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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은 복을 세어 봅시다 - 역대하 32:24-26

Peartree 2012. 12. 25. 06:00

받은 복을 세어 봅시다

역대하 32:24-26

 

이른 새벽부터 밭에 나가 열심히 일하는 가난한 농부가 있었습니다. 쟁기질이 끝나고 시장기가 돌 무렵, 나무 밑에 놓아둔 빵 한 조각을 먹기 위해, 나무아래로 갔습니다. 그런데, 빵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맹물로 허기를 달래며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 하루 굶는다고 죽지는 않겠지. 누군지 모르지만, 그 빵이 무척 필요 했나 보네, 많지 않지만, 잘 먹었으면 좋겠군." 이라고 말합니다. 근데 그 빵을 훔친 것은 악마였습니다. 악마는 농부의 입에서, 원망과 불평이 나오도록 하기 위해서, 빵을 훔쳐갔던 것입니다. 하지만 농부는 오히려 감사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악마가 자기 뜻대로 되지 않자, 대장 악마에게 찾아가, 묻습니다. 어떻게 하면, 저 농부의 입에서 감사의 말이 사라지게 할 수 있는지요?

그러자, 대장 악마는, 빵을 훔치는 대신, 빵을 더 늘려 주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 후로, 이 농부에게 빵이 넘쳐 나는데, 빵 뿐 아니라, 창고에 곡식도 남아 돌게 만들어 줍니다. 이렇게 곡식이 남아돌자, 이 농부는 이 곡식으로 술을 만듭니다. 술이 생기자, 또 농부는 친구들을 불러들여, 먹고 마시고 놀게 됩니다. 그렇게 흥청 망청 인생을 살다 보니, 어느새, 그 농부의 입에서 감사의 말은 간데없고, 원망과 불평의 말이 나오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절입니다. 한 해 동안 우리의 가정과, 직장과 사업장과 교회를 지켜주신, 그 은혜를 하나님께 감사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오늘만 감사절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1년 365일을 하나님께 감사하며, 감사절 같이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도 사람들이, 감사하지 않으니까, 제발 이 한 주간이라도, 아니, 이 날 하루만 이라도, 감사하며 살라고 만들어 놓은 거 같습니다. 어떻게 한 주만 감사할 수 있습니까? 매 순간, 호흡하고 있는 그 차체가 감사인데 말이죠.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감사란? 하나님께서, 나에게 풍족한 복을 주셨을 때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부족한 가운데서도, 생활의 염려 가운데서도, 일이 잘 풀리지 않는 가운데서도, 감사하는 것이, 구원받은 성도라면, 당연히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미국 최초의 추수감사는 어떠한 환경에서 드려졌는지 다 아실거예요. 청교도인들이 종교의 자유를 찾아, 146명이, 메이플라워 라는 배를 타고 영국을 떠납니다. 그리고 신대륙으로 오면서, 파도와, 질병, 식량부족으로, 미국에 도착 할 때는44명이 죽고, 102명만이 살아남았습니다. 그리고 그 해 겨울을 나면서, 추위와 배고픔과, 짐승의 습격으로부터 여자와, 어린들을 포함해서 44명이 또 죽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이듬해, 농사를 짖고, 추수를 하고는, 146명중에, 살아남은 58명이,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린 것이, 최초의 추수감사절입니다.

 

사실, 이들에게 있어서 감사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아내가 죽고, 자녀들이 죽고, 여전히 배고프고, 춥고,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인데, 말이죠. 그런데도, 여전히 감사를 드릴 수 있었던 이유는, '진정한 감사는, 조건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불행 중에도 감사해야 된다' 는 것을, 그들은 청교도 신앙을 통해서 배웠기 때문에 그렇게 감사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무화가 나뭇잎이 마르고, 포도 열매가 없고, 감람나무 소출이 없고, 우리의 양이 없고, 외양간 송아지 없어도'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새로운 생명을 연장 받은 사람들이 마땅히 드려야 할 의무인 것입니다.

감사는 뭐라고요? 그리스도인의 의무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히스기야 왕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히스기야 왕은 이스라엘의 역대 왕들 중에, 아주 선한 왕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믿음도 있었고, 받은 복도 많았습니다. 한번은 죽을 병에 걸려, 죽게 되었는데,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병을 낳게 해 주시고는, 그의 생명을 15년간을 연장해 주었습니다.

