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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의 창고/ 비전나리의 설교

2013년 5월 26일 주일설교 : 때가 단축 되어진 고로 - 고린도전서 7:29-31

by Peartree 2013. 5. 25.

때가 단축 되어진 고로

고린도전서 7:29-31

 

밀고 밀리는 치열한 전쟁터의 한 복판에서 어느 한 부대가 수색작전에 투입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수색작전이란, 숨어있는 적군을 찾아내서 섬멸하는 것이 수색작전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위험한 작전인지 모릅니다. 적군이 어디서 매복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총탄이 어디서 날아오는지도 모르면서 총탄에 맞아 죽는 작전이 수색작전입니다. 

그래서 그 부대의 병사들은 오만 가지 생각을 하면서, 전투에 투입되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언제 죽을지 모르는 긴박한 상황에서 부대원들의 마음은 초조하고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습니다.

그때, 여러 번 전투에 참가했던 고참 분대장이 이렇게 외칩니다. 여보게들, 살겠다는 희망을 버리게, 그러면 마음이 한결 편하고 가벼워 질 걸세.

 

사람은 누구나 한번쯤은 다 죽음을 맞이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날이 80년 후에 오기도 하고, 20년 후에 오기도 합니다. 아니면 며칠 후에 오기도 하고, 전투에 참가했던 군인들에겐 오늘 당장 그날이 올 수도 있습니다. 일찍 오느냐, 늦게 오느냐? 의 차이뿐입니다.

그런데 그날이 일찍 올 것 같으면 우리는 두려워하고, 긴장하고 초조하게 됩니다. 아무도 30년 후에 맞이할 죽음에 대해서 두려워하거나, 긴장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막상 그날이 닥치고 나서야,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한국의 사형수들의 아버지라고 불리 우는 분이 있습니다. 서울 구치소 보안 계장을 지내신 박효진 장로님입니다. 이분은 사형수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로 하여금 두려움 없이 죽을 맞이하게 하는 교도소 사역 중에도 사형수 사역을 하셨던 분입니다.

이 분이 하신 말씀 중에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사형수 윤도형에게 한 말입니다. 우리는 다 사형수다. 너도 사형수고 나도 사형수다, 우리는 다 하나님 앞에서 사형 날짜를 받아 놓고 사는 사람들이다. 너는 그날을 빨리 받은 것 뿐이고, 나는 늦게 받은 것 뿐이다  이 박효진 장로님이 구치소 사형수들을 보면, 평소에는 사형수 같지 않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사형수지만 사형 날짜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한국은 사형수들에게 사형 날짜는 없다고 합니다. 교수형을 집행하기 불과 며칠을 남겨 두고 법원으로부터 사형 날짜가 떨어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죽진 죽는데,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두려움도 없고, 긴장하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형 날짜가 떨어지면, 그때부터는 달라진다고 합니다. 더 포악해 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식음을 전폐하고 공포에 떠는 사람이 있고, 악몽에 시달리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마지막 형장으로 끌려 갈 때는, 다리에 힘이 풀려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교도관들에 의해 질질 끌려간다고 합니다.

 

이와 똑 같은 일들이 앞으로 일어날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그날에 대해서, 우리는 말로만 언젠가 오시겠지 오시겠지 하면서 기다립니다. 그렇게 막연히 기다리는 지금은 두려움도 없고, 긴장도 없겠지만, 막상 그날이 오면, 형장으로 끌려 가는 사형수들처럼, 다리에 힘이 풀려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할 일들이 벌어질 것이라고 성경은 우리게 말씀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요, 그날이 당장 내일 올 것 같은 생각으로 살았습니다. 이 말은 당장 내일 죽어도, 주님 만난다.’ 는 생각으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 땅에서 천년 만년 살겠다는 생각을 버리면, 마음이 한결 편하고, 가벼워집니다. 그렇지 않고 어떻게든 이 땅에서 좀더 살겠다는 욕심이 있다면, 죽음이란 무척 두려운 존재요, 생각하기도 싫은 존재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크리스천들은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에 당장 내일이라도 주님이 오실 것 처럼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임박한 종말의식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시한부 종말론과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시한부 종말론 은 주님이 몇날, 몇일 어느 시에 온다고 하면서, 하던 일 내 팽개치고 하늘만 쳐다보고 사는 것이 시한부 종말론자들입니다.

그런데 임박한 종말의식 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여전히 하나님께서 주신 하루를 성실하게 살아갑니다. 흰옷 입고 산으로 가지도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이 임박한 종말의식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입니까?

오늘 사도바울은 마지막 때를 사는 우리들을 향하여 임박한 종말 의식 을 가지고 살기를 원하는데, 그런 삶은 어떤 삶인지 한번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1.  첫째로, ‘임박한 종말의식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있으나 없는 자 같이 사는 사람들입니다.  (as if they had nothing)

 

본문 29절을 보시면 아내 있는 자들은 아내 없는 자 같이 하라 고 말씀합니다. 30절에도 보시면 매매 하는 자들도 없는 자 같이 하라고 말씀합니다.

