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의 창고/ 비전나리의 설교

2010년 11월 27일 새벽예배 교회 안에서 의견이 다를 때- 롬 24:13-20

Peartree 2012. 12. 24. 13:21

교회안에서 의견이 다를 때

롬 24:13-20

 

세상에는 애매모호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자체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은 그 중간쯤에 위치해 있는 것을 우리는 애매모호하다 라고

합니다.

고대 스토아 철학자들은 이런 중립적인 애매모호한 것은 '아디아포라'라는 헬어어

표현을 썼습니다. '구별하지 힘들다' 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은 아무 거리낌없이 할 수 있는 일도, 믿음이 약한 사람은 양심의 가책을 받는 수가 있습니다. 로마 교회 당시에 음식 문제가 그랬고, 절기와 월삭 문제가 그랬습니다. 믿음이 강한 이방인 성도들은 음식을 가리지 않고 먹었지만, 유대인 성도들은 율법에 따라 음식을 가려 먹었습니다. 이런 일로 교회가 두 파로

나뉘어 갈등을 빚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교회 안에서 이렇게 판단하기 애매모호한 것들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오늘 본문에 몇 가지 권면하고 있습니다.

 

  1. 첫째로는, 형제 자매가 걸려 넘어져 죄 짓지 않게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13절 보시면, 현대인의 성경 번역으로는 "그러므로 이제부터 우리는 서로 비판하지 맙시다. 그리고 형제 앞에서 장애물을 놓아 죄를 짓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합시다"

자기 자신의 신앙에는 거리낌이 안 되는 말이나 행동이라 할지라도 상대방이 그것 때문에 걸려 넘어질 것 같으면 당연히 조심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고린도전서 8장 13절에 사도바울이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며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 라고 기록한 것과 같은 말입니다.

18세기 영국의 위대한 설교가 찰스 스펄전 목사님이 한 때 담배를 많이 피웠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크리스찬 흡연가들은 스펀전을 들먹이며 자신들의 흡연을 합리화시키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스펄전 목사님이 한 가게 유리창에 놓인 담배 광고를 보게 되었습니다. "스펄전이 즐겨 피는 담배". 그후로 스펄전 목사님은 자신이

사람들에게 안 좋은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에 충격을 받고 금연을 결심하였다고 합니다. 술과 담배가 자기 신앙에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해도 그것 때문에 실족할 이웃이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당연히 그만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도 "어린

소자 하나를 실족케 하면 연자 맷돌을 목에 매고 다바에 던지우는 것이 낫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1. 두번째는, 사랑의 동기를 가지고 이웃을 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5절 보시면, "만일 식물을 인하여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니라"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교회 안에서 믿음이 약한 사람을 사랑으로 대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8장을 보시면 우상에게 바쳐졌던 음식을 먹어야 되느냐, 말아야

되는냐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음식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제사

음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시에는 시장에서 파는 고기들 중에 그 주인이

시장에 내어 놓기 전에 우상에게 제물로 바치고 제사를 드리는데 사용했던 고기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고기를 사먹는 것은 우상 숭배에 참여하는 것으로 받아 들였습니다.

쉽게 말하면, 제가 호주에서 타이 레스토랑에 한번 간적이 있었습니다. 태국

친구들이 자기네 음식중 "통냥품" 이란 음식이 너무 맛있다고 그러길래,

가족과 함께 갔었습니다. 그런데 식당에 들어서자 마자 절에 온줄 알았습니다.

태국 사람들이 95% 가 불교라서 그런지, 테이블 식탁보도 연꽃으로, 우리가

먹는 그릇에도 연꽃으로, 사방을 둘러봐도 온통 불교에 관련된 것들이었습니다.

물론 이 사람들은 장사하기 전에 불공을 드리겠죠. 그러면 이 식당에 가서

먹으면 우상에게 참여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바울은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다, 오로지 하나님 만이 유일한

신이시다. 그러니까, 우상의 바쳐졌던 고기도 다 하나님의 것이니 나는 자유하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내가 그것을 먹는 것을 보고 믿음이 약한 형제들이나

자매들이 실족하면 먹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죠.

 

만약에 믿음이 있고, 먹는 것에 대하여 사도바울처럼 자유한 사람이 있어서, 이런

고기나, 식당에 가서 사 먹는 것을 믿음 없는 사람이 보고, 실망하게 되고, 시험에

들면, 믿음있는 사람은 "너는 참 어리석고 믿음이 없는 사람이다 라고 하며 핀잔을 줄 수도 있습니다." 이럴 때에 모든 책임을 믿음이 없는 형제에게 뒤집어 씌우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본문 15절은 책임이 누구에게 있습니까?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라"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 책임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15절에 또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식물로 망케하지 말라" 믿음이

약한 성도를 책망하지 말고 믿음이 있는 네가 먹지 않으면 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1. 세번째는, 하나님의 사업을 세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지금 로마교회 성도들 가운데, 먹는 문제로 갈등이 일어난 것입니다. 우상에게 드려졌던 음식을 먹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그래서 서로가 자기와 의견이 다른 상대방을 비판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상대방을 비판하고 판단하는 일이 매우 작은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들이 작게 생각하는 상대방을 비판하는 이런 일이 엄청난 하나님의 사업에 큰 손실을 가져올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업을 세운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큰 일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22절의 말씀대로, "내가 가진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즉 다시 말하면, 다른 사람이 자기를 비판하고 판단한다 할 지라도, 흔들림 없이 믿음을 지키면 되는 것입니다.

 

크리스찬이란 단어는 원래 작은 그리스도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의 행동과 나의 삶을 통하여 예수님을 드러내는 것이 크리스찬인 것입니다.

 

유명한 알렉산더 대왕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알렉산더가 거느린 군대에 알렉산더와 이름이 같은 졸병 하나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졸병의 행동이 형편 없어서

사람들이 이 졸병 알렉산더를 욕을 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알렉산더 대왕이 졸병

알렉산더를 찾아가 "네 이름이 알렉산더지?" 묻고는 "듣자하니 네 행동이 고약해서 알렉산더라는 이름에 먹칠을 하고 있다. 그러니 네게 두 가지 명령을 한다. 이름을 바꾸어라 왜냐하면 네 이름 때문에 내 이름이 욕을 먹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름을

바꾸기 싫거든 네 삶을 바꾸어라 라고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일은 굉장한 큰 일을 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요.

  1. 만나는 형제에게 죄 짓지 않게 하고
  2. 사랑의 동기를 가지고 대하여야 하며
  3.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값을 하며 살면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