 

성경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은 몇 있어도, 죽기 직전에 이와 같은 '생명 연장' 의 특혜를 받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15년을 더 살 수 있다니까, 믿기지가 않았는지, 어린애 응석부리듯이, 내가 15년 더 살 수 있다는, 증표를 보여 달라고 하나님께 졸라댑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그 철없는 부탁도 들어주시는데, 일영표의 그림자를 십도 뒤로 물러가게 하는 "기적"을 보여주십니다.

 

즉, 지구가 돌다가, 40분동안이나, 멈춰버린 것입니다. 이 히스기야 한 사람을 위해서, 전 세계의 사람들이, 불편을 겪은 것입니다. 5시면, 퇴근하기로 되어 있는데, 4시 20분으로 변해서, 40분을 더 일해야 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으로부터, '특혜중에 특혜'를 누렸던, 사람이 히스기야 왕입니다.

그러면, 그의 남은 15년은 어떠한 삶을 살아야 맞습니까? 자나깨나, 감사로 살아야 맞습니다. 덤으로 사는 인생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25절을 보시면, 그 엄청난 은혜를 입었으면서도, 그 덤으로 받은 15년을 '교만' 으로 인생을 마감합니다. "히스기야가 마음이 교만하여 그 받은 은혜를 보답지 아니' 했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니, 생명을 15년을 연장시켜주고, 그를 위해서, 지구를 멈추게도 해 주셨는데, 고작 돌아온건, '교만과 은혜의 망각' 이었습니다. 이런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괴씸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 보시면, 히스기야뿐 아니라, 우리들도 마찬가지라는 거예요.

우리 중에도, 매일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이 하루도 하나님께서 나에게 또 하루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시는 구나!' 라고 감사 드리는 사람이 몇이나 있냐는 거예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의 호흡과 맥박이 뛰고 있는 것이, 그저 '당연한 일' 로만 여기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공기중에 산소만 제거해도 우리는, 3분도 채 안되서, 다 죽을 텐데 말이죠.

그래서 어쩌면, 우리도, 히스기야 왕처럼, 그 은혜를 잊어버리고 사는 사람들일지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받은 복을 세어 보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이 받은 복을 세어보지 않으면, 우리는 내가 잘나서, 내 힘으로 사는 것 처럼, 히스기야 왕 같이, 교만에 빠질 수 있습니다. 은혜를 모르는, 철없는 인생이 될 수도 있다는 거예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는 연못에 개구리들이 살고 있었는데 개구리들에게 한가지 소원이 있었습니다. 새들처럼 하늘을 한번 훨훨 날아보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날아가던 학이 연못에 내려왔습니다. 개구리 한 마리가 학한테 사정을 했습니다. "나도 너처럼 멋있게 하늘을 날았으면 좋겠다" 그러자, 이 학이 어디선가 나뭇가지를 물고 와서는, 개구리 보고, 물고 있으면, 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개구리와 학은 한쪽 끝을 서로 물고 하늘을 날랐습니다. 너무나 황홀하고,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습니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세상은 환상적이었습니다.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습니다. 땅에 있는 개구리들이 부러운 눈빛으로 하늘을 나는 개구리를 바라보다가, 그 중 한 개구리가 하늘을 나는 개구리에게 소리를 칩니다. "누가 그런 기막힌 생각을 해냈니?" 그러자 개구리는 우쭐해져서 "내가 했지, 개골 개골" 하는 순간에, 그만 땅으로 곤두박칠 쳤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은혜를 모르면, 땅으로 곤두박칠 칠 수 있습니다. 오늘 히스기야 왕은 은혜를 몰랐기에, 그의 말년은 땅으로 곤두박칠 쳤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것이, 이 '교만' 입니다. 천사가 타락해서, 마귀가 될 때도, '하나님 같이' 되려고 하는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을 때도, '하나님 같이' 된다는 말에 속아서 타락한 거예요. 이 히스기야 왕의 부귀와, 생명과, 건강과, 자녀 교육과, 나라의 번영은, 다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진 작품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자기가 이룩한 것 마냥', 은혜를 잊어 버리고,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10명의 문등병자를 고치신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열명중에, 고작 감사하려고 돌아온 사람은, 단 한명이었습니다. 그 한 사람에게 주님이 뭐라고 하셨는지 아세요?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라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도, 사람이셨습니다. 분명 서운한 마음이 드셨을 거예요. 은혜 받은, 그 아홉에게서, 뭐 특별한 것을 바랬던 것도 아닙니다. '그들이 받은 복을 기억만 하기를' 원하셨을 거예요. 그런데도, 그 아홉은 받은 복을 기억조차 하지 않은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 받은 복을 왜 기억해야 하냐면요. 기억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은혜가 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받은 은혜 기억하지 않으면, 오늘 히스기야 왕 같이, 될 수 있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이스라엘 남유다의 스무명의 역대 왕들 중에, 열세번째 왕입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 므낫세는 열네번째 왕이 되요.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그 스무명의 왕들 중에, 히스기야는 그래도 선한 왕에 속했는데, 아들 므낫세는, 가장 악한 왕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해서 이 므낫세가 가장 악한 왕이 되었냐면, 므낫세가 언제 태어났는지를 계산 해 보면, 이해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히스기야가 생명을 15년 연장 받았을 때 이 므낫세가 태어났습니다. 그러니까, 요즘말로 하면, 늦동이 입니다. 이 늦동이의 특징은 버릇이 없다는 거예요. 물론 이런 이유도 있었겠지만, 더 큰 이유는, 히스기야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지 못하는, 그 시기에 태어나고 자랐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감사가 없는 가정에서 자란 것입니다. 받은 복이 너무나도 많은데, 그 입에서 감사 찬양 한번 들어보지 않고 자란것입니다. 그 결과가, 오늘 본문의 다음장인, 33장을 보시면, 아들 므낫세가 악한 짓을 한 것만, 열거해 놓았습니다. 못된 짓은 다 했습니다.

