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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의 창고/ 비전나리의 설교

2013년 7월 31일 수요설교 : 사랑 - 요한 1서 4:7-12

by Peartree 2013. 12. 11.

사랑

 요한 1 4:7-12

오늘 본문을 기록한, 사도 요한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이렇게 중얼거리면서 다녔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서는 예외없이 더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요한은 간음현장에서 붙잡힌 죄 많은 여인을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목격하고 그 사실을 그의 복음서에 기록했습니다.

요한은 자기들의 더러운 발을 씻기시는 예수님을 목격하고 그 사실을 그의 복음서에 기록했습니다.

요한은 십자가에 달려서도 자기를 못박는 원수들까지 용서하시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이 놀라운 사실을 목격하고 그 사랑을 복음서에 기록했습니다.

요한은 또한 배반자 베드로를 예수님이 사랑으로 용서하시고 그에게 새로운 사명을 맡기시는 사랑의 장면을 목격하고 그 사실을 그의 복음서에 기록했습니다.

 

여러분, 사랑을 볼 줄 알, 사랑을 느낄 줄 알고, 사랑을 평생토록 기억하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예전에 한 번 들었을 법한 이야기입니다.  옛날에는 너무 먹고 살기 어려웠던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나이든 부모님을 먼 산에다 버리는 고려장 이라는 악습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 당연히 산에다 버렸습니다.

어느 가정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나이든 어머니를 아들이 지게에다 지고 산으로 가는 중이었습니다. 깊은 산으로 어머니를 버리기 위하여 가는 길이니, 이 아들은 할 말도 없었습니다. 아들은 고개를 숙인채 지게를 지고 헐떡이며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얼마를 가다 보니 지게 위에 있는 어머니가 종종 나무 가지를 꺾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아들이 계속해서 나무 가지를 꺾는 어머니에게 왜 그렇게 가지를 꺾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지게 위에 있는 어머니가 대답하기를 나를 버리고 네가 돌아오는 길에 산이 깊어 혹시라도 방황하여 길을 잃지 않게 하려고 그렇게 한다는 답이였습니다.

그러면서 어머니는 덧붙이기를 혹시 길을 잃으면 꺾인 나무 가지를 찾으면 쉽게 길을 찾을 수 있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아들은 어머니를 산에다 버리려고 하는데 어머니는 아들의 행동과는 상관없이 그냥 아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마 이런 것을 진정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상대방의 행동과는 관계없이 그냥 사랑하는 것이 바로 진정한 사랑입니다.

 

로마서 5:8절에도 보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싫어하고 배반하여 죄를 짓고 제멋대로 살고 있을 때에, 다시 말해서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시고 영원히 죄값으로 죽어야 할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아들을 십자가에서 제물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아들을 죽게 하심으로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사랑의 징표로 금이나, 다이아몬드로 된 반지를 주거나 목걸이를 만들어 주기도 합니다. 발렌타인 데이라는 날이 있습니다. 젊은이들이 즐겨 지키는 날입니다. 사랑하는 남자에게 여자가 용기를 내어 초콜릿을 주는 날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징표로 사랑하는 독자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 주어 죽게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아들의 귀한 생명을 주어 얼마나 저와 여러분들 사랑하시는지를 실제로보여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이같은 행동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다 고 말슴하십니다. 일방적이고, 희생적인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사 아들을 화목제물이 되게 하기까지 사랑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바로 진정한 사랑, 사랑다운 사랑은 여기에 있다고 선언합니다.  

 

본문 10절을 보세요. 사랑은 여기에 있다 라고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헤메고 뒤져도 참 사랑은 여기에 만 있습니다. 이런 사랑은 아름다운 노래 속에서도 찾을 수 없고, 연인들의 달콤한 속삭임에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분명히 진정한 사랑이 있는 곳은 바로 여기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고 있는 여기란 어디입니까?

여기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확실하게 나타난 곳인데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 아들 예수님께서  인간 사랑의 최고의 본을 보여주시려고 제물되신 장소, 바로 골고다 언덕, 십자가가 세워진 그 장소입니다. 그곳이 사랑이 가장 강하고 분명하게 나타난 곳입니다. 바로 여기라고 지적하는 곳은 다른 곳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의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이 되신 십자가 그곳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참 사랑을 찾기를 원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나오면 됩니다. 진정한 사랑을 발견하고 그 사랑을 누리기 원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나오면 됩니다. 영원한 사랑을 소유하기를 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나오면 됩니다.

우리 귀한 성도님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이 사랑을 깨닫고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가 목사시취를 할 때, 면접관 목사님께서 질문 하기를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질문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독자 아들예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셔서 죽으신 곳입니다.’ 라고 대답했는데, 나중에 알고 나니까, 반쪽짜리 대답이었습니다.

