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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의 창고/ 비전나리의 설교

2013년 4월 24일 수요설교 : 사나 죽으나 주를 위하여 - 롬 14:1-9

by Peartree 2013. 4. 24.

사나 죽으나 주를 위하여

14:1-9

 

한국에서는 회식자리나 술자리에서 술잔을 서로 부딪히면서 외치는 소리가 있습니다.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위하여라고 말합니다. 예전에는 건배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일제 시대 때 일본사람들의 건빠이 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순수한 한국말로 쓰자고 해서 위하여 라고 하는데, 사실 이 위하여 라는 단어는 술자리에서 사용하기에 너무나 아까운 아주 좋은 말입니다.

 

위하여라는 말 앞에는 어떤 단어가 있는데 생략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회사에서 동료들과 위하여 한다면 어떤 말이 생략된 거 같습니까?  회사의 장래를 위하여이런 말일 것입니다.

또 여러 사람들과 같이 산에 올라가 위하여 한다면 어떤 의미겠습니까? 건강을 위하여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가족끼리 모여서 술은 먹지 말고, 음료수라고 마셔가며 위하여 한다면 어떤 의미겠습니까? 가족의 화목을 위하여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저희 교회도 이 번주에 위하여 한번 해 볼까요? 그러면 어떤 의미일 것 같습니까? 교회의 부흥과 성장을 위하여  등등  이런 의미 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 사람만 위하여 하지 않고, 2000년에 사도바울도 이 위하여 라는 단어를 참 좋아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읽은 본문 말씀에만 위하여 라는 단어를 무려 8번씩 반복해서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사도바울도 술잔을 부딪히면서 위하여 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의 위하여 와 우리의 위하여 는 차원이 다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철저히 나를 위하여살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사도바울은 주를 위하여 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8절에 보시면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사나 죽으나 주를 위하여사는 것은 어떤 삶인지 몇 가지 살펴 보기를 원합니다.

 

1)  첫째로 주를 위하여 사는 삶은 자기를 부인하는 삶입니다.  

 

본문 7절을 보시면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사도바울이 우리 중에 라고 말하는데, 누구를 말하는 것이냐면, 당시의 초대교회 성도들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불신자들에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신자들은 모두가 자기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자기를 위해 사는 사람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 말을 아주 단호한 말입니다. 성도의 운명이 이미 결정되어졌다는 말입니다.

성도라면? 나를 위해 살아도 되고, 가능하면 주를 위해 살아야 합니다.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인정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결정된 사항이라는 것입니다.

성도라면,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그렇게 살아야 함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목적이 였습니다. 나 자신이 인생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는 모든 목적이 주님을 위해서 살게 된 사람으로 바뀌었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크리스천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을 사도 바울만 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와 똑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16:24절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죠.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고 말씀하시죠.

자기를 부인하고. … 쉬운 말로 하면 지금 나는 내가 아니다이렇게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 내 모습이 내가 아니면 나는 누구란 말입니까?’

 

나는 주를 위해 살고 주를 위해 죽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인본주의자들은 예수를 위해 살라는 이 말씀을 가지고 인간의 자유를 박탈하는 비인도적인 말씀 이라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사단 마귀도 그렇습니다.  언제나 성도들이 예수를 위해 살지 못하도록, 육신에 따르게 만듭니다.

세상교육이 그렇습니다. 너는 참으로 중요한 사람이다.  라고 교육합니다. 여러분 참 괜찮은 말 같이 들이죠. 너는 아주 소중한 사람이야

 

어떻게 들으면 맞는 말 같이 들리지만, 아주 위험한 말입니다.

 

예를 들어요. 물고기보고, ‘너는 참 소중한 물고기야! 너는 너 하고 싶은 대로 너를 위해 살아도 돼 라고 가르쳤다고 해요. 그래서 물고기가 그래 나는 아주 소중한 물고기야, 내가 죽으면 아무 소용 없잖아라고 하면서 물을 떠났다고 해 보세요. 죽음 목숨입니다.

물고기는 물속에서 자유한 것입니다. 물고기는 물속에서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예수 안에 있을 때, 참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있을 때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꾸 내 속에서 가 나오면 안되요. 나는 죽고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서 역사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사나 죽으나 주를 위해서 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2)  두 번째로 주를 위하여 사는 삶은 소유 의식이 분명한 삶입니다.

 

본문 8절을 보시면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누구의 것이라고요? 주의 것이로다

 

앞에서 우리는 성도는 자신을 위해 사는 자가 아니고, 자기를 위해 죽는 자도 아니라고  배웠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우리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 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들은 주의 소유된 백성 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은 누구의 것입니까? 여러분의 생명도 누구의 것입니까?

주의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말하고, 그렇게 가르칩니다.

 

고린도전서 6: 19-20 절에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너의 인생은 너의 것이 아니라, 나의 것이다 라고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또 이사야 43: 1절에도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내 인생의 주인이 내가 아니요 주님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보다도 자기 자신을 더 생각하고, 집착하는 사람은 성도라 말할 수 없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분명한 소유 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자신의 소유주를 위해 기꺼이 생명도 드렸습니다.

 

당시에는요 그 나라의 왕이 나라의 주인 이였습니다. 그래서 왕을 라고 불렀습니다. 영어로는 ‘Lord’ 라고 합니다. 그런데 또 다른 주인이 나타난 거예요. ‘Jesus Christ My Lord’   

이것은 왕권에 대한  도전입니다.

그래서 당시에는 크리스천들을 잡아 죽이는데 어떤 죄목으로 잡아 죽였냐면, 예수님을 믿는 다는 죄목으로 잡아가지 않았습니다. 당시에도 종교의 자유가 있었습니다.

국가에 대한 반역죄로 잡아 가두고, 사자의 밥이 되게 하고, 단두대에 목을 자르고, 화형에 살라 죽였던 것이 다 반역죄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에 서머나 교회 담임목사님이신 폴리캅 목사님 화형으로 순교 당하기 직 전에 가이사 에게 라고 한 마디 만 하면 살려주겠다고 제안했었습니다.

 

폴리캅 목사님


그런데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못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결정권이 폴리캅 목사님에게 있지 않고 주님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내 몸과 영혼의 주인은 주님이시기에, 가이사를 향하여 라고 부를 결정권이 폴리캅 목사님에게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에게 결정권이 없습니다.

주님의 저와 여러분들을 피로 값 주고 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요. 저와 여러분들은 죽는 것도 내 맘대로 죽을 권한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내 맘대로 죽어봐요.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살하는 사람이 천국 갑니까? 절대 가지 못합니다.

자살하는 사람은, 내 몸과 영혼의 주인이 주님이 아니고 나라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살하면 큰 일 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존재하는 모든 피조 세계는 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합니다.

고린도전서 10 31절에서도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합니다.

 

갈라디아서 2 20절 말씀으로 결론을 내리고자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