 

이렇게 감사가 떠나면, 하나님의 은혜도 더 이상 그 위에 머물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입에서 감사가 떠나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말로, 복되게 사는 비결입니다.

'목사님 ! 감사할 일이 있어야지, 감사하죠? 내 인생이 이 모양인데요.' 하지 마십시요. 그런 생각은 앞에 예화처럼, 마귀가 가져다 주는 생각입니다.

 

오늘 집에 가시면, 주무시기 전에, 감사할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요. 생각하지 않아서 그렇지, 수도 없이 많습니다. 어떤 분은, 실제로, 감사의 조건들을 무심코 적어 내려가다 보니까, 200가지가 훌쩍 넘었다고 합니다.

 

'그래도 나는 감사할 것이 없다' 라고 하는 분들을 위해서, Example 을 준비했습니다.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내야 할 세금이 있다면 그건 '나에게 직장이 있다는 감사의 조건' 입니다.

옷이 몸에 좀 낀다면 그건 '잘 먹고 잘 살고 있다는 감사의 조건' 입니다.

닦아야 할 유리창과 고쳐야 할 하수구가 있다면 그건 '나에게 집이 있다는 사실을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개스비 너무 많이 나왔다면 그건 '내가 따뜻하게 살고 있다는 사실을 감사하라는 통지서' 입니다.

예배당 뒷자리에 앉은 집사님의 곡조 틀린 찬송이 영 거슬린다면 그건 '내가 들을 수 있다는 것을 감사하라는 명령' 입니다.

온몸이 뻐근하고 피로하다면 그건 '내가 열심히 일했다는 감사를 내몸이 고백하는 것' 입니다.

이른 새벽 시끄러운 자명종 소리에 놀랐다면 그건 '내가 살아 있다는 감사의 종소리' 입니다. 세탁하고 다림질해야 할 일이 산더미라면 그건 '나에게 입을 옷이 많다는 감사의 분량' 입니다.

 

여러분 오늘은 추수감사 주일입니다. 예배 마치면, 풍성한 음식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지구에는 하루에, 굶어 죽는 사람들이 3만명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음식을 볼 수 있는 것 자체로도 감사하기에 충분합니다.

또 이 지구상에는,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싶어도 맘껏 드리지 못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북한에는, 예수를 믿으면서, 성도간의 친교가 불가능합니다. 그 중에, 밀고자라도 있는면, 다 죽으니까 말이죠, 그래서 밤에 이불을 뒤집어 쓰고, 혼자 예배하고, 기도합니다. 그런 곳에 비하면, 이렇게 함께 모여서 예배하고, 성도간에 교제를 나누는 그 자체가 얼마나 복인지 모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가장 큰 감사는, 역시 구원의 감사입니다. 이 땅에서 뿐만 아니라, 영원토록, 주님과 함께 산다는 그 소망을 늘 감사함으로, 사시며, 기쁨과 평안의 복된 감사절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