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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의 창고/ 비전나리의 설교

2013년 3월 17일 주일설교: 경청하고 계십니까? - 막 10:46-52

by Peartree 2013. 3. 17.

경청하고 계십니까?

  10:46-52

 

어느 날 남편이 집에 와서 부인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내가 오늘 직장에서 들었는데 여자가 남자보다 두 배나 말을 많이 한데 라고 하면서 남자는 하루에15,000 단어를 말하고, 여자는 약 30,000 단어의 말을 한데 라고 하니까, 아내가 “왜 그런지 아세요?”하고 물었답니다.

“왜 그런데? 라고 남편이 묻자 아내가 대답했습니다. 남자들은 우리 아내로 하여금 똑같은 소리를 두 번씩 하게 만드니까 두 배일 수 밖에 없죠” 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남편이 뭐라고 했을까요? “뭐라고?”하더랍니다. 그러자 아내가 다시 말합니다. “남자들은 우리 아내로 하여금 똑같은 소리를 두 번씩 하게 만든 다고요!라고 두 번 대답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오늘은 경청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우리 인간이 말을 배우기까지는 2년 이면 족하지만 듣는 것을 배우기까지는 60년이 걸린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토록 말하는 것은 쉽지만 듣는 것은 그 만큼 인내가 필요하며, 훈련을 필요로 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말로는 사람을 시험에 들게 만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말에는 실수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듣는 것은 사람을 시험에 들게 하진 않습니다. 오히려 말을 들어주면 상대방이 아주 좋아합니다. 말을 들어주는 것이 때로는 마음의 상처를 치료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시험에 드는 사람들이 많은 교회는 말이 많은 교회입니다. 그러나 듣기를 즐겨하고, 성도간의 아픈 심정을 들어 주기를 즐겨하는 교회는 시험 꺼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원하옵기는 우리 우리 교회 성도님들은 말을 하는 것보다 들어 주는 것을 더 즐겨하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그래서 듣는 것이 우리 삶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는 지 모릅니다.

사람들이 실패하고 고난을 당하는 이유의 대부분은 듣지 않아서 그런 것이 너무도 많습니다.

성경은 보시면, 제대로 듣지 않아서 실패를 경험한 사람들이 참 많이 나옵니다. 에덴 동산의 하와는 남편 말을 잘 듣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는 말을 아담에게 했습니다. 그리고 아담은 하와에게 그 말을 전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러시는데, 선악과를 따 먹는 날에는 정녕 죽을 것이래 라고 말을 해주었어요. 그런데도 하와는 남편의 말을 건성으로 들었습니다. 그래서 인류최초의 죄가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복음서에도 보시면, 예수님께서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말씀하시면서 제발 듣고 깨달으라고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듣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이 있었어요.

 

오늘 본문 47절을 보시면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았다가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를 질러 예수님을 불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소경 바디매오가 눈을 눈을 뜰 수 있었던 이유는, 듣는 귀가 열렸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귀가 있다고 다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귀가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귀가 있어도, 복음을 듣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무리 예수 믿어 천국에 가야 합니다.’ 라고 가까운 사람들이 이야기를 해주어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관심도 없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어떻게 하면 우리가 잘 경청하는 사람이 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본문에서 찾아보며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1)  첫째로, 우리가 잘 경청하기 위해서는 머물러 서 있어야 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본문 49절을 보시면 소경 바디메오가 다윗의 자손 예수여라고 부를 때, 예수님께서는 가던 길을 멈추시고 머물러 서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현대를 살아가는 요즘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참 바쁘게 움직입니다. 그래서 머물러 서서 이웃의 말을 들어 줄 여유가 없어 보입니다. 일주일에 한번 하나님 전에 나와 1시간 예배 드리는 것 조차, 부담스러워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일주일은 168시간이예요. 그 중에서 2시간도 내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한번은 사탄이 예수님의 모습으로 가장하여 어떤 사람에게 나타나서는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나는 예수다. 나를 믿고 따르라라고 하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 사람이 믿고 따라 갈까 말까 한참을 망설이고 있는데, 이 사탄이 기다리다가 지쳤는지 이렇게 말하더라는 거예요. 믿지 않으면 나는 다른 사람에 간다. 난 참 바쁘거든 하고 말 하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 사람이 이건 절대로 예수님이 아니야 라고 하면서 사탄아 물러가라 라고 했다고 합니다.