아내를 사랑하되, 그 아내가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성경은 매매하는 자들이라고 번역해 놓았는데, 장사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장사해서 돈을 많이 벌어도, 없는 사람처럼 살라고 말씀합니다. 물질에 사로잡혀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있으나 없는 자들 같이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미국에 사는 한인가정에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미국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며 어느 정도 성공한 재미교포 가정에, 두 명의 강도가 경찰로 가장하고 집으로 침입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들 한인 부부는 강도에게 3시간 동안 인질로 잡힌 채, 공포에 떨어야 했습니다. 처음에 Police라고 해서 마음 놓고 문을 열어 주었는데, 갑자기 총을 꺼내 들고 몰아치는데, 정신이 없더라는 거예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 갑작스럽게 총을 마주하고 나니까, 두렵고 떨리고 맥이 빠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이렇게 죽는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담담함이 느껴지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강도들이 떠나고, 간신히 목숨을 건진 다음에, 이분이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고 합니다. 무엇이 나를 그토록 담담하게 만들어 주었나?’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죽을 준비를 해 두었다는 것입니다.

사건발생 1달 전에, 동생을 암으로 떠나 보내고, 그때부터 죽음에 대해서 생각을 참 많이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정신 없이 돈만 모으며 살았는데, 50 갓 넘은 나이에 암으로 죽는 동생을 보면서, ‘죽으면 아무것도 아니구나! 있어도 있는 것이 아니구나, 내가 죽으면 사랑하는 아내도 아무것도 아니고, 그렇게 아끼던 자식들도 아무것도 아니구나! 이제부터는 없는 자 같이 살아야 하겠구나 생각을 하니까, 죽음을 준비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강도를 만난 것인데, 그런데 실제로 죽음의 상황에 맞닥뜨리니까, 담담해 지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이 오실 때 두려워 아니하고, 담담하게 주님을 맞이하길 원하십니까? 지금부터 준비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그날을 준비하며 사는 사람은 아내가 있어도 없는 자 같이, 돈이 있어도 없는 자 같이 살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장가가지 않고 평생을 혼자 산 것 같아요. 주님이 당장 오실 것 같아서, 결혼도 하지 않고, 돈을 벌어 창고에 쌓아 놓지도 않고, 없는 자로 살았습니다. 사도바울은 그냥 없는 자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뭐라고 말씀합니까? 있으나 없는 자 같이 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은 장가가지 말고, 장사하지 말라는 소리가 아닙니다. 있으나 없는 사람 같이 살라는 것입니다. 아내 있는 자는 없는 자 같이, 장사하는 사람도 없는 자 같이…… 한마디로 나그네처럼 살라는 것입니다. 소망을 하늘에 두고 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임박한 종말의식 으로 사는 사람의 모습인 것입니다.

 

2.  두번째로, ‘임박한 종말의식으로 사는 사람은, 자신의 감정을 잘 관리합니다.  

 

30절을 보시면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살라고 말씀합니다.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라 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감정의 지배를 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도 우리가 잘 해석해야 합니다. 울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또 기뻐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울지 않는 자 같이, 기쁘지 않는 자 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감정을 잘 컨트롤 하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시대가 되면,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을 잘 컨트롤 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울지 않는 자 같이, 기쁘지 않는 자 같이 살라고 미리 우리에게 힌트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슬픈 일을 만났을 때, 그것으로 세상이 끝난 것 처럼,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좋은 일이 생겼다고 해서, 세상을 다 가진 사람처럼 교만해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울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십니까? 오늘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라고 말씀 하신 것은, 그 울어야 하는 슬픈 상황이 되면,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울고 싶은 일이 생기면, 믿음으로 일어서라는 말씀입니다. 울지 말고 주님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울고 싶은 일이 생기면, 주님이 오셔서 위로해 주실 것을 기다리며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울지 않는 자 같이 살기를 바랍니다. 울지 말라는 소리가 아니라, 속으로 울면서, 믿음으로 이겨내라는 것입니다.

슬플 때 겉으로 울면, 어떤 분은 울고 나니까, 시원하다는 분도 있습니다. 그것도 좋습니다. 그런데요. 그렇게 되면, 슬플 때마다 울어야 합니다.  타이완에서는 장례식장에서 울어주고 돈을 받는 아르바이트가 성행하고 있다고 합니다. 돈 벌이가 좋아서 곧 한국에도 대신 울어주는 이 아르바이트가 상륙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마지막 때가 되니까, 이런 것도 비성경적으로 돌아갑니다.

성경은, 마지막 때에, 울지 않는 자 같이 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말이죠.

