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2월 12일 주일예배설교: 장막집이 무너지면 - 고후 5:1-10
장막집이 무너지면
고후 5:1-10
얼마전에 한국에서는 Wellbeing 말이 유행한적이 있었습니다. 무슨 뜻이냐면?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문화생활을 누리며,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살아야 하는데, 그럴 려면, 좋은것 먹고, 좋은 것 입고, 좋은 것 타고, 하여튼 좋은 것만 누리며 사는 것이 Well being 이라는 것이죠.
그리고 요즘 또 새로운 신조어가 나왔는데, Well dying 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인생의 마지막을 고생하지 않고 편안하게 장식해야 하는지,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나온 말입니다. 그래서 좋은 병원을 미리 알아두기도 하고, 유언장을 써놓기도 하고, 심지어 요즘 한국에서는 '죽을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하며 안락사를 허락해 달라고 대법원에 제소하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의 주장은 하나님의 섭리에 역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살 권리만 주셨지 스스로 죽을 수 있는 권리는 우리에게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지막을 기다리며 살아가야 하는 존재라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과연 나는 어떻게 죽어야 할 것인가' 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저는 성도들의 장례식에 참석 할 때마다 "나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 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져 보기도 합니다. 여러분들도 한번쯤은 이런 질문은 스스로 던져 보셨을 겁니다. 저는 목사이기에, 말씀 전하다 죽으면, 영광이겠다라는 생각도 해보기도 합니다. 복음전하다 순교하면 더 큰 영광이겠다 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또 하나님과 나 사이에 막힌 담이 없을 때, 그때 갔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도 해보죠. 어쩌면 이런 것들이 우리 성도들의 한결같은 유언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유언 한마디를 남기고 싶습니까? 유언이란 그 사람의 평생의 일대기를 한 문장으로 압축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아주 흥미있는 유언이 몇가지 있습니다.
어느 영화감독은 죽으면서 "나는 이제 죽는다. 레디고! " 라고 말하고 죽었다고
합니다.
어떤 장의사는 "우리집 매상은 이제 내가 올릴 차례다" 라고 말을 하고 죽었다
고 하는데, 믿거나 말거나.
한국의 스스로를 미치광이 중이라고 일관했던 중광은 묘비명에
'괜히 왔다 간다' 라고 썼다고 합니다. 정말 천국에 가지 못할 바에는 오지
않는 것이 차라리 낫을 텐데 이 말하는 것입니다.
영국의 극작가 조지 버나드쇼는 묘비에 이렇게 써 달라고 했습니다.
"우물 쭈물 살다 내 이럴 줄 알았지"(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happen)"라는 엉뚱한 글귀를 새겼다.
죽음, 이 죽음이야말로 요즘 같은 위험한 세상에서는, 우리 생의 마지막에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우리의 인생을 가리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를 걷는
것과 같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같은 이
세상에서 목숨을 걸고 사시는 여러분들 하나님의 불꽃 같은 눈동자의 보호하심이 있기를 간절히 소원하며 축복을 드립니다. (옆사람 : 몸 조심하십시요)
오늘 본문을 기록한 사도바울은 누구보다도 생생하게 이 죽음을 느끼면서 살았던 사람입니다. 얼마나 많은 죽음의 고비를 넘겼는지, 옥중에서 40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번씩이나 맞았습니다. 그당시에는 사람이 견딜수 있는 매를 40대로 한정해 놨습니다. 40대 맞으면 죽었었나 봅니다. 그러니까, 40에 하나
감한 매, 39대를 다섯번씩, 죽기 직전까지 맞은 거죠.
그리고 여행중에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을 겪으면서, 그리고 평생 고칠 수 없는 난치병을 끌어안고 그는 살았던 거죠. 그러면서 사도바울이 본문 바로 앞장 4장 16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그래도 낙심하지 않는다고 하는 그의 "죽음에 대항하는 용기"를 보십시요.
그래서 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사도바울처럼, 그리스도인으로서 죽음을 이길 수 있어야 하고, 또 마땅히 이겨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이 죽음을 이길 수 있는지, 사도바울의 고백을 통해서 '승리의 비결을' 발견하고자 합니다.
- 첫째로, 천국에 대한 확신이었습니다.
본문 1절 보시면,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여기서 장막집은 우리의 육체를 말합니다. 바울은 우리의 육체가 무너질 때 하늘에 영원한 집이 예비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은 왜 우리의 육체를 장막으로 비유하고 있습니까?
그의 직업때문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의 직업이 풀타임 선교사이지만, 파트타임으로 텐트를 만드는 일을 했습니다. 텐트를 만들면서 우리의 육체도 마치 텐트와 다를바가 없구나 라고 많이 생각했던 것이죠. 나이 들면, 낡고, 찢어지고, 그러면 다시 꿰메고, 그러면 또 낡아지고, 그러다가 결국 버릴 수밖에 없는 것이
천막이고, 우리 육체도 이와 같구나 라고 깨달았던 것이죠.
