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신칭의
로마서 4 : 1 - 3
영국이 낳은 세계적인 설교가 스펄전 목사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설교에 있어서 예화는 집의 창문과 같다”라는 유명한 말했습니다. 집에 있어서 창문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창문을 통해서 빛이 집 안에 들어오게 됩니다. 만약에 집에 창문이 없다면, 집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 대전의 반 지하에서 살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낮에도 불을 켜지 않으면 안되는 그런 집이었습니다. 얼마나 어둡고 답답한지 몰라요.
설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가 하는 설교가 잘 이해되지 않는다고 생각해 보세요. 자리에 앉아 있기가 괴로울 것입니다. 설교를 이해 못하면요, 마치 빛이 잘 안 들어와 어둡게 된 집과 같아서 마음이 답답합니다. 따라서 올바른 설교자라면 설교 중에 적합한 예화를 들어서 청중으로 하여금 말씀을 잘 깨닫게 하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화는 설교를 잘 이해하게 하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또 그 말씀이 머리 속에 오래, 오래 기억하게 하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학교 설교학 시간에 교수님이 이런 말을 하셨습니다. “교인들은 목사의 설교는 기억하지 못해도 목사가 든 예화는 기억한다.” 저의 경험으로 보아도 이 말은 대단히 맞는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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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성도들은 목사가 다른 설교를 하고, 같은 예화를 쓰면, ‘목사님 그거 예전에 했던 설교입니다.’ 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건 예화만 기억해서 그런 것입니다. 또 설교는 같은 설교인데, 예화를 바꿔서 설교하면, 다른 설교인 줄 안다는 것입니다.
이 만큼 예화가 우리의 머리 속에 오래 기억이 남는 다는 말입니다.
어떤 분들은 “성경만 가지고 말씀을 전하지 왜 예화를 들어 하나님의 말씀을 오염시키냐?” 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주장은 별로 설득력이 없습니다. 말씀을 듣는 분들이 이해를 하는데 도움이 될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예화를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예화를 사용하지 않으셨다면 말이 되는데, 예수님께서도 복음을 전하실 때 청중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많은 예화를 사용하셨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수십개의 비유가 다 그런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읽은 본문을 보면, 사도바울이 로마서를 쓸 당시에 이 글이 ‘교리서’ 라서 너무 딱딱한 거예요. 그래서 예화를 사용한 장이 4장입니다. 그래서 4장을 보면 한 장 전체가 거의 예화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4장의 내용은 3장의 연속입니다. 3장에서 믿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새롭게 열렸다고 말하면서, 4장에서는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 가면서 다시 한번 설명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아브라함이라는 예화를 들어 설명하는 것은 이 ‘구원 얻는 진리’ 가 너무도 중요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입니다. 또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를 사람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4장에서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 이 진리를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3장에서 바울은 과거에는 율법을 행하여야 구원을 얻을 수 있었는데, 이제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이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과거에는 율법을 다 지켜 구원을 얻는 것이 불가능 했었는데, 이제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기 때문에 가능해졌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게 되는 하나님의 의, 즉 구원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이 믿는 자에게는 누구에게나 주시는 것이라고 말씀해요.
이것을 3장21절, 22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계속해서 28절을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사람이 의롭다 함을 입어 구원을 얻는 것이 첫째는 율법의 행위에서가 아니고 믿음으로 되는 것이고, 둘째는 믿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주시는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을 신학적인 용어로는 “이신칭의” 또는 (이-으로서라는 한자어) “이신득의”라고 합니다. 여러분들께서도 많이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교회를 다니시는 분들이라면 상식적으로 이 용어 정도는 알고 계시기 바랍니다. 이 말은 우리 개신교에서 아주, 아주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진리입니다. 어떻게 보면 개신교의 생명을 여기에 걸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16세기에 부패하였던 로마 카톨릭으로부터 종교 개혁을 일으킬 수 있었던 원동력이 바로 이 말씀이었습니다. 구원의 조건으로 선행을 강조하였던 카톨릭에 대항하여 마틴 루터, 즈빙글리, 칼빈과 같은 종교 개혁자들은 “이신칭의”, 즉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로마서에 나온 이 말씀을 가지고 개혁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개신교의 한 교파인 우리가 속해 있는 침례교도 이 말씀을 진리로 믿고 따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이 사실을 잘 받아 드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유인 즉, 구원이 너무 쉽다는 것이지요. 개신교에서 주장하고 있는 그 구원이 공짜이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 편에서는 아무 노력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런 구원이 저절로 굴러 들어올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구원을 얻으려면 최소한 내가 몸을 움직이거나 발버둥을 쳐야 되는데 믿기만 하면 받는다니 너무 어처구니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너무 각박한 세상 속에 살기 때문에 공짜에 익숙하지 못해서 그런가 봅니다.
예를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여기에 다 죽어가는 환자가 한 사람 있습니다. 의사가 환자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 것도 걱정하지 말고 가만히 계십시오. 그러면 나을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환자는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가만히 있으면 낫는다니....., 아, 내가 드디어 죽는가 보다. 이제 죽게 되었으니 의사도 치료를 포기하는구나”라고 하며 크게 낙심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이 약을 먹어 보십시오. 이 약은 최근에 개발된 약인데 당신의 병에는 아주 효과가 큽니다. 그런데 이 약은 매우 비쌉니다.”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환자는 약이 비싼 것에는 관계 없이 살기 위해 그 약을 사서 복용할 것입니다. 환자는 살기 위해서라고 하면 소화제를 주어도 죽기 살기로 먹을 것입니다.
구원의 문제도 이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구원을 받기 위해 하나님 앞에 무엇인가 들고 나와야 한다고 하면 사람들은 얼마가 들던 상관하지 않고, 들고 나올 거예요. 그런데 아무 것도 들고 나오지 않아도 된다고 하니 이상하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싱겁다는 것이지요. 그 구원이 정말일지 의심스럽다는 것입니다.
