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설교자의 창고/ 비전나리의 설교

2013년 6월 23일 주일설교 : 내가 두 사이에 끼었으니 - 빌립보서 1: 22-26

by Peartree 2013. 7. 20.

내가 두 사이에 끼었으니

빌립보서 1: 22-26

 

여러분들 혹시 죽음의 문턱에 이르렀거나, 거의 죽을 뻔한 경험이 있으십니까?

저는 이번에 한국을 방문하면서 삶과 죽음에 대해서 평소보다 많은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사람이 이 땅에 태어나는 것도 아주 큰 일이지만, 죽는 것이 더 큰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태어나는 것도 고통이고, 세상 사는 것도 고통입니다. 하지만 죽는 다는 것은 더 고통입니다.

그래서 오죽 했으면, 죽을 때 편안하게 죽는 것이 오복 중에 하나였겠습니까?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저 아픔 없이, 고통 없이, 죽기 전에 고생하지 않고 평안히 죽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아픔 없이, 고통 없이, 죽을 때 고생하지 않고, 죽는 것 플러스 하나님 앞에 어떤 모습으로 서야 하는 지를 또 준비해야 합니다.

그래서 어쩌면, 믿지 않는 사람들 보다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이 더 힘이 들 수가 있습니다.

 

두 사이에 끼었으니


저는 지난 몇 주 동안 병상에 누워 계시는 어머니를 뵙고 왔습니다.

가서 보니까,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우리생각이지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께서 오라고 해야 가는 것입니다. 첫날에는 저를 알아보더니, 둘째 날 부터는 저를 몰라 보더라구요. 저 뿐만 아니라 가족 전체, 또 여러 교인들이 찾아 와서, 권사님 제가 누구예요?” 라고 몇 번씩 되물어도, 오직 하는 말이라고는 아버지라는 말 밖에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저희 누님이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그래 엄마, 아버지만 잊어 먹지 않으면 돼라고 하면서, ‘절대 하나님 아버지 만큼은 잊어버리면 안돼 라는 말을 날마다 귀속에다 대고 말해주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저도 첫날에 도착해서 혹시 하나님 앞에 걸린 것이 있어서 돌아가시지 않는지, 아직 회개하지 않는 것이 남아 있어서 하나님께서 부르시지 않는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엄마, 하나님의 나라는 죄가 떨 끝만큼만 있어도 못 가는 나라야, 누구 미워하는 사람 없지? 누구 용서하지 못한 사람 없지? 몇 번씩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고개를 끄덕 끄덕 하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기 전에, 죽기 전에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것은, 별거 아닌 것 같지만, 미워 하는 사람 있는 상태로 죽어서도 안되고, 용서하지 못하고 죽어도 안됩니다. 하여튼 하나님께 조그만 죄라도 걸리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재차 확인한 것입니다. 평생을 하나님 밖에 모르고 산 분이라 할 지라도 이 용서와 회개 만큼은 반드시 하나님 앞에서 청산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믿는 사람들이 죽는 것이 더 어렵고 힘이 든다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평안히 죽으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 문제를 청산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청산할 수 있는 시간을 주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어쩌면 복 받은 사람입니다. 고통 중에라도 하나님께서 천국으로 데리고 가시려고 기다리고 계시잖아요. 회개할 시간을 주느라, 죽음이 늦춰지 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마냥 기다려 주시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상시에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고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사도 바울도 이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느냐 죽느냐의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었던 사도바울이 빌립보 감옥에서 죽음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유럽을 세바퀴나 걸면서 평생을 선교하고,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밖에 몰랐던 그도 이 문제를 놓고 고민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러한 죽음의 순간에 사도 바울은 어떠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고 있는지 살펴 보기를 원합니다.   

 

1.  첫 번째로, 바울의 고민은 죽음에 관한 문제 였습니다.  