그러면서 바울은 이 텐트가 완전히 못쓰게 되서 버려지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미래에 대한 대책을 세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대책으로 별 다른
것은 없었고, 죽음 이후에 또 다른 세계에 대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약속을 붙잡은 것이죠. 요한복음 14장2,3절에 죽음 이후에 불안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죠.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지금 그 예수님께서 천국에서
여러분의 맨숀 을 짓고 있습니다. 아니 다 지어 놓으시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팔 다리가 쑤시고, 자꾸 육체가 쇠하여 가면, 걱정하지 마십시요. 천국은 영원히 썩지 않고, 아프지 않고, 죽음도 없습니다. 그 천국의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신다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승리하실 것입니다.
- 두번째는, 죽음을 이기는 방법은, 내세를 사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2절 보시면,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하늘나라를 사모하는 바울을 볼 수 있습니다.
C. S. 루이스의 '악마의 편지' 라는 유명한 책에 보면, 사단이 부하들에게 자신의 전략을 설명하는 부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내세를 인정하게 하라. 그러나 그것을 믿고 사모하지는 못하게 하라"
내세를 인정하는 것과 사모하는 것에는 굉장한 차이가 있습니다.
미국사람들에게 내세의 존재를 믿느냐는 질문에, 믿는다고 답한 사람이 80%나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중에 내세를 사모하는 사람은 10%도 안 된다는 조사 결과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내세를 사모한다면, 그 내세를 준비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죠?
그런 분들은 이 땅에 살아가면서, 서로 갈등하며, 싸우며, 아웅 다웅 다투며
사는 것이 시시하게 여겨질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을 읽어보시면, 믿음으로 살아갔던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이
어떻게 이 세상의 것들에 대해서 시시하게 생각하며 살았는지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히브리 기자는 26절에, 모세를 소개하면서 그는 "죄악을 누리는 것 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좋아하고,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그리스도를 더 큰 재물로 여겼다" 고 기록합니다. 모세에게 있어서,
이 땅의 보물은 주님이었으며,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분이셨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이러한 말씀이 있습니다. 네 재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다고
말합니다. 변치 않는 진리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왜 천국을 사모합니까? 그곳에
보배로우신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제가 버지니아에서 아리조나 투산으로 지난 2월에 이사왔을 때, 한 두 달은
힘들었습니다. 버지니아에 친한 목사님들도 있고, 사랑하는 귀한 성도들도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사막 땅 투산에 거주할 집이 있고, 사역할 교회가 있고, 사랑하는 성도님들이 있으니까, 버지니아는 점점 잊혀졌습니다.
사람은요. 내가 귀하게 여기는 것들이 있는 곳에 정들게 되어 있습니다.
천국에 도저히 값으로 매길 수 없는 여러분의 것들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그래도 그곳에 정들지 않으시겠습니까? 그곳을 사모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이 땅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승리하며 살수 있는 방법은요. 그 너머의 세상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사모할 때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 세번째, 죽음을 이기는 방법은, 심판이 두렵지 않을 때 죽음을 이길 수가 있습니다.
본문 10절 보시면,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즉, 우리는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서, 잘 달렸든, 못 달렸든 지금까지의 삶에 대해서 평가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삶의 여정을 모두 마치고 사랑하는 주님 앞에 서는 그날, 여러분들을 어떤 모습으로 서길 원하십니까? 부끄럼 없이 서길 원하십니까? 부끄러움 없이 설 수
있다면, 죽음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겠죠. 그러나 그렇게 썩 괜찮은 삶을 살지 못했다면, 주님 앞에 서는 것이 두려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마지막에 주님 앞에 설 그때에, "주님,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 말을
할 수 있는 인생은 얼마나 귀한 인생인지요?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요.
주 앞에 설 그때에, 담대하게 이 말을 할 수 있는지, 아니면 두려워 오돌오돌 떨고 있어야 할지.
기독교의 위대한 성자, 성 프란시스가 인생의 마지막이 가까웠을 때, 그의 친구였던 의사 조바니가 그를 방문합니다. 프린시스는 조바니에게 '친구여 내가
얼마나 더 살 수 있을 것 같소?' 묻습니다. 조바니는 프란시스를 안심 시키려고 '친구,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면 병을 곧 물러갈 걸세." 이때 프란시스는 '내게 진실을 말해주시요, 나는 죽음을 두려워 하는 소쩍새가 아니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만이 나의 소원이라오" 이 말에 조바니는 "금년 초를 넘기지 못할 것" 이라 말해줍니다.
이 말을 듣자 프란시스는 두 손을 높이 치켜들고, 형언할 수 없는 표정으로 하늘을 향하여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이 땅에서 한번 삶을 누린 자라면 어느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것, 죄 중에 죽는 자는 재앙이로다. 그러나 당신의 거룩한 뜻을 이루며 세상을 떠나는 이, 그는 행복한 자가 아닌가?"
그때가 프란시스가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믿은 지 20년 되던 해 1226년 그의 나이 마흔 다섯이었습니다.
사랑하는 꿈의 성도님들, 이제 주님을 향해 출발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 부끄럼 없이 설 그날을 준비하며 살고 있습니까?
만약, 지금 이순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두 가지만 명심하고 사시길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첫째는 천국의 존재를 확신하고 마지막 순간의 결산을 준비하는 삶을 사십시요.
또 하나는 그 나라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삶을 사시길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