최소한, 일년 동안 새벽에 일어나 냉수를 떠 놓고 손이 닳도록 빈다거나, 또는 불국사에 있는 다보탑 주위를 삼천 번을 돈다거나, 그렇지 않으면 돈 일억 원 쯤 내놓아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아마도 그것을 더 잘 받아드릴 것입니다. 그래야 얻은 것 같고 받은 것 같게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냥 믿기만 하면 된다니 이것이 이해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인가 해야 하는데 내 대신 예수님이 다 했으니 나는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그것에 거부감을 갖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쉬운 십자가 앞에 나아가는 자만이 구원의 길이 열립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 방법입니다.
캠브리지 대학의 학장이자 영국 회중 교회 설교자였던 모건 박사가 1900년 경 영국 중부 지방 요크셔에 가서 전도 대화를 열었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 날 저녁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하다는 내용의 설교를 끝낸 후, 한 광부가 찾아 왔습니다. “박사님, 저도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지만 그냥 믿기만 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저의 죄를 용서해 주실지 믿을 수가 없어요. 그렇게 해서 얻은 구원이 너무 값이 싸 받아드리기가 어렵군요.” 그러자 모건 박사가 광부에게 물었습니다. “오늘 당신은 어떻게 땅 속에서 나왔습니까?” “예, 늘상 하던 대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나왔지요.” 다시 모건 박사가 물었습니다. “그럼 그 엘리베이터를 타는데 얼마를 내셨습니까?”
광부가 정색을 하며 대답했습니다. “돈을 내다니요? 그냥 타면 됩니다. 회사에서 아주 비싼 돈을 들여서 엘리베이터를 설치했기 때문에 그냥 타면 됩니다. 그러면 땅 속 깊은 곳에 들어갔다가도 아주 쉽게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자 모건 박사가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땅 속 깊은 곳에 들어갔다가도 회사가 많은 돈을 들여 설치해 놓은 엘리베이터만 타면 밖으로 나올 수 있듯이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가 당신의 죄를 사해기 위해 아주 비싼 값을 치루였기 때문에 그것만 믿음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은 결코 값싼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 앞에 나아가기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수 천년 전에 미리 보여 주셨습니다. 그것이 모세가 뱀에게 물려 죽어가던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높은 장대에 매달았던 놋 뱀이었습니다. 모세가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시내 광야로 나왔을 때 일이었습니다. 원래 목이 곧아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던 그들이 불순종 때문에 뱀에 물려 죽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기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제시하였습니다.
그것은 아주 간단한 방법이었습니다. 뱀에 물린 상처를 칼로 째고 독을 빨아 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물린 팔이나 다리는 잘라 내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높은 막대기 위에 매 달아 놓은 놋으로 만든 뱀을 쳐다보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도 쉬운 방법이었습니다. 그저 놋 뱀을 매달아 놓은 곳으로 가서 고개를 들어 놋 뱀을 바라보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독이 제거되어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누가 어리석은 사람입니까? 놋 뱀을 쳐다본 사람입니까? 안 쳐다본 사람입니까? 세상적으로, 이성적으로 본다면 쳐다본 사람들이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안 쳐다본 사람들이 똑똑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어리석게 보이지만 믿음을 가지고 쳐다본 사람들은 살아났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장18절은 이 사실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그러면 오늘 본문에 하필이면 성경의 수 많은 인물들 중에 바울이 아브라함을 예로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브라함은 유대인들이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는 민족의 조상이기 때문입니다. 너희들 민족의 조상인 아브라함도 믿음으로 구원받았다고 말하려고 아브라함을 예화로 들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수 천년 동안 믿어왔던 구원관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충격적인 말이었습니다.
1절부터 3절을 한 번 보시겠습니다.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한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아브라함이 구원을 얻은 것은 행위에서가 아니라 믿음에서 였다 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하면, 당시에 로마교회 안에 있는 유대인 크리스천들이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냐고 따질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은 그들이 믿는 구약성경 창세기 한 구절만 찾아서 주면, 다 해결되는 문제였습니다.
창세기 15:6절을 한번 찾아 보시겠습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이신칭의 …입니다……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고, 믿음으로 구원 받았다고 창세기에서부터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요, 유대인들이 주장하고 있는 것과 같이 행위로 구원을 받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구원 받은 것은 그의 행위에 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정든 고향 땅을 떠나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니 아브라함은 떠났습니다. 또 백 살에 나은 귀한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니까 바쳤습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이런 순종을 보시고 하나님이 그를 의롭다고 하신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물론 아브라함이 하나님 명령에 순종을 잘 한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순종 때문에 그를 의롭게 보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의롭게 보신 것은 그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또 다른 의문을 품어야 합니다. 아니 아브라함 때에, 예수 그리스도가 아직 오시지 않을 때 였는데, 누구를 믿었다는 것입니까? 그때는 하나님을 믿은 것입니까? 라고 물으실지 모릅니다. 아닙니다. 그때 아브라함도 구세주 예수님이 오실 것을 미리 알고 믿었습니다.
요한복음 8:56절을 찾아 보겠습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영어성경은 더 분명하게 말합니다.” ‘he saw it
and was glad.’ 아브라함은 그때 이미 예수님을 보고 기뻐하며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다른 방법을 없고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성도들이나 신약의 성도들이나 다 같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말씀은 바울이, 그들과 아주 가까운 아브라함을 예화로 들어가면서, 구원은 믿음으로 얻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신칭의, 이신득의 이것이 우리 개신교의 모태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번 붙잡은 믿음에서 흔들리지 말고 견고하게 서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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