사탄은 우리들을 바쁘게 움직이게 만듭니다. 괜히 하는 일 없이 바쁘게 만들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시간도 없게 만듭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렇지 않으셨어요. 우리 주님은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의 말을 듣기를 주저하지 않으셨어요. 가던 길을 멈추시고 머물러 서서는 들어 주시기를 즐겨하는 주님이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소문을 듣고 불쌍한 소경 한 사람이 자기의 어려움을 토로하며 예수님을 부르며 소리 지르는 장면이 소개 되고 있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나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이 소경의 소리지르는 모습을 보았던 대부분들의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아주 부정적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외침을 단순히 시끄러운 소리로만 생각했습니다. 듣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소경의 외침에 무관심했습니다. 그래서 48절에 보시면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십니까? 49절에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것이 바로 경청의 자세인 것입니다. 경청은 이웃들의 소리를 듣기 위해 머물러 서는 것입니다.

 

경청이란 분주한 발걸음을 잠시 멈추는 것 입니다. 그리고 이웃의 소리를 듣는 것 입니다. 경청은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닙니다. 진지한 경청은 몸과 눈과 마음까지 멈추어 서서는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왜 예수께서는 길을 가다가 머물러 서셨을까요? 호소하는 소경에게 관심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사랑의 첫째 의무는 경청하는 것이다” (The first duty of love is to listen)는 말을 했습니다. 사랑은 이웃의 작은 신음소리에도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아마 이 소경이 큰 소리가 아닌 작은 신음소리로 외쳤어도 예수님은 여전히 그의 외침에 귀를 기울였을 것 입니다.

 

그래서 이런 찬양 가사가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의 눈으로 너를 어느 때나 바라 보시고 하나님 인자한 귀로써 언제나 너에게 기울이시니…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이 땅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오늘 본문의 바디메오처럼 지금도 여전히 예수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기도하면 주님께서 우리의 기도뿐 아니라, 숨소리까지 경청하심을 믿기 때문에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저와 여러분들도, 잠시 가던 길을 멈추어 서서, 듣기를 즐겨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이렇게 듣기를 즐겨하는 사람이 복을 받습니다.

복음 듣기를 즐겨하는 사람이 구원을 받습니다.

이웃의 아픔이나, 슬픔을 함께 나누며 귀를 기울여 들어줘 보세요. 그 안에 평강이 넘침입니다. 교회는 시험 드는 사람도 없어 질 것입니다.

그렇다고 오늘부터 입 꾹 다물고 다니시지 마시고듣기를 즐겨 하라는 것입니다.

 

2)  두 번째로, 잘 경청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마음을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51절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소경 바디메오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예수님께서 이렇게 물으신 이유는, 그 사람의 아픔을 같이 나누기 위해서 그렇게 물으신 것입니다.

커뮤니케이션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공통적인 발견은 언어로 하는 의사소통은 45%미만이고 55%이상이 바디랭귀지 같은 비언어로 의사소통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마음으로 얼마든지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피터 드러커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의사소통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상대방이 말하지 않은 소리를 듣는 것이다” 심리학자들은 이런 것을 “제3의 귀(The third ear)로 듣는다”고 말해왔습니다.

 

요즘은 3의 귀로 듣는다 이런 말 쓰지 않습니다. 이것을 쉬운 말로 공감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공감은 서로의 마음이 같은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바디메오에게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라고 물으실 때, 예수님께서는 이미 바디메오의 소원이 눈 뜨는 것인줄 알고 물으셨습니다.

