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를 잊지 맙시다 - 히브리서 2:1-18
은혜를 잊지 맙시다
히브리서 2:1-18
지난 주에는 '천사보다 아름다운 이름 예수'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초대교회 때, 교회 안에, 잘 못된 사상이 존재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천사숭배' 사상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도 믿고, 천사도 숭배하는 그런 잘 못된 진리를 따르고 있던 것입니다. 예수님도 믿고, 마리아를 존경한다고 하는, 카톨릭 사상과 별반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천사는, 구원받을 백성을 섬기라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영적 존재라고 말씀을 드렸고, 예수님과 천사는 비교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도 본문 5절 말씀을 보시면, "하나님이 우리의 말한 바 장차 오는 세상을 천사들에게는 복종케 하심이 아니라" 라고 말씀합니다. 쉬운 현대인의 성경으로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은 우리가 말하는 장차 올 세상을 천사들이 통치하도록 맡기지 않으셨습니다." 천사는 세상을 통치하지 못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요한복음 3:35절을 보시면,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 라고 말씀하죠. 천사와 예수님이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천사도 예수님의 손안에 있다고, 지금 말씀하고 있잖아요. 그런데도, 2000년전에 천사를 숭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사람들이 왜 천사를 숭배하고 있었냐면, 7절의 말씀에 "저를 잠간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라고 기록하고 있듯이, 예수님께서 이땅에 오셨을 때,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고난을 받으시고, 힘없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때는 잠간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셨기 때문에 라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죽으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구원의 길이 열리죠. 그런데도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한 거예요. 예수님은 죽기도 하시는데, 천사는 죽지 않는다. 예수님은 배고파 하시고, 울기도 하시는데, 천사는 그렇지 않다. 어떻게 사람에게 붙잡혀 고난 받으시는 예수가, 천사보다 우월할 수 있는가? 예수님의 능력에 의심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이, 왜 천사를 숭배하게 되었는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천사가 능력이 있다고 믿은 것 뿐만 아니라, 고난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다는 이유로, 얼마나 핍박이 심했는지 모릅니다. 15절 보시면, "죽기를 무서워 하므로" 라고 기록하고 있듯이, 당시에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기는 믿지만, 사실 예수님도 핍박을 받아 죽으셨기 때문에, 예수님에게는 별 기대를 하지 못하게 된 거예요. 분명히 예수님을 믿으면 영혼의 구원은 받지만, 이 땅에서 고난 당하고, 핍박을 당하고, 배고프고, 가난하고… 한 것은 누가 해결해 주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보다, 능력이 있는 천사를 숭배하게 된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이 땅에 있을 때는, 천사의 도움을 받아 잘 살고, 죽으면, 예수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럴듯한 방법이죠.
지금 우리가 살고 이 시대도 마찬가지 입니다.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아 놓고, 이 땅에 살 동안에는 복을 받고 살아야 하지 않느냐?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그렇게 나쁜 생각은 아닙니다. 물론 이 땅에 살 때에 복을 받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병들지 않고 오래 사는 복, 가난하지 않고, 부유하는 사는 복, 마음 고생하지 않고, 평안하게 사는 복, 자녀들이 형통하는 복,이런 것들이 있죠. 예수님께서도 병자를 고쳐주시고, 가난한 자를 먹이시고, 죽은 나사로를 살려 주셔서, 더 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도, 히스기야의 병도 고쳐 주시고, 솔로몬 같은 왕에게는, 물질과 지혜로 채워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복을 누리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예요. 그러나 이런 복으로 인해, 행여나, 하나님과 멀어지게 될까봐 걱정인것입니다. 주님을 따라가지 않고, 복만을 따라가게 되면, 그건 복을 받지 않은 것만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실제적인 예로, 1910년전에는 천주교에서는, 지금의 기독교처럼 제사가 없었습니다. 제사는 우상숭배로 단정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보니까, 전도가 되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에서, 제사를 허용했습니다. 조상에게 제사하는 것은 좋은 문화와 풍습이라고 발표하고, 천주교식 제사법을 만들었습니다.