십자가

하나님의 최고의 사랑의 장소이면서, 하나님의 공의가 같이 실현된 장소 이렇게 대답해야 100점짜리 대답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나중에 다룰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곳 십자가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인간 사랑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긴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 편에서 인간을 일방적으로 먼저 사랑하신 사랑의 장소입니다. 그 사랑은 끝없는 사랑이요,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이요, 우리의 작은 가슴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깊고, 넓고, 높고, 넘치는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요약하여, 한 마디로 정리하면 요한복음 3:16절입니다. 이 말씀은 성경의 요절이요 기독교의 진수입니다. 성도라면 누구나 이 구절만은 언제나 기억하고 새겨두어야 합니다. 다같이 외워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고 되어 있습니다.

 

어느 날 어거스틴이 성경 요한복음 316절 말씀을 읽다가 크고 강한 충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너무 놀라운 사랑에 감격하여 그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이상하다! 놀라운 사실이다! 내가 만약 창조주 하나님이라면 나는 이 세상을 벌써 박살을 내 버렸을 텐데… 그런데 이상하단 말이야.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다니? 사랑하시되 나 한 사람밖에는 사랑할 사람이 없는 것처럼 그분은 날 사랑하신다. 아니 내가 이 세상에 있는 유일한 생존자라고 하여도 그 분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목숨을 버렸을 것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오늘 말씀을 들으시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도 어거스틴이 깨닫고 발견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영국의 Dr. James Lynch 라는 의학박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는 중에,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머리에는 가시관을 쓰셨고 양손과 양발에는 못이 박혀 있었고, 옆구리에서는 창에 찔려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명상하던 Dr. James Lynch  는 예수님의 사인은 ‘broken heart’ 라는 진단을 내렸습니다. 심장 파열이라는 말입니다.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 뜨겁고 강해서 심장까지 파열되었다는 말입니다. 마치 폭탄이 터지듯이 사랑을 견디지 못하여 예수님의 심장이 파열하면서 그렇게 피를 흘리셨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사랑해도 그 사랑을 알지도 못하고 받지도 않으며 오히려 배반하고 저버리는 인간을 끝까지 사랑하시사 십자가에서 죽기까지의 사랑이야 말로 가슴이 파열하는듯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누가복음 15장에 있는 탕자의 비유에는 놀라운 아버지의 사랑이 나타나 있습니다. 한 부자집에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둘째가 아버지에게 유산을 달라고 하였습니다. 전통적인 풍습에 의하면 유산이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에 남긴 재산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런데 살아계신 부모에게 유산을 요구하는 것은 부모를 죽은 자로 취급하는 아주 못된 행동입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행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재산을 물려받은 아들은 낳아 길러주신 부모님에게 감사하면서 효도할 기회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들은 재산을 모두 모아 가지고 먼 지방으로 도망쳐 버렸습니다. 부모의 간섭없이 제멋대로 살겠다고 떠난 것입니다. 이것도 용서할 수 없는 불효막심 한 행동이였습니다.

그 아들은 먼 지방에 가서 제멋대로 허랑방탕하면서 재산을 탕진하였습니다. 아버지가 힘들여 벌어놓은 재산을 아들은 주색잡기 로 허비한 것입니다.

결국 그 아들은 거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중동 지방에서는 돼지를 방목하는데, 그 돼지를 돌보는 목동이 되었습니다. 너무 배가 고픈 아들은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를 먹으며 겨우 굶주린 배를 채웠습니다. 이 같이 아들이 하는 일은 하나같이 잘못되었고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들이였습니다.

 

이 탕자는 갈곳이 없었습니다. 굶어 죽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아버지의 집을 찾아 돌아왔습니다. 성경에 보면 아버지가 아직 상당한 거리에 있는데도 아들을 알아보고 뛰어 나가 품에 안았습니다. 아들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범하였으니 용서하시고 품꾼의 하나로 써 달라고 하였습니다. 품꾼으로 살면서 굶주리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으로 아버지의 자비를 간청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전혀 아들을 탓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많은 재산을 어떻게 했느냐? 가문의 명예를 실추시겼으니 책임을 져라! 또는 부모의 마음을 이렇게 아프게 할 수 있느냐? 따지거나 묻지 않았습니다. 그냥 받아 들였습니다. 좋은 옷을 입혔고 손에 가락지를 끼웠으며 신을 신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돌아오기만 하면 그냥 받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바로 이런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따지지 않습니다. 과거를 탓하거나 묻지도 않으십니다. 언제나 사랑으로 팔을 벌리시고 찾아오는 사람들을 영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사랑을 깨닫고 이 사랑 안에 사는 귀한 믿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