 

바디메오야! 앞을 보지 못하니까, 참으로 답답하지? 나도 너의 그 답답한 마음을 이해 할 것 같아! 그래 내가 널 위해 무엇을 해 줄까?이것이 주님의 마음이었습니다. 상대방의 아픔을 함께 공감하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대화를 할 때나 아니면 남의 말을 경청할 때, 이 상대방의 아픔을 함께 공감하는 마음이 없으면 그 대화는 냉냉해 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상대방의 입장에서 서서 대화를 해보세요. 여러 말 하지 않아도 우리는 영적인 존재들이기 때문에 저 분이 나의 말을 들어주고 있구나!’ 대번에 압니다. 그런데요. 아무리 웃는 낯으로 대화를 해도요, 거기에 함께 아픔을 공감하는 마음이 없으면 그것 역시도 사람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저분이 지금 나의 말을 전혀 듣지 않고 있구나!’ 대번에 알 수 있다는 거예요.

 

우리는 예수님의 경청하시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의 속 사정을 함께 고민하면서 대화를 하고 계셨다는 거예요.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라고 물으실 때, 소경은 그의 속 마음을 그대로 내어 놓습니다.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여러분 우리가 사람들과 대화 할 때, 이 마음을 가지고 대화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저 분에게 어떤 도움이 되야 될 텐데 라는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대화를 하면, 그 대화는 아주 수준 높은 대화입니다. 최고의 대화입니다.

 

우리 옆사람 보면서 한번 따라 보시겠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해 주길 원하십니까?”

 

최근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책이 있는데 제목이 경청 이라는 책입니다. 주인공  토벤이라는 사람은 별거중인 아내와 발달 장애아들을 둔 30대 후반의 직장인입니다. 평소에 그는 ‘알았다’는 말을 달고 살았던 자기 편한 대로만 모든 것을 이해하고 결정하는 스타일이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회사에서 레이오프 당하고 가까스로 사업을 시작한 것이 악기 대리점이었습니다. 그런데 오픈 하는 날 불행히도 그는 어지럼증으로 쓰러집니다. 그리고는 불행히도 듣지 못하는 청각 장애인이 됩니다.

 

그리고 그는 그 사건을 통해서 자신을 깨닫게 되는데, 예전에 내가 남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 않는 병이 있었구나’ …라는 것을 뒤늦게나마 깨닫게 됩니다그래서 그는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고 결심합니다. 그리고는 우여 곡절 끝에 자기가 근무하던 악기 제조 공장에 들어가 청각 장애인으로 멸시를 받으며 바이올린 제작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장애인 이었기에 그는 평소 보다  몇 배의 노력을 기울여 사람들의 말을 경청합니다. 그래서 그가 인생의 마지막 시간에 배운 가장 소중한 레슨은 이웃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자신의 아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기는 유언은 이것이었다고 합니다. 귀 기울여 듣는다면 사람의 마음까지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의 말에 귀 기울여 듣지 않으면 그 사람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예수님의 경청의 습관을 닮아 가시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시길 바랍니다.

,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하는 습관을 사모하십시오.

 

지금 시대는 어떤 시대입니까?

모두가 마음에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아픔을 들어줄 누군가를 찾는 시대이기도 합니다.

이런 시대 가운데, 모두가 자신의 말만 하다면, 누가 위로를 받고, 누가 상처를 치유 받겠습니까? 들어주는 사람도 있어야지요?

원하옵기는, 우리 꿈의 교회 성도님들은, 말하기보다는 들어주기를 즐겨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들어 준다고 해서 건성으로 들어서는 안됩니다.  주님처럼 아무리 바쁘다 하더라도, 곁에 머물러 서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 곁에 서 있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사람의  아픔과 슬픔을 함께 나누며 함께 공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듣기를 잘 하신다면, 이 교회는 시험에 드는 사람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모두가 기쁨과 평강 가운데 믿음생활 할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날로 성장하며 풍성한 열매가 주렁주렁 맺히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