이 제사법이 복잡한데, 몇가지 예를 들면, 제사당일에 영정을 모셔놓고, 십자 성호를 긋는다.
초배례: 참석한 모든 사람이 다 함께 두번 절한다.
분향배례: 영정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어 분향하고 잔을 받아 삼제를 한 다음, 돕는 이에게 주면, 돕는 이는 잔을 올리고 밥그릇 뚜껑을 열어 놓습니다. 이런 절차가 끝나면, 독축이라는 것을 하게 되는데, 제사 지낼 때, 축문하고 같은 것입니다.
"주님의 보살핌으로 오늘 다시( )께 제사를 오리게 되었나이다. 이 맑은 술과 여러 가지 음식을 장만하여 드리는 저희의 정성과 사모하는 마음을 받아 주소서. 저희는 언제나 ( )를(을)기억하여 이 제사를 올리오니 ( )께서는 저희가 주님의 뜻을 따라 화목하게 사랑하며 살아가도록 전구하여주소서."
여기서 '전구' 라는 용어가 나오는데, 천주교에서는 이 '전구' 라는 말을 참 많이 사용합니다. 카톨릭 홈페이지 가서 전구가 뭔지 찾아보니까, '전구란? 성모마리아나 모든 성인들에게 우리가 바라는 바를 하느님게 전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을 말한다' 라고 기록하고 있어요. 여기에는 예수님의 이름이 빠져 있습니다. 그래서 제사지낼 때, '화목하게 사랑하며 전구하여 주소서' 하는 것은, '죽은 조상님들께서, 우리가 잘 살도록, 하나님께 기도해서, 우리가 그렇게 복을 받게 해달라' 하는 말입니다.
복을 받고 싶어서, 예수님은 어디론가 간데 없고, 없던 제사를 만들고, 복 받기 원하는 사람들을 미혹했던 거예요. 초대교회 때도 마찬가지 였어요. 천사를 숭배하므로, 천사의 도움을 받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현재의 삶에, 번영과 성공을 추구하며 살지만, 정작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는 잊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이렇게 은혜를 잊어버리고 사는 사람들을 향하여 성경은 무어라고 말씀하시는지 찾아 보며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 첫째로, 큰 구원을 소홀히 여기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3절을 보시면,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그 큰 사랑을 잊지 말라는 말입니다. 이 큰 구원의 은혜를 잊어 버리면, "어찌 피하리요" 라고 말씀하지요. 무엇을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까?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천사보다, 잠간 못한 모습으로, 이땅에 오셔서, 고난을 받으시고, 그 큰 구원을 이루어 놓으셨는데, 천사가 더 능력이 있다고 천사를 더 높게 여기면,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분이 우리에게 농장 하나를 선물했다고 해요. 이 농장에는 우리의 돈이 한 푼도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냥 공짜로 우리에게 준 것입니다. 그래서 그 농장을 주신 분에게 너무 감사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고작, 열심히 농장을 가꾸어 많은 과실을 맺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농장을 열심히 가꾸는데, 사실 너무 힘이 드는 거예요. 왜 그렇게 힘이 드는지, 그래서 투덜대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왜 이렇게 큰 농장을 주셨습니까?" 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그 후로는 농장을 가꾸지도 않고, 소홀이 여깁니다. 그리고 어디서 들리는 소문에, '누가 농장으로 큰 돈을 벌었다' 하면 그곳에 기웃거리고, 저기서 성공했다 하면, 저곳에 기웃거리는 거예요. 그렇게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보니까, 자기에게 큰 농장을 준 그 사람의 은혜는 까막득히 잊어 버리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새 이 큰 농장이, 부담스러운거예요.
