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설교자의 창고/ 비전나리의 설교

영적 예배 - 로마서 12:1 , 요 4:23-24

by Peartree 2012. 12. 25.

영적 예배

로마서 12:1 , 요 4:23-24

 

미국 워싱턴에 있는 어느 교회에서, 굉장히 유명한 목사님을, 주일예배 게스트 스피커로 초청을 했습니다. 그 초청 받은 목사님은, 그 교회 담임목사님의 형님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오시기로 한 그 주일에 형님인, 강사 목사님이 병이 나서 오시지 못하게 된 거예요. 예배 시간이 다 되어가자, 사람들은 꽉 들어 찼고, 담임 목사님은 예배를 시작하기 전에, 이 사정이야기를 먼저 해야 될 것 같아서, '오늘 강사 목사님이 몸이 아파 못 오시게 되었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웅성웅성하고, 술렁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더니, 어떤 사람들은 일어나 가버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때, 동생 되는 담임목사님이 이렇게 말하면서, 예배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저의 형님이 오시지 못하게 되어 매우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혹시 이중에 저의 형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오신 분들이 계시면, 지금 일어나 돌아가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날의 예배는 그 어느 때 보다 큰 감동의 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유명한 설교자의 유창한 설교도 아니고, 예배는 찬양도 아니고, 기도도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예배를 드리기 위한 하나의 형식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예배란,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드리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래서 예배는 드리는 것이지, 보는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우리교회 성도님들은, 혹시 다른 교회 성도님들이, '주일예배 잘 봤어!' 라고 물으면, '이 사람아! 예배는 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드리는 거야' 라고 바로 얘기해 주십시요. 그러면, 여러분들을 보는 시각이 달라 질 것입니다.

예배를 본다고 생각하니까, 앞에 이야기한 교회처럼, 유명한 강사 목사님을 볼 수 없으니까, 집에 돌아가는 거예요. 그러므로 예배는 보러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오늘 본문이 말하고 있습니다. '너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예배는 너희 자신을 드리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즘은요, 유비쿼터스 시대라고 해서, 스마트폰만 있으면, 어디서든지, TV를 보고, 얼굴을 보면서 대화를 하고, 필요한 정보를 다 알아낼 수 있습니다. 스마트 폰으로, Papa Jones Pizza를 치면, 지금 내가 있는 위치를 중심으로, Papa Jones Pizza 집을 다 찾아주고, 길도 알려줍니다. 또 가격은 얼마나 되는지, 영업시간은 몇시부터 몇시까지 인지, 다 알려줍니다. 얼마나 편리한 시대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시대에 맞게 예배도 참 편리하고 간단하게 드렸으면 좋겠는데, 기독교 6000년 역사 가운데, 다른 건 다 변해도, 하나님께 예배하는 이 기본원리 만큼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세상이 편리하게 변하는데, 너희들도 편리하게 예배 드려라' 우리 하나님은 절대 그렇게 하지 않으시다는 거예요.

 

예를들어, TV 앞에서 감동적인 설교를 듣고, 마음에 위로를 얻었다고 해서 그것은 예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파이프 오르간이 설치된 웅장한 교회 건물 안에서, 몇 백명의 성가대가 찬양을 하고, 감동적인 설교를 듣고, 점심은 깔끔하게 차려진 한식으로 식사를 대접 받고는, 차를 타고 집으로 오면서, 옆 사람에게, 이렇게 말하죠. '오늘 예배 정말 감동적이고, 정말 훌륭한 예배였어 ' 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것이 정말 하나님께서 받으신 예배인 거 같습니까? 아니면, 분위기에 압도된 감정 일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을 해보지는 않으셨습니까? 예배는요. 내가 좋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좋으셔야 예배인 것입니다. 예배는요. 내가 감동 받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을 감동시켜야 예배인 것입니다. 찬양도 좋고, 설교도 좋고, 분위기도 좋은데,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았다면, 그 예배는 하나님께서 받으시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예배는 어떤 예배입니까? 우리의 마음을 드리는 예배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만 가지고 오면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1:11절에 보시면, 너희들이, 수많은 제물을 드리는 것에, 나는 싫증이 났다, 짐승을 가지고 나올지라도, 나는 기뻐하지 않는다.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는 것은, 내 마당만 밟을 뿐이라고 말씀하시죠. 마음을 드리지 않으면, 마당만 밟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냥 형식에 맞춰, 제물을 드리고, 성전에 오기만 하면, 예배 드리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예배는 어떤 예배인지, 전혀 고민 한번 해보지도 않고요.