 

원하옵기는 우리 꿈의 교회 성도님들 모두는, 울어야 일이 있을 때, 울지 않는 자 같이 슬픔을 믿음으로 이겨내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기쁠 때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의 소망을 하늘에 두고 살면, 세상의 것은 아무리 기뻐도, 하늘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의 기쁨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기쁨을 찾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면, 우리와 수준이 다릅니다. 우리는 주님 기다리는 기쁨으로 살아갑니다. 또 하나님께 예배하는 기쁨으로 살아가는데, 세상 사람들은, 그런 기쁨이 없으니까, 돈버는 기쁨으로, 자식 잘 되는 기쁨으로, 회사에서 승진하고, 성공하는 기쁨으로 살아갑니다. 그들에게 그것이 전부입니다. 우리와는 기쁨의 대상이 다르고 목적이 다릅니다.

 

원하기는 우리 모두는 세상이 주는 기쁨은, 기쁨으로 여기지 않고, 주님 만날 기쁨으로 사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3.  세번째로, ‘임박한 종말의식으로 사는 사람은, 불편을 감수하며 살아갑니다.

 

31절을 보시면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고 말씀합니다. 사도바울이 어쩜 그렇게 마지막 때에 관해서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마치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를 TV 로 보고, 쓴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사는 이 시대가 얼마나  편리한 시대입니까?  앞으로 이 편리한 시대가 어디까지 발전할지 모릅니다.

1925년 흑백TV가 나왔습니다. 그 후 28년 후에 컬러 TV가 나왔습니다. 흑백에서 컬러로 전환하는데, 28년이라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하루가 멀다 하고 기술이 발전합니다.

과학자들이 말하길, 앞으로 발전할 최고의 시대를 유비쿼터스 시대 라고 합니다.

이게 무슨 말이 냐면, 내가 세상의 중심인 세상입니다.

쉽게 말하면, 내가 있는 위치에서 세계의 어떤 곳이든 볼 수가 있고, 어떤 사람과도 대화 할 수 있고, 어떤 정보든 다 접할 수가 있는 시대입니다.

그때가 되면 은행에 가지 않고, 모든 매매나 거래가 가능한 시대입니다. Account에 돈을 넣고 빼는 정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든 사고 파는 행위가 내 몸에서 다 이루어집니다. 한 마디로 극도로 편리한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가 먼 훗날 이야기가 아닙니다. 불과 몇 년 안에 이런 시대가 올 것입니다.

이런 시대를 오늘 31절 말씀에 비추어 보면 세상 물건을 다 쓰는 자들의 시대 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라고 말씀합니다. 좀 불편해도 세상을 너무 따라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물건들이 너무 편리하다고 해서, 다 받아 들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지금 우리들에게 힌트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 사단 마귀는 세상의 이 편리함을 가지고 믿는 자들을 미혹 할 텐데, 많은 수의 믿는 자들이 속아 넘어갈 것이라고 계시록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편리하게 살다가, 어느 날 갑자가 편리하게 살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무척 힘들어 할 꺼예요.

쉬운 예로, 계시록 13:16-17절의 말씀처럼, 오른손이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편리한 세상이 계속되다가, 갑자기 아니면 서서히 짐승의 표 라는 것을 오른손이라 이마에 받지 않으면, 사거나 팔거나 하는 어떤 매매를 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어떻게 하겠습니까? 편리하게 살기 위해서 다 받을 것입니다. 또 그것을 받지 않으면 아무것도 살 수 없으니까, 어쩔 수 없이 받게 될 것입니다.

 

오른손의 칩


2차 세계대전 중에, 히틀러가 유태인들의 팔뚝에 번호표를 문신으로 새겼었습니다. 그것을 나치 ID 문신이라고 하는데, 지금도 당시에 살아남은 유태인들이 자신들의 팔뚝에 있는 번호표를 보여주며, 그때의 악몽을 떠올리곤 합니다. 왜 히틀러가 유태인들 팔에 문신을 새겼습니까? 통제하기 쉽게 하려고 그런 것입니다.

 

이렇게 사단 마귀도 세상의 사람들을 자기들 편리한 대로 통제하기 위해서, 짐승의 표를 받게 할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참 편리한 시대지만, 앞으로는 더 편리한 시대가 올 텐데, 그때에 어떤 Device 를 소개하며, Device 없이 매매를 못하게 된다고, 뉴스나 매스컴에서 떠들면, 우리는 오늘 31절의 말씀에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는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

29절의 말씀을 보세요. 사도바울이 그때가 단축하여졌다고 말합니다. 주님 오실 날이 더 가까워 졌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은 점점 마지막을 향해 달음질 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믿는 자들은 세상에 빠져서 허우적 거리며, 휩쓸려 가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준비하여 살아야 합니다.

죽음을 준비한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 것 처럼, 우리는 생명 내놓고 믿음으로 살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시대를 곧 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마지막에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저울질 하실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대로 불편함이냐, 아니면 편리함이냐?  를 놓고 우리의 믿음을 보실 것입니다.

그런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있으나 없는 자 같이, 슬퍼도 울지 않는 자 같이, 기뻐도 기쁘지 않는 자 같이, 세상의 불편함 감수하면서 세상 물건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살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임박한 종말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의 모습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