우리가 살아가는데,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부담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냥 나를 내 버려 두었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큰 농장을 공짜로 받았으면, 열심히 가꾸어야 하듯이, 그 큰 구원을 받았으면, 거기에 따르는 신자의 책임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책임을 지키자니, 힘든거예요. 그래도 처음에는 너무 기뻤겠죠, 그러나 시간이 흐르다 보니, 고난만 있는 것 같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산다는 것이 너무 부담스러운거예요. 그래서 결국은 큰 구원의 은혜를 등한히 여기고,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기독교에서 천주교로 가는 사람이 많이 있는거 같아요. 천주교 인구는 점점 늘어나고, 불교도 늘어나는데, 유독 기독교 인구만 감소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천주교는 부담이 없거든요. 하고 싶은거 다하고, 제사도 지내도 되고, 성도로 사는데 전혀 제약이 없어요. 세상 사람들 처럼 살다가, 미사 한번 드리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히브리 기자는 큰 구원을 받았으면, 거기에 걸맞는 성도의 삶을 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 두번째로, 은혜를 잊어 버리고 사는 사람들을 향하여, 성경은 능히 도와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게 된 이유는, 고난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고난도 안 받겠지' 하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들을 향하여,
18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예수님께서,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고난 당하는 성도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더 잘 아시고, 그렇기 때문에 도와 주신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믿고, 주님의 도우심을 기대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삶 속에서 주님께서 도와 주시는 것 같지 않고, 별 변화가 없으면, 믿음을 저버립니다. 그리고는 인내하지 못하고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실 때 잘 오해하는 것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도와 주신다' 라고 한다면, 우리는 늘, '형통' 을 생각합니다. '문제가 풀어지거나, 걱정과 고민거리에서 해방되는 것을 생각합니다. 신자들 거의 다가 이렇게 생각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님께서 도와 주신다' 라는 것은, 해결사가 되어 주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어떤 분이 병에 걸리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주님이 낫게 해 주실 것을 기도합니다. 물론 병낫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주님은 도와 주십니다. 그러나, 도와 주시는 방법은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방법으로 도와 주신다는 거예요. 우리가, 늘 이 부분에서, 오해를 하게 됩니다. 우리는 나의 방법, 나의 기준을 세워놓고, 이렇게 도와주십시요. 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거예요. 주님께서 필요하면, 병을 고쳐 주시기도 하고, 또는, 안 고쳐 주시기도 하지만, 병을 견뎌 낼 수 있는 믿음을 주시기도 하시고, 때로는 열심히 온 가족이 기도해야 고쳐주시기도 합니다. 그 병을 통해서, 가족 구원이라는 더 큰 축복을 주실 수도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도와 주시는 방법은 주님의 손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정말 어떤 때는, 주님께서 아무것도 도와 주시지 않는 것이 도와 주는 것 일 때가 있습니다. 송명희 시인이 있습니다. 태어날 때, 소뇌를 다쳐 뇌성마비 장애를 얻었습니다.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께 기도해도, 전혀 도와 주시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가슴속에 시 한편이 생각이 나, 마구 써내려 가게 된 것이 '나' 라는 찬양입니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같게 하셨네' 그리고 송명희 시인의 이야기가 널리 퍼지게 되었습니다. 한번은 송명희 시인에게 미국에서 수술을 받게 해 주겠다는 후원자가 이었습니다. 그때, 송명희 시인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주님이 만들어 놓으신 이대로 그냥 살겠어요. 난 이대로가 좋아요." 우리 주님은 이렇게, 멀리서 송명희 시인을 바라보고 계셨던 거예요.
주님은 반드시 도와 주십니다. 빨리 도와 주시기도 하고, 한 평생을 멀리서 이렇게 바라보시며 지켜 보시기도 합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잊어버리고 살지는 않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혹시라도, 그 은혜를 많이 잊고 살았다면, 큰 구원의 은혜를 등한시하지 마시고, 고난 중에 도우시는 주님을 붙드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