 

바울은 지금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사느냐 죽느냐 인생의 본질적인 문제 앞에서 무엇을 택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자신의 고민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 고민은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고 말하는 세익스피어 작품속의 햄릿의 고민과 다른 것입니다. 이 고민은 우리 인생의 가장 근본적인고 핵심적인 고민입니다.

요즘 이러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은 정작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우리는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는 고민합니다. 그러나 정작 죽음 뒤엔 과연 무엇이 우리를 기다릴까? 우린 어떻게 될까? 라고 고민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쇼핑 센터 가서 옷을 하나 고를 때, 엄청 많이 시간을 드리고, 신경을 쓰고 입어 봤다 벗었다. 오늘 저녁은 무엇을 해 먹을 까? 하는 이런 많은 노력에 비해 내가 죽고나면, 죽음 뒤에는 어떤 삶이 있을까? 구원이 있다면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 이런 것을 놓고 고민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우리 인간에게 생각하고, 판단하고, 감정을 느끼는 능력을 주셔서 고민을 하도록 만드셨습니다. 적어도 인간이라면 이 문제를 놓고 고민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동물과 사람이 다른 점입니다. 똑 같이 이 땅에서 숨을 쉬며 살지면, 동물들은 고민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동물들은 신경성 위장병에 걸리지 않습니다. 스트레스 받아서 탈모증상이 나고, 불면증에 시달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동물들은 종교도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런 병에 걸리기도 하며, 신을 찾습니다. 그러면서 죽음을 준비하며 살아 갑니다. 왜냐하면 인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동물은 생각 없이 사는 존재지만 인간은 생각하며 살고, 의식 있는 존재이기에 그렇습니다.  

 

바울은 오늘 사는냐, 죽느냐의 갈림길에서  영혼에 대한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천년 만년 그냥 살것 처럼 착각하고 살다 보니까, 정말 중요한 이 고민은 안하고 쓸데 없는 고민만 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여러분 오늘 만약에 우리의 인생이 마지막이라면, 여러분의 삶 뒤에 어떠한 삶이 기다리고 있을 것인가에 고민 한번 해 본적 있습니까?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분명한 답이 있습니까? 교회를 20 30년 다녀도 답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 그 후에는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심판의 문제를 해결 하셨습니까?

바울은 지금 이 고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이 문제를 놓고 깊이 고민해 보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2.  두 번째로, 바울의 고민은 주님과 함께 있고 싶은 것이 고민이었습니다.   

 

23절 보시면, 바울이 두 사이에 끼었다고 말합니다. 이 두 사이가 무엇이냐면, 주와 함께 살 것인가, 아니면 이 땅에서 조금 더 살 것인가 하는 고민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어느 쪽을 소원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그러니까 바울이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죽음을 문을 지나서 주와 함께 사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울이 죽음을 좋아해서 입니까? 세상에 죽음을 좋아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거예요.  바울은 죽는 것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죽음을 통과하고 나면 천국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한 삶을 사는 그 삶이 시작될 것이기에,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다. 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럴려면, 죽음을 통과해야 되는데, 이것이 바울의 고민입니다.

그래서 두 사이에 끼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천국에서 주님과 영원히 살고는 싶은데, 그럴려면 죽음이란 것을 지나야 하고, 그렇다고 자살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고민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신앙입니다. ‘신앙이란 말 그대로, 신을 앙망하는 것입니다. 오늘 바울의 말대로, 주님과 함께 살고 싶은 것이 신앙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란 주님과 같이 사는 것입니다. 주와 동행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같은 길을 가고, 주님과 같은 생각을 하고,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말씀대로 사는 것이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른 서신서를 보면 이렇게 고백합니다.  죽는 것도 유익하다 왜 유익합니까? 왜냐하면 그곳에 사랑하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찬송가에도 있습니다. “내 영혼이 은총입어, 중한 죄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 내주 예수 계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 나라주님이 계신 곳이면 그 어디나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천국의 핵심은 주님이 계신곳입니다.

