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월16일 주일예배설교: 다른 사람들 -골 3:1-11
다른 사람들
골로새서 3:1-11
현재 미국에는 교회가 약 30만개가 넘는다고 합니다. 잘 알다시피 이 나라는 기독교의 나라이고, 기독교 사상에 뿌리를 두고 발전한 나라입니다. 헌법에서부터 시작해서 모든 가치관이 성경의 가르침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미국 교회의 대형 교단이라고 할 수 있는 침례교, 감리교, 장로교 같은 교단들이 80년대 이후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쇠퇴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을 로버트 핑크라는 신학자는 '왜 이렇게 성도들이 교회에서 빠져 나가고, 힘을 잃어 가고 있는지' 연구하여 책을 낸바 있습니다. 그 책에 보시면 대답이 아주 간단합니다. 교인들에게 너무 적은 것을 요구했기 때문에 큰 교단들이 쇠퇴했다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교인들이 세상에 나가서 사람들에게 이질감을 주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는 말입니다. 교회들이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주지 않는 예수 믿는 사람의 모습을 보여 주려 애를 썼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적게 요구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많이 요구하면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신자가 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적게 요구하므로 세상의 믿지 않는 사람과 비슷해 지게 된 것입니다.
교회 나름대로는, 그런 식으로 신사적인 이미지를 심으면 세상 사람들이 교회에 매력을 느껴 많이 찾아 나올 것으로 생각했는데, 결과는 완전히 반대였습니다. 적게 요구해서 성도들이 세상 사람들과 칼러가 비슷해지자, 기존의 성도들이 먼저 교회를 빠져 나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교회에 대해서 매력을 잃어버린 것이죠. 교회의 매력은 무엇입니까?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사람들의 있는 곳이 매력입니다. 이 본질을 교회가 잃어버리면, 교회는 사회단체와 별반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반면에 90년대에 들어와 아주 괄목할만한 성장을 한 500여 교회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성도들에게 강하게 요구했기 때문에 교회가 부흥했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성도들로 하여금 세상에 나가서 칼라를 분명히 하며 살도록 교회가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달라진 성도들의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감동을 하고 교회에 나오는 세상 사람들이 오히려 더 많아 졌다는 것입니다.
지금 제가 말씀 드리는 것은 전도의 차원에서 말씀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본질적인 차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전도하기 위해서는 때로는 사도 바울처럼, 믿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믿지 않는자 처럼 행동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야 쉽게 친해지거든요. 그러나 전도차원을 떠나 성도로서의 삶이 그들과 별 차이가 없다면, 쉽게 어울리기는 쉬어도 그들이 그런 우리의 모습을 보고는 교회에 나오기는 힘들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생명은 세상과 다름에 있습니다.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능력은 세상 사람과 얼마나 다르냐에 달려있습니다.
창세기 12장에 보시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자기 고향을 떠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왜 하나님이 그를 고향에서 불러내셨을까요? 세상과 구별되는 거룩한 사람, 다른 사람이 되라고 불러낸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 믿도록 불러내셨습니까?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백성이 되라고 불러낸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전체적으로 흐르는 모든 사상의 주제를 보면 거룩한 사람이 되라는 데 있습니다.
'거룩' 이라는 말은 히브리 말로 '다르다' '구별되다' 라는 뜻입니다. 뒤에 현수막 보시면,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 지어다" 이 말은 '내가 다르니 너희도 세상 사람과 달라야 한다' 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사람과 세상 사람은 하늘과 땅처럼 다릅니다. 빛과 어두움이 다르듯, 예수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은 철저하게 다릅니다. 만일 교회가 세상과 비슷하거나 세상과 같으면 그날로부터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사도 바울은 우리가 왜 세상 사람과 근본적으로 달라야 하는지 3가지 근거를 들어'그리스도와 함께'라는 말로 하나하나 정리하고 있습니다.
- 첫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다르다는 것입니다.
3절에 보시면 "이는 너희가 죽었고" 라는 말에는 "그리스도와 함께"라는 말이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전체적인 문맥을 볼 때는 '그리스도와 함께 너희가 죽었고'라는 말씀입니다.
로마서 6장 6절을 보시면 더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을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 말씀은 하나님을 거역하여 영원히 지옥에 갈수 밖에 없는 우리의 운명이 죽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그런 운명도 같이 죽은 것입니다. 사라진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구주라고 고백하면서 한 때 눈물을 흘리며 감격하던 그 순간, 영원히 죽을 수 밖에 없었던 나의 옛 모습은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서 내 몫까지 다 지고 가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주 지옥의 저주에서 자유롭고 홀가분한 사람들입니다.