 

어떤 목사님이, 성도 중에 비즈니스를 하시는 분이 있어서, 심방을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주인은 없고, 종업원이 가게를 보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부랴부랴 그 종업원이, 주인에게 전화를 걸어서, 목사님이 심방 오셨다고 하니까, 종업원에게 무슨 말을 남기는 것 같았습니다. 전화를 끊자, 목사님이 뭐라던가요? 물으니까, 종업원이, 하는 말이 '이왕에 오셨으니까, 예배나 드려주고 가라는데요' 하더랍니다. 예배는 복 빌어 주는 것도 아닙니다. 예배는, 철저히 내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영어로 예배를 'Service' or 'Worship' 이라고 합니다. Service는 한국어로, '섬기다' '봉사하다' 라는 뜻입니다. 누구를 섬기냐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말합니다. Worship 은 Worth + Ship 의 합성어 입니다. Worth는 '값진'이란 뜻이고, Ship 은 'Relation' 을 말합니다. 그래서 Worship 이란, '값진 교제' 즉, 하나님과의 교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를 받으시는 분도 하나님이고, 예배 가운데 우리가 만나야 하는 분도 하나님입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는 어떤 예배이며, 또한 우리는 하나님이 받으시는 영적 예배를 드리고 있는지, 본문에서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1. 첫째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는, 살아 있는 예배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너희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어 성경이 좀 더 정확하게 번역해 놓았습니다. "as living sacrifices" 살아 있는 제물같이, 너희 몸을 드리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죽은 것은 받지 않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배는 살아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살아 있는 예배는 어떤 예배입니까? 찬양이 살아 있는 것이 살아 있는 예배입니까? 그렇지는 않을 거예요.

살아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의 차이점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우선 살아있는 사람은, 한끼라도 굶으면, 배고파합니다. 죽은 사람은 배고픔을 느끼지 못합니다. 살아있는 사람은 갈증을 느끼지만, 죽은 사람은 아무런 갈증도 느끼지 못합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 입니다. 살아있는 신앙은, 영적 갈증을 느끼게 되어 있어요. 기도를 해도, 찬양을 해도,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도, 늘 부족한 거 같아요. 그래서 하나님을 더 찾게 되고, 더 예배하고 싶은 것이 살아있는 성도의 특징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 보시면, '우물가의 여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우물가의 여인은, 수가성의 여인이라고도 하데, 남편이 다섯명씩이나 있었을 정도로, 삶이 평탄하지 않은 여인이었습니다. 늘 자신은 불행하다고 느꼈으면, 그로 인해서, 대인기피증이 생길 정도로,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두려워 했는지, 보통 우물은 아침이나, 저녁에 이웃 여인들과 함께 길러 나오는법인데, 이 여인은 우물가에 사람이 없는 틈을 타 혼자 물을 길러 나왔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는 이 여인을 만나기 위해서, 기다리고 있다가, 이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 라고 하시면서 말을 걸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생수 이야기를 하게 되고, 주님께서는 '내가 주는 물을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다' 라고 하시면서 그 여인에 말을 겁니다. 그러자 그 여인은 그런 물이 있으면, 내게 주어 '목마르지도 않고,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말합니다. 그러면서, 이 여인이 갑자기 대화의 주제를 예배로 바꿉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 했는데, 당신들은 예배 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고 합니다. 대체 어디에서 예배를 드려야 맞습니까? 라고 묻습니다.

 

이 여인의 삶은 그렇게 행복한 삶은 아니었어요. 하지만 그 속에, 하나님께 만큼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드리고 싶은 영적인 목마름이 늘 자리잡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자 마자, 물어본 것이 '예배에 관한 것' 였습니다. 이런 예배에 대한 타는 목마름이 있어야 합니다. 예배에 대한 갈증을 가지고 드려야, 살아 있는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갈증도 없이, 사모하는 마음도 없이, 억지로 드린다면, 앞으로는 사모하는 마음으로 바뀌어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사모하는 영혼의 예배를 기뻐 받으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저희 교회 홈페이지 가보시면, '누가 함부로 예배를 드리는가?' 라는 제목으로 '참된 예배자' 의 모습을 소개한 글이 있습니다. 거기 보시면, 이틀을 걸어서 예배 드리러 온 아프리카의 두 자매의 사진이 있습니다. 주일 예배 한번 드리기 위해서, 이틀을 걸어오니까, 앉을 자리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서서 예배를 드리는 사진이 있습니다. 또 다른 사진이 있는데, 이 여인은 아예 예배를 드리기 위해, 집에서 부터, 의자를 머리에 메고, 떠나는 모습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사진은, 옥수수 한알 한알 병에 주어 담는 아프리카 소년의 사진입니다. 그리고 이 옥수수를, 주일예배에 헌물로 드리는 사진이 있습니다.

