을 나귀처럼 혼자 짊어 지신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29절에서 침례요한이 예수님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라고 증거합니다.
예수님은 온 인류의 무거운 죄의 짐을 다 짊어지고 가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죄악의 짐까지도 홀로 지시고 가셨습니다.
세상에서는 출세하고 성공하면 짐을 다 아랫사람에게 지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왕이신데도 불구하고 어떠한 사람에게도 짐을 지우시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의 짐을 대신 져주셨습니다.
복음서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지금까지 누가 이렇게 말한 사람 보셨습니까? ‘내가 너의 인생의 무거운 죄악의 짐을 대신 짊어 질께, 너 혼자 해결 하려고 애쓰지 말고, 내 등에 맡길래’ 라고 말한 이가 예수님 말고 또 있습니까?
여러분!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나귀처럼 저와 여러분의 죄와 허물과 질고를 홀로 지시기 해서서 나귀를 타신 것입니다.
혹 여러분의 어깨에 아직도 벗겨지지 않은 무거운 짐이 여러분을 누루고 있는 분이
계십니까? 그것이 용서받지 못한 죄입니까?
세상에 용서 받지 못할 죄는 없습니다. 주님께서 다 짊어 지신다고 하셨습니다. 주님께 넘기시기 바랍니다.
해결 하지도 못할 것 가지고 혼자 애쓰지 마세요. 주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 고 하셨어요.
혹시 그 무거운 짐이, 미래에 대한 두려움입니까? 그것도 주님에 맡기시길 바랍니다.
인생의 복잡하고 괴로운 문제입니까? 예수님께 맡겨 버리십시오.
물질의 문제입니까? 질병의 문제입니까? 자녀의 문제입니까? 맡기십시요.
그래야 편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시면, 가장 행복한 자가 누구겠습니까? 호산나 외치는 사람들입니까? 아니면 자기의 겉옷을 나귀의 등에 깐 제자들입니까?
가장 행복한 자는 나귀입니다.
만왕의 왕을 태우고 가니까, 그보다 좋을 수는 없겠죠.
물론 예수님을 태우고 가니까, 무거워 힘은 들었겠죠. 그러나 주님을 태우고 가기에 그 힘든 것도 몰랐을 거예요.
여러분, 믿음 생활하기 힘이 듭니까? 여러분의 인생에 주님을 모시고 살기에 힘이 드십니까? 인생 한번 즐기면서 살아야 하는데, 왜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은 많은지.
이 짧은 인생 주님 태우고 가야 하기에, 내 맘대로 살지 못해 속상하십니까?
그런데요.
주님 태우고 갈 때가, 가장 행복할 때입니다.
지금 저의 말이 이해가 안가시면, 아직 주님을 태우고 가신 경험이 없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한번 주님 태우고, 주님 모시고 인생을 살아보세요.
그러면 반드시 ‘이것이 행복이구나’ 알게 될 것입니다.
2절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어떤 나귀를 택하셨습니까? ‘묶여 있는 나귀를 택하여 풀어 오라’ 말씀합니다.
죄악 세상에서 묶여 있는 저와 여러분들을 풀어, 주님은 함께 가자고 말씀합니다.
그런데도, 싫다고 하시겠습니까?
여러분, 주님 태우고, 주님과 함께 가는 것이 최고의 복입니다.
2000년전 종려주일에, 주님께서는 이렇게 초라하게 겸손한 왕의 모습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고, 변변한 마차 하나 없이 올라가셨습니다. 오로지 가진 거라곤, 저와 여러분의 ‘죄의 짐’ 보따리 였습니다.
그 예수님을 다시 한번 기억하시면서, 이 한주간은 고난주간/ 수난 주간입니다. 이 고난과 수난이 나를 위한 것이었다는 것을 잊지 마시고, 남은 인생 주님 내등에 태우시고, 함께 좁은 길 걸어가시는 귀한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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