2)둘째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본문1절을 보시면,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죄를 짊어 지시고 죽으셨던 그 예수님은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사흘 만에 다시 사셨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은 오늘도 살아 계십니다. 그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실 때 죽었던 우리들도 새 생명으로 '함께'살아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래서 1, 3,4 절에 계속해서 '함께' 라는 표현을 써가며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났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들은 죽음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다시 살아난 경험도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기억이 없으십니까? 맞습니다. 크리스천 중에는 그런 죽었다가 다시 산 경험이 있는지, 알지 못하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그러니까, 요한복음 3장에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어떻게 그런일이 있냐고 묻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주님께서, 바람이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듯이 우리는 알지 못하지만, 성령님은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거듭남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시죠. 'Born Again'
제가 자주 사용하는 말인데, 제 말이 아니고, 영국의 존 웨슬레 목사님이 최초로 사용하신 문장입니다. "두 번 태어나면 한번죽고, 한 번 태어나면, 두번 죽는다." Born Again 한사람은, 육신의 죽음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두번태어 나지 않은 사람은 육신이 죽고, 그 다음에 영혼이 영원히 지옥에 가는 죽음을 맞이 합니다. 그래서 두번 죽은 것입니다.
Born Again 한 사람은 왜 한번 죽습니까? 이미 오래전에 십자가에 예수님과 한번 죽은 사실이 있기 때문에, 이제 한번만 죽으면 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보시면, 이제 이렇게 다시 태어난 사람들이 해야 하는 고백이 있습니다. 그후로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이제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고백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런 모습이 세상 사람과 얼마나 다릅니까? 우리 안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영원한 소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찰스피니 목사님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에게 우리와 같이 되라고 말하는 것은 마치 물고기에게 천사가 되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처럼 우리는 다른 사람들입니다.
우리 가운데 예수를 안 믿는 남편과 사는 부인이 있다면 너무나 다른 사람과 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래서 어떤 부인은 남편이 교회에 나올 때까지 사생결단을 하고 투쟁하기도 합니다. 새 생명을 간직하고 사는 두 사람이 함께 사는 것은 예전과는 비교도 행복이 있을 것입니다.
3) 세번째로,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의 영광이 나타나게 될 거라는 거예요
4절 보시면,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주님께서 오시는 그날에 우리도 주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날 꺼라는 것입니다. 그날에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보고 스스로 놀랄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까무러칠 날이 있습니다.
주님이 재림하시는 그 날, 우리의 변화된 진짜 모습이 나타날 것이고 예수님과 함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서 주님과 영원한 교제를 나누며 살 것입니다. 그 날이 되면 우리의 육체는 필요없습니다. 영원한 몸과 함께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그날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다른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날 때문에 우리는 이 땅에서 거룩한 무리가 되어서 함께 예배 드리고 전도하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21세기는 다른 어느 때보다도 듣기만 하는 복음으로는 전도가 안 되는 시대입니다. 사람들은 눈으로 보기를 원합니다. 귀로 듣기를 원합니다. 마음으로 느끼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느끼는 기독교, 성도, 교회를 원합니다.
몇년 전 한국의 대학생 천 여명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지금 당장 가지고 싶은 것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자동차, 컴퓨터일 것이라는 우리의 예측을 뛰어 넘어 정작 그들의 대답은 엉뚱했습니다. "나는 감동을 받고 싶다."
부족함이 없는 현대인들의 메마른 심령을 그대로 반영한 말입니다. 지금은 돈으로 되는 선거도 아닙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야 합니다. 그래서 오바마가 대통령이 된것도 젊은이들이 계속해서 하는 말이 "이 사람은 '다르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다르다는 것이 젊은이들의 마음에 깊은 감동을 줬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으로부터 감동만 받으면 이 세상은 마음의 문을 엽니다. 목사에게 감동을 받으면 이 세상에는 복음의 문이 열리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에 감동을 줄 수만 있으면 이 세상은 반응합니다. 문제는 세상 사람들이 우리에게서 다른 데를 발견하지 못했기에 감동을 못 받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감동에 목말라 하고 있습니다. 감동을 받기를 원합니다. 감동하면 그들은 마음을 엽니다. 감동하면 그들은 반응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다른가를 그들에게 보여줌으로써 그들이 감동만 할 수 있다면 그들의 마음에 예수님을 전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달라야 된다는 사실을 항상 잊지 말고 간직합시다. 예수님과 함께 죽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살았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우리는 영광의 그날에 나타날 것입니다. 공중에서요.
이런 우리가 얼마나 다릅니까?
다같이 기도합시다.
사랑의 하나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과 다릅니다. 주님이 우리를 이처럼 다르게 만드셨습니다. 다르게 만드셨을 뿐 아니라, 나와 다른 사람들을 나와 같은 사람으로 만드는 귀한 사명도 우리에게 주셨음을 믿습니다. 이제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게 얼마나 다른가를 보여주고, 그들을 감동시킬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옵소서. 가정에서 감동을 주고, 이웃에게 감동을 주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옵소서. 이 사회에 감동을 던져주는 우리 모두가 되어 세상사람들로 하여금 주님을 향해 마음을 여는 날이 올 수 있도록 축복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