이들은 이틀이라는 거리를 초월하여 예배를 드립니다. 불편한 것도 초월합니다. 당장 없으면, 죽을 수도 있는, 옥수수를 아낌없이 드리면서 예배를 드립니다.

 

왜 그렇게 할까요? 그렇게 넉넉하지도 않은데요. 이들에게 있어서 예배는 생명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갈망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이렇게 예배하는 찾고 계십니다. 우리 꿈의 성도님들이 이렇게 예배를 사모하며, 갈망하시는, 참된 예배자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1. 두번째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본문 요한복음 4:23, 24절을 보시면, "예배하는 자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해야 한다고"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신령' 이란, 영적인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영으로 드려지는 예배를 말합니다. 또 '진정' 이란 말을 진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진실의 반대는, 허위 또는 거짓말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데, 거짓으로 드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 목사님 거짓예배도 있습니까? 물론 거짓예배가 있습니다.

성경을 찾아 보면 수도 없이 많습니다. 삼상 13:9절을 보시면, 사울왕이 선지자 사무엘이 오지 않으니까, 그만 기다리지 못하고, 자기 맘대로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시간은 없고, 백성들은 빨리 제사를 드리라고 재촉을 하니까, 어쩔 수 없이 사람의 눈치를 보고 예배를 드렸어요. 그냥 형식적으로 드린 것입니다. 그러자 나중에 사무엘이 와서 뭐라고 그러냐면,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고, 하나님께서 다른 왕을 세우셨다' 고 청천 벽력 같은 소리를 합니다. 이렇게 거짓으로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떠나버린다는 것입니다. 이 것은 저주에 가까운 거예요.

 

그런데 예배를 사모한, 다윗왕을 보세요. 하나님께서 너무도 이뻐하셨습니다. 다윗은 '내 마음에 합한자' 다. 어쩜 그렇게 내 마음에 속 드냐? 이 말을 한 것입니다. 다윗의 예배에는, 순수함이 있었습니다. 옷이 벗겨지는 줄도 모르고, 왕이 체면도 없이, 춤추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궤를 자기 장막에 들여놓고, 틈만 나면, 그 앞에 엎드려,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다윗은요. 예배를 잘 드림으로 축복 받은 사람입니다.

 

여러분 예배가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잘 못드리면, 저주요. 잘 드리면 축복입니다.

 

어느분이 과거에 자기가 드린 예배가 거짓 예배 였다고, 고백하며 쓴 글이 있습니다.

 

'나는 실로 오랫동안 거짓 예배자였다. 평신도 시절, 6일 동안 세상 사람과 별다를 바 없이 살다가 주일이면 교회에 나가, '하나님 지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도하였다. 예배가 쇼라던가? 나는 예배를 거룩하고 고상한 쇼로 즐겼다. 잘생긴 목사님, 성우같이 청명한 설교자, 눈물을 쏟게 만드는 성가대 찬양, 나는 형벌 받을 죄인이며,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은 사도신경의 고백으로 끝내 버리고, 예배를 마칠 때면, 스스로 만족을 느끼며 교회를 떠났다. 이제 나는 고백한다. 나는 실로 거짓 예배자 였다는 것을..

 

여러분 오늘 본문 23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느니라" 지금 이 시대에, 예배자는 참으로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예배자는 몇 명이나 되는 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과연 나는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만한, 진실한 예배를 드리고 있는지요.

 

여러분 예배가 얼마나 중요하냐면요.

기독교의 전통중에, 가장 오래된 전통이 이 예배입니다. 창세기 3장에 보시면, 아벨의 제사를 통하여 예배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킨, 이유가 광야에서 예배를 드리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러면서, 이 예배는 지금까지, 변함없이 이어져 왔습니다. 마지막때에 요한 계시록에 보시면, 마지막 까지 믿음을 지켰던 성도들이, 어린양의 보좌 앞에서, 찬양하며 하나님께 예배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믿음생활의 기본입니다.

 

지금은 돌아가신, 옥한흠 목사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어요. '예수를 믿지 않으려고 하다면, 간단 합니다.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됩니다.' 라고 말씀 한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성도라면, 반드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예배는 어떤 예배여야 합니까?

 

살아 있는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지는 예배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힘차고 패기 넘치는 예배가 살아있는 예배가 아니고, 살아 있는 예배란, 나를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입니다.

바래새인들 처럼,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두손을 들고, 거룩한 것 처럼, 나를 드러내는 예배가 아니라, 멀리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며, 나를 하나님께 내어 놓은 예배, 이런 예배가 진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입니다.

 

우리 귀한 성도님들이, 이런 참된 예배자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