 

그래서 천국에 가고 싶다고 한다면, 이 세상이 힘들고 고통스러워 천국 가고 싶은 것이 아니라, 주님을 만나고 싶어서 천국을 사모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놓고 늘 고민하며 살아야 합니다.

 

3.  세 번째로,  바울의 고민은 성도들의 유익에 있었습니다.

 

24절 보시면,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유익하리라이 번역이 좀 어색한데, 이런 말입니다. 내가 빌립보 감옥에서 살아 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라는 말입니다.  25절 보시면, 바울이 감옥에서 살아 나갈 것을 확신하고 있고, 26절에 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면,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풍성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이 감옥에서 나가서 너희를 보면, 너희에게도 자랑거리가 되고, 이 사건을 통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감옥에서 나가는 것은 철저히 성도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성도들 때문에 나가고 싶었던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빌립보 교회를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서는 죽어서 천국에 가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것이라고, 그것이 훨씬 더 좋다 라는 표현을 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살아 나가는 것이 교회를 위해서 유익하니라, 그래서 너희와 함께 신앙 생활하고, 함께 기쁨을 나누고, 너희와 함께 선교하고, 복음 증거하고, 목회하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인도 할 것이다.

함께, 죽음을 준비하고, 함께 이 땅에서 천국에 어떻게 갈 것인가 고민하며 살다가, 주님 만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참 당당한 목회자였습니다. 당당하면서 사랑 많은 목회자였습니다. 감옥에 있으면서, ‘감옥에서 빨리 나올 수 있도록 나를 위해 기도해 달라.’는 부탁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안에서 성도들을 걱정하고 염려하면서 내가 빨리 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데……’ 라는 말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울의 고민은 성도들의 유익에 있었습니다.

 

알프레드 노벨은 노벨상의 창시자입니다. 지금 세상에서 가장 값진 상이라고 한다면 아마도 노벨상일 거예요. 그 중에서도 노벨 평화상이 가장 값지다고 하죠. 이 알프레드 노벨이라는 사람이 노벨상을 만든 것은 우연치 않은 일 때문이었습니다.

그이 형은 다이나 마이트를 만드는 폭발물 제조 회사를 경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형이 죽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지역 신문에 그의 형의 부고 소식을 알리는 기사에서 이렇게 써져 있는 것을 읽게 되었습니다. “다이나 마이트를 만들고 많은 폭발물을 만들어 사람들을 죽게 만들어 많은 돈을 벌어 들인 알프레드 노벨 죽다그의 형의 이름이 써져야 할 곳에 자신의 이름이 써져 있는 거예요. 신문 기자가 형의 이름과 동생의 이름을 바꿔서 기재한 것입니다.

알프레드 노벨은 이 기사를 읽으면서 충격을 받습니다. 나도 언젠가는 죽게 될텐데, 내가 죽고 나면, 나도 이런 식으로 기사가 나오고 사람들에게 이렇게 기억될 것이 아닌가그래서 이제까지 모은 전 재산을 노벨상 기금으로 조성하면서 노벨상제도를 만든 것입니다.

이 상의 목적은 한 마디로, 살아 있을 때, 바르게 산 사람, 성실하게 산 사람,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며 산 사람에게 주는 상입니다.

 

여러분 노벨상이 값지다고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받을 상에 비하면 노벨상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늘 사도바울도, 주님 받을 상을 향하여, 달음박질 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상은 아무에게나 주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서도 열심으로 노력한 사람에게 주는 것이 상입니다. 원하옵기는 우리 꿈의 교회 성도님들 모두는 상을 향하여 오늘도 주님께 충성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나, 상도 천국에 들어가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에, 그 나라, 저 천국을 소망하며, 당장 내일이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다는 생각으로, 우리의 남은 인생을 진지하게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우리의 남은 인생이 얼마가 남았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것이 얼마가 되더라도, 우리 주 예수님과 영원한 천국에서 함께 있을 것을 소망하면서 오늘도 거룩하게 하루 하루 성도의 